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가을의 묵시(默示)

<김명열칼럼> 가을의 묵시(默示)

9월이 지나가고 10월도 깊어 가니, 모든 산야의 초목들은 단풍의 색깔이 더욱 짙어졌다. 머지않아 저렇게 곱게 물든 단풍잎들은 하나 둘씩 수명을 다해 땅위로 낙엽이 되어 떨어질 것이다. 단풍의 끝은 낙엽이다.

즉 단풍의 운명은 낙엽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단풍을 보면서 낙엽을 생각지 않는다. 생명의 순환속, 한 단계이지만 우리의 시선은 연속선 상에 있지않아, 이것이 바로 정보의 단절이고 시각의 왜곡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랑곳 하지 않고 살아간다. 왜냐하면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이러한 자연 현상을 자연의 이치로, 하늘의 섭리로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삶 속에서 발견하는 순리이고 광명이다. 자기 안의 하늘을 만나는 것은 자기 자신도 자연의 이치로, 또는 하늘의 섭리로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있다. 많은 복은 하늘이 주어서가 아니라 자기가 구해서 얻어지는 것, 즉 바로 자구다복(自求多福)이라는 뜻이다.

저렇게 단풍으로 물들어 떨어져가는 낙엽을 보면서 우리들에게 배우고 시사하여 주는바가 있다. 단풍진 나뭇잎이 위태로이 매달려 부는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마침내 떨어지고 마는 숙명을 타고 난 존재들이지만 더 큰 가치를 위하여 몸 색깔을 바꿔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것이 바로 단풍이다. 다채로운 모습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사라지는 단풍들의 짧고도 강렬한 여정이 지속되고 있다. 최고로 아름다울 때, 즉 절정의 순간에 추락하는 낙엽이 되고서야 깨닫게 된다. 가을은 풍성하고 튼실한 열매를 수확하는 기쁨, 온 천지를 물들이는 울긋불긋 찬란한 풍경들로 마음이 설레게 되지만 정작 내 마음을 흔드는 것은 풍요가 아닌 사라지고 있는 생명에 대한 숙연이다.

가장 건실하고 알찬 꿈을 만들어주고 말없이 돌아가는 가을은 자식의 미래를 위해 희생하는 부모님 같아 마음이 애잔하다. 가을은 기쁨과 슬픔, 결실과 허무, 풍요속의 외로움을 간직하고 있기에 이율배반적이라고 할수 있다. 우리 삶에서 느끼는 모순처럼 아이러니한 계절인 가을은 삶의 깊은 철학을 함축하고 있다. 가을이 주는 선물인 낙엽이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은 푸르게 피어날 미래의 나무를 위하여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는 고귀함 때문일 것이다. 알고 보면 모든 자연현상들이 홍익(弘益=큰 이익 또는 널리 이롭게 하는 것)이다. 사라지는 모든 것들이 결코 가치가 없어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단풍과 낙엽을 통해 다시금 배우게 된다.

생명의 영원함은 생명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명의 영원함을 의미한다. 생명의 영원함이란 단순히 영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생명은 유한하지만 그 생명이 갖고 있는 본질은 영원하다. 우리의 몸은 육체, 에너지체, 정보체로 구분된다. 에너지체와 정보체는 보이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간이 갖고 있는 에너지와 정보는 한사람의 의식을 결정한다. 그 의식은 사람됨의 지표가 된다. 인간이 가치로운 것은 의식의 성장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의식이 성장하게되면 자연의 이치, 하늘의 섭리대로 조화로움을 추구하게 된다. 이것이 좋은 뇌가 갖는 특징이다. 반면 나쁜 뇌는 이치와 섭리에 따르지 않고 조화로움 보다는 분별하고 단절하고자 한다.

