<김명열칼럼> 살아있는 천사, 선하고 착한 사람, 오드리 헵번

<김명열칼럼> 살아있는 천사, 선하고 착한 사람, 오드리 헵번

 

몇주전 수요 예배시간에 담임목사님의 설교말씀 중에 세계적인 유명스타 여배우 오드리 헵번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녀는 생전에 선한일, 착한일, 궂은일들을 마다않고 살아있는 천사로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헌신적이고 따듯한 온정을 베풀다가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올라간 사람이다. 평소에 나는 그녀의 이러한 선한 업적과 행동들을 뉴스를 통해 보고 들으면서 무척이나 그녀를 존경하며 천사같이 훌륭한 의인이라고 생각했었다.

목사님은 그녀의 마지막 유언이자 시의 일부 구절을 인용하면서, 우리들도 그녀처럼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착하게 세상을 살 것을 강조했다.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여배우 오드리 헵번, 그녀는 1988년 유니세프 친선대사가 된 후 그녀는 세계 곳곳의 구호지역을 다니며 굶주림과 병으로 죽어가는 어린이들의 현실을 온 세상에 알렸다. 그녀가 직접 구호활동을 위해 찾아간 곳은 수단, 에디오피아, 방글라데시, 엘살바도르 등 무려 50여곳이 넘었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이 평생에 걸쳐 쌓은 명성과 인지도, 인기를 아낌없이 구호활동을 위한 기금 모집에 이용했다. 하지만 정작 구호현장에서는 절대로 자기 자신을 스타로 처신하지 않았다. 그녀는 두 아이를 둔 어머니로, 죽어가는 어린아이들을 바라보며 진심어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오드리 헵번은 그녀를 단지 왕년에 잘 나가던 은막의 스타로 알고 있던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기부활동과 구호활동을 이끌어냈다. 그녀는 자신의 명성과 부에 대한 사회적인 책임을 느끼고 지속적인 활동을 한 받은 사랑을 돌려 줄줄 아는 스타였다. 이러한 그녀의 인생 마음가짐을 자식들에게 남긴 유언으로도 엿볼 수 있다. 그녀는 최고의 스타이며 매사에 노력과 최선을 다 하였다. 그 자리까지 올라가기까지에는 남몰래 힘든 부분이 너무나 많았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없이 겸손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그녀의 겸손한 말을 바라보며 나는 내 인생을 어떻게 재정비 해 나아가야 하는지 방향을 다잡게 됐다.

옛날 나의 청년기시절, 요정의 스타 오드리 헵번이 주연한 영화를, 그녀가 너무나 좋아서 그녀가 출연한 영화들을 종종 관람한 적이 많았었다.

티파니에서 아침을, 로마의 휴일, 마이 페어 레디, 샤브리나, 파계, 전쟁과 평화 등등……… 살아있는 천사, 우아한 스타일리스트, 요정, 청순미, 깜찍함, 만인의 연인, 패션의 아이콘 등의 그녀를 향한 온갖 수사력의 언어를 총동원해도 모자랄 정도의 세기적인 미인이자 아름다운 여성이 바로 오드리 헵번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마리린 먼로와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여배우, 오랜 세월이 흘러도 가장 아름다운 여인, 아름답되 이지적이며, 우아하되 기품이 넘치는 여왕 같은 이미지의 여인………. 어느 누가 감히 오드리 헵번앞에서 여성의 미모를 논할 수 있을까. ‘티파니에서 아침을’ 영화에서 무료함을 이기지 못한 한 여성이 아파트 비상계단에서 기타를 튕기며 Moon River를 낮은 목소리로 흥얼거리는 모습을 보고 가슴 설레지 않을 남자가 있을까. 미인의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태어난 여성으로 평가받은 인물이 바로 오드리 헵번이다. 하지만 그녀의 삶의 궤적은 그렇게 순탄했거나 행복하지는 않았다.

