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진정한 우정의 친구

<김명열칼럼> 진정한 우정의 친구

성경말씀, 구약 잠언25장 19절에 “진실치 못한 자를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거짓된 자를 믿고 의지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가르쳐주고 있다. 지혜가 있는 자는 진실하지 못한 사람을 의뢰하는 것이, 부러진 이로 음식을 씹고, 위골 된 발로 걸으려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거짓된 자는 이익을 위해 찾아왔다가 이익이 사라지면 즉시 등을 돌려버린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친구)을 사귀거나 의지하며 마음을 준다면 나중에 큰 낭패를 당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친구)은 정직하고 진실해서 쉽게 배반하지 않고 웬만한 친구의 흉허물이나 잘못은 덮어주고 용서하며 우정으로 감싼다. 이러한 친구는 신실해서 어려운 때에도 신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친구나 이웃은 많지 않으며 만나기도 쉽지 않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의리를 지키기를 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연약하고 간사해서 손해가 되거나 위협을 받으면 대부분 이해타산으로 잔머리를 굴리고 등을 돌린다. 이러한 사람들은 유익이 되면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선의(?)을 베풀다가 손해가 되고 불리하며 수가 틀리면 얼음처럼 차갑게 돌변하고 배신을 한다. 그들은 의리를 지키는 사람을 융통성이 없다고 비웃고, 자신들은 합리적이고 현명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은 친구를 배신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러한 사람을 믿는 사람은 반드시 배신을 당하고 크게 후회를 하게 된다.

글의 서두(書頭)에서 먼저,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 질문을 하나 던진다. “당신께서는 지금 진정한 친구가 몇명이나 됩니까?” 인간관계에 있어서 진실한 우정으로 대화할수 있는 친구가 없고 속마음을 털어놓고 말 할 친구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처럼 비참하고 불행한 존재는 없을 것이다. 인간은 혼자 살수 없는 만큼, 네가 없는 나를 생각할 수가 없다고 보겠다. 근대에 이르러 하루가 다르게 온갖 과학과 문명이 인간생활을 변화 발전시키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미쳐 인간관계에서 기계적 관계로 변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격변과 변천하는 사회의 톱니바퀴에 엇물려 스스로 생각할 여백도 없이 다만 그 사회적 조직체 속에서 돌아가는 대로 적응해가면 그만 이라는 사고방식이 보편화 되어가고 있는 현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러다보니 심지어 일부 층에서는 특별히 친한 친구를 가질 필요가 없고, 또한 가졌다고 해도 유사시에 특별한 도움이 될 수 있는 친구가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모든 것은 이해관계 조정에서 결정되는 것이므로 거기에 기성 윤리를 선행시킬 필요는 없다고도 한다. 이러한 삭막한 인간관계에 만족하는 것이 현대 인간관계의 정상이라는 것이다.

나의 학창시절에만 해도 가장 귀중한 인간관계는 진정한 친구의 윤리적 도리였다. 조선시대에는 인간관계를 오륜(五倫)으로 규정지었다. 부자(父子), 군신(君臣), 부부(夫婦), 장유(長幼), 붕우(朋友)의 정상관계를 가장 기초적인 훈육으로 붕우(朋友). 즉 친구와의 정상관계는 어디까지나 믿음(信)이라고 했다. 이것은 서로 믿고 신용이 확립되고 신뢰하고 진실해야 한다는 뜻이다.

붕우는 평등과 자유를 기초로 하고 사귀는 것이 인간관계라 하겠다. 인간으로서의 평등과 자유를 선행조건으로 한다는 것은 모든 인간관계의 기본이다. 민주주의 사회의 장점은 우도(友 道)를 모든 인간관계의 기초로 삼는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아버지가 아들을 고 자세로 억압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막힘없이 진실을 토로하면서 상의하는 것이 평화롭고 정이 넘치는 가정이며, 부부의 기반도 서로 친구가 되며 자유롭고 진실 된 바탕에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고 하겠다. 결코 남존여비나 부 자유의 분위기는 조성되지 않는 것이 현대 가정이다. 그러므로 친구 되는 도(道)는 오직 진실을 바탕으로, 좋고 나쁜 것은 있는 그대로 말해주고 우정 있는 충고를 해 주는 것이 과거나 지금이나 진정한 친구의 도리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친구간의 첫째는 믿음이고 진실이다. 친구끼리 서로 시기 질투하고 모함하고 불신 한다는 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흔히 이해관계에서, 자존심에서, 그리고 위선에서 배신은 결코 친구로서의 도리가 아니다. 진정한 친구는 어떠한 선악의 경우가 닥치더라도 우정의 연속을 당연히 원칙으로 해야 한다.

친구라는 기준은 평생지기 / 죽마고우와 같은 의미의 속마음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오랫동안 서로 어울려서 길들여진 친구가 있는가 하면, 사회생활을 통해 만나 친해진 사회적 친구가 있다. 물론 사회생활을 통해 만나서 평생지기가 되지 못할 건 없다. 단지 그만큼 어렵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어렸을 때 누군가와 친해진다는 건, 말 그대로 아무런 세속적 잣대가 필요없이 마음이 가는대로 순수하게 서로 어울려 지내면서 친해진거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통해 만난건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어쩔 수없이 어느 정도의 사회적 관계(심하면 이해관계)를 통해 만나게 됨에 따라 자신도 모르게 저울질을 하게 된다. 물론 서로가 하기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결론적으로 사람과 사람이 친해진다는 것은 서로 어울려 지내는 시간이 오래되어 서로가 길들여진다는 의미이다. 단순히 몇번 만나 말이 통한다고 느낀다면 그만큼 쉽게 실망할 수도 있다. 면전에서는 친구라고 하면서 뒤돌아서서는 비방하고 헐뜯고 엉뚱한 말을 하는 비열한 친구가 우리의 이웃, 주변 사회에서는 얼마나 많이 있나?…….!

그런 것을 우리는 실제로 목격하고 겪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한 친구는 아예 오늘부터 절연 하고 없는 친구로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마음도 편하고 사회생활에 보탬이 될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친구를 사귀고 갖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자랑할 것 까지는 없다. 자랑할 만한 많은 친구를 갖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신뢰할 수 있고, 힘들 때 의지할 수 있는 친구를 단 한명이라도 갖는 것이다. 대인 관계의 성공과 실패를 가늠해 볼수 있는 한 기준은 “친구가 몇명이 되느냐?”가 아니라 “그러한 친구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친구를 사귀는데 있어서도 중요한건 질이지 양이 아니다. 당신에게는 그런 친구가 있습니까?.

“네 나에게도 그런 친구가 있습니다. 지금도 서로가 마음을 주고받으며, 몸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마음은 가까운 곳, 곁에 있으며 따뜻한 우정을 나누고 있습니다”

“나의 이러한 마음을 표한 글을 읽으면 그 친구도 나의 마음처럼 동감하고 나에게 우정 린 사랑을 보낼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행복합니다. <문학 작가 김명열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376/2023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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