나날이 엷어져 가는 햇볕에 겨울의 도래를 예감한 것인지 길가 옆, 갓 자라난 어린 풀들은 이젠 더이상 성장을 멈추고 키가 작으면 작은대로 제각기 꽃들을 피워내고 있다. 가을은 이런 들꽃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신의 묵시(默示)를 보여주는듯 하다. 만일 아직도 한여름의 추억속에 잠겨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서 지금껏 긴 긴 방황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면, 들꽃들이 자기의 때를 알고서 밖을 향해 뻗고나가기를 그치고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서 스스로에게 가장 알 맞는 꽃들을 피워내는 그 예지(豫智)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우리 인생에도 머잖아 가을이 올 것이고, 그때 우리도 품안에 아름다운 꿈의 결실을 하나씩 간직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때까지도 가슴속에 알찬 열매를 맺지못한 사람들은,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꾸짖어서 말라죽게 한 예수님의 무서운 저주와 같은 날벼락, 무서리가 때를 모르는 초목들 위에 얼마나 혹독하게 내리고, 얼마나 허망하게 그것들을 사그라지게 하는가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대부분의 인간들은 찬란한 여름 햇살에 도취되어 가을을 예비하지 않으며 마침내 가을이 당도했는데도 마음속엔 여름에 대한 추억만 간직하고 가을과 겨울을 애써 무시하며, 계절의 순환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낙엽을 떨구게 하는 소슬한 가을바람을 감내하지 못한다면 꽃봉오리를 피어나게 하는 봄바람도 맞이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계절이 바뀜을 고통으로 생각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세월의 강물은 흐름을 멈추고 모든 생명과 존재의 기쁨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생명의 본질은 본래 끊임없이 순환하고 변화하는데 있다. 따라서 세월의 흐름은 생명을 소멸시키는 고통스러운 것이기도 한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는 생명의 환희를 안겨주는 모태라고 할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으면 구태여 여름이라는 계절에 연연해 할 필요도 없고, 여름이 가는 것을 그렇게 애달아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게 흐르는 시간의 강물은 꽃다운 젊은 얼굴을 주름지게 하고, 윤기 나는 검은 머리에 어느덧 하얀 서리가 내리게 하며, 우리로부터 세상의 모든 것을 덧없이 변화시키며 빼앗아가고 만다.

이렇게 변화하는 만상들로 부터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자신만의 적막한 세계에서 영원불멸의 가치를 묵상하며 덧없이 흐르는 시간의 물결속에 발을 담그는 것을 거부하고, 그 평안에 안주하여 언제까지나 깨어날 줄을 모른다.

자기 마음속에 높고 두터운 담벼락을 쌓고 안으로 칩거해버린 사람들이 정신적인 영원불멸을 향유하며 바깥으로 향한 마음의 창문을 걸어 잠글때 그들의 마음속 뜨락에는 심리적인 계절의 순환도 멈춰버린다. 영원불멸이란 시간의 흐름과 순환이 정지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어느날에나 그들은 자기 가슴을 스스로 가르며 싹을 내미는 한 알의 씨앗처럼 그들 스스로 굳어진 마음을 열어젖히고, 생명의 환희와 아픔을 안겨주는 이 세상으로 자신을 드러내겠는가?……그러고 보면 저 들꽃들은 얼마나 순수하게 제철을 따라 피고 지는가 ! 스스로를 꽃 피우고 나면 곧 사그라질 자신들의 운명에 기꺼이 순응하면서 그것들은 자기 자신을 기꺼이 산화(散華)하는 것이 다. 그렇게 피워낸 꽃봉오리들이기 때문에 저 들의 야생화는 그토록 눈이 시리게 아름다운 것이리라.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한사람 때문에 다른 모든 사람을 깨끗이 포기한다는 고독한 자기 결단과 선택의 결과이다. 따라서 모두 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것이며, 단 한사람이라도 뼛속 깊이까지 사랑한 사람은 전 인류, 아니 이세상의 모든 생명을 완전히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것에 연연해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이룰 수 없으며, 자신이 한번 잡은 일에 젖먹던 힘까지 다 바쳐 헌신하는 사람은 세상의 무슨 일이든지 다 이룰수 있는 사람이다.

가을이 조락(凋落)과 함께 상실의 계절이라면 그것은 바로 당신의 머릿속을 맴돌며 어떠한 선택도 못하도록 가로막는 화려한 환상으로부터의 ‘조락’ 이어야 하며, 그 헛된 기억에 대한 (상실)이어야 할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기꺼이 꽃 피움으로서 사그라져 가는 들꽃들이 그로 말미암아 겨울을 지새울 씨앗을 맺듯이 당신도 인생의 겨울을 이겨낼 꽃을 피워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생명을 활짝 꽃피운 대가로 당신은 이 땅에서 곧 흔 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겠지만 그 때문에 스스로를 결실 할수 있게 될 것이다. <문학 작가 김명열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380/2023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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