1929년생인 그녀의 출생지는 수도 브뤼셀, 국적은 영국이다. 아버지는 영국인 앤서니 헵번 루스틴, 어머니는 네덜란드인 엘라 반 헴스트라이다. 오드리 헵번의 귀족적 이미지는 진짜 귀족이었던 모계의 피를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태어난지 3개월만에 백일해로 목숨이 위태로웠던 오드리 헵번은 의사와 어머니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 극적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살아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여덟 살 되던 해 나치를 위해 일하기 위해 가정을

버리고 떠난다. 남편이 떠난 뒤 집안이 몰락하자 딸과 함께 네덜란드에서 궁핍한 독일 점령기를 보내야했고 헵번은 영양실조에 시달리며 어려운 성장기를 보낸다. 전쟁은 이 어린천사를 절망의 끝까지 몰고 갔다. 그녀는 식량이 없어 튤립뿌리를 씹으며 두달을 살아야했고, 사랑하는 외삼촌이 전쟁이라는 광기속에서 처형을 당하고, 두 오빠는 레지스탕스가 되었다. 말라깽이 몸매와 오뚝한 콧날, 호수에 풍덩 빠질 것 같은 왕방울 눈은 이때의 혹독한 영양실조에서 생겨난 것 같다. 어머니마저 떠나면서 아이는 할아버지 손에 맡겨졌다. 아이는 이때부터 오드리 헵번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발레리나를 꿈꿨던 헵번은 170Cm라는 큰 키로 인해 무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영국으로 건너가 모델로 성공한다. 그녀는 1950년대와 60년대 지방시 모델이 되어 이 브랜드가 세계적 명성을 얻는데 기여한다. 그녀는 연기수업, 드라마수업 등을 받았고, 몇몇 영화에서 단역이나 조연으로 활약하다가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 1953년 그레고리 펙과 함께 출연한 데뷔작 ‘로마의 휴일’이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하며 신데렐라가 된 것이다. 로마의 휴일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오드리 헵번은 세기의 여배우로 떠오르게 된다. 그녀는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을 수상했고, 이른바 ‘헵번 스타일’이라 불리는 숏 커트 헤어스타일을 세계적으로 유행시켰다.

그녀는 미국인 배우와 첫 결혼을 했고, 이탈리아 의사와 재혼했다. 그녀는 화려한 배우생활에도 불구하고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가 있었다.

어린 시절 자신의 신념을 위해 가족을 버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그녀는 1959년에 국제 적십자사를 통해 아버지의 행방을 수소문한 끝에 극도의 가난속에서 외롭게 살고 있는 아버지를 더블린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용서하고 그가 죽을때까지 생활을 책임졌다. 우연한 기회에 유니세프와 인연을 맺은 세기의 여배우는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그녀가 이 자리를 맡게 된 이유는 2차세계대전 직후 네덜란드에서 궁핍한 생활을 할때 유엔구호기관으로부터 식량과 의약품을 지원받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비행기와 버스, 낡은 트럭을 얻어 타고 아프리카 전지역, 서남아시아의 방글라데시, 중남미와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등을 찾아가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죽어가는 어린이들을 살려냈다. ‘어린이 한명을 구하는 것이 축복’이라며 질병에 신음하는 아이들을 스스럼없이 끌어안고 고통을 함께 하며 눈물을 흘리는 이 천사를 보며 인류의 양심도 함께 울었다. 그녀는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소말리아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명망 있는 의사들이 이 천사를 살리기 위해 나섰으나 암은 그녀의 삶을 몹시도 시기, 질투했다. 그녀는 은퇴 후 오랫동안 살았던 스위스의 아름다운 호반의 마을로 돌아와 가족들과 함께 생의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그리고 떠날 시간이 다가오자 자식들에게 낮은 목소리로 유언처럼 시를 남겼다. Moon River를 부르던 그 목소리로…….

“아름다운 입술을 가지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러운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봐라. 날씬한 몸매를 가지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눠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하루에 한번 어린이가 손가락으로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으면 결코 너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하라. 사람들은 상처로부터 복구되어야 하며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워져야하고, 병으로부터 회복되어야하고, 무지함으로부터 교회되어야 하며, 고통으로부터 구원받아야한다. 결코 누구도 버려서는 안된다. 기억하라. 만약 도움의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 한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1993년 1월20일, 그녀는 눈을 감았다.”

향년 63세, 그녀를 조문한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가장 아름다운 천사를 갖게 됐다“고…..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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