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 금강산 관광때 있었던 일들의 이야기<4>

<김명열> 금강산 관광때 있었던 일들의 이야기<4>

지난주에 이어서………..

아까운 쌀밥을 왜 버리느냐고, 북한 접대원의 눈총어린 핀잔? 을 받고 나니 기분이 떨떠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북한은 먹을 것이 부족해서 많은 사람들이 기아선상에서 허덕이고 있고, 심지어는 어느 곳에서는 밥을 먹지 못해서 굶어죽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지 않던가…….. 그 접대원의 항의성? 발언을 듣고 보니 그렇게 말하는 접대원 동무의 말에 수긍이 갔으며,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이 생겨났다.

한국에서 의식주로 표현하는 걸 북한은 먹는 것을 우선하여, 식의주로 칭한다. 입는 걸 앞세우는 남한과 먹는 문제를 우선시 하는 북한의 모습이 극명하다. 그러한 북한의 식량사정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북한은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사람들이 전체 2500만 인구 중 절반 수준에 이른다고 한다.

북한은 어쩌다 이렇게 굶주림의 나라가 되었을까? 상황은 중차대하고 복잡하지만 의외로 진단은 간단하다. 사회주의 집단농업 체제의 비효율에 종자, 비료와 자재, 장비가 부족한 총체적 난국이 제대로 된 식량 소출을 어렵게 한다. 개별 영농을 허용한 뙈기밭이나 산비탈에 만든 다락방의 생산성이 협동농장보다 훨씬 높다는 건 이를 입증한다.

식량문제 때문에 골치를 앓은 것은 김일성 시대부터다. 김일성주석은 ‘이팝(쌀밥)에 고깃국을 먹고 비단옷 입고 기와집에 살게하겠다’고 약속했지만, 3대에 걸친 70여년 통치에도 전혀 해결되지 않고 있다. ‘옆집 연희네 가족은 온 가족이 굶어죽었다 / 그들의 이름을 쌀독에 묻었다 / 땅에서 굶어죽어 또 다시 굶주릴까봐 / 쌀독에 묻었다’ 몇년전에 출간된 시집 “밥이 그리운 저녁”의 제목이 ‘쌀독’인 시 구절이다. 밥, 쌀이 시집이나 시의 제목으로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쌀밥 한그릇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는 작가의 마음을 그대로 느낄 수 있어 오히려 공감이 된다. “밥이 그리운 저녁”의 시집을 펴낸 작가는 탈북시인 이다. 황해남도 해주시에서 태어난 이 작가는 2011년 탈북 해 한국에 입국했다. 2012년 12월 대한문예 신문사를 통해 등단한 그는 이듬해엔 시 부문 통일부장관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어느 신문기자가 그에게 물었다. “이 작가에게 북한에서의 밥과 한국에서의 밥은 어떤 의미인가?” “북한에서의 밥은 밥이 아닌 눈물이었다.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산에서 나무껍질 벗기고, 들에서 풀뿌리 캐서 팔아 어렵게 마련한 식량으로 밥을 지었기에 눈물 그 자체였다. 이거 먹으면 내일 먹을 것이 없어 걱정이 되어 때론 죽마저도 남기곤 했다. 밥은 그리우면서도 무서운 존재였던 것 같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밥은 감사다. 내가 배불리 먹을 수 있고 또 누군가를 사랑으로 줄 수 있는 생명체이다. 또한 한국에서 밥은 다시 채울 수 있는 사랑의 연속이어서 늘 삶과 힘의 원천으로 다가온다. 지금도 이 따뜻한 쌀밥 한 그릇과 마주하면 굶어 죽어가는 북한 주민들이 생각난다” 이상과 같이 북한에서의 참혹한 그곳 주민들의 실제 상황 이야기가 적나라하게 쓰여 있다.

이걸 보면 북한의 식량사정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금강산 관광 특구 북한의 경영 식당에서는 쌀밥이 넘치게 관광객들에게 제공되고 있다. 이게 뭔가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의문점이 생겨난다. 이런 의문점을 이야기 하자 동행한 우리팀 관광객 한명이 뜻밖의 소문을 전해준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귀가 솔깃해지는 이야기를 들은 대로 전해 옮겨본다.

금강산 관광을 하면서 종종 북한측에서 운영하는 식당에서 쌀밥을 먹었는데, 밥맛이 무척 차지고 좋았다. 하얀색깔에 기름기가 자르르 흘렀고, 꼬들꼬들하며 입안에 착착 달라붙었다. 쌀밥을 먹으면서 생각하기를, 북한에서도 이렇게 맛있는 쌀을 생산할 수 있는 농업기술이 발달됐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다른 생각, 북한은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확실한데, 이곳에 관광오는 수많은 남한 측 손님들을 위해 이렇게 대접할 여분의 맛좋은 쌀이 있을까?…… 하며 의문의 말을 함께 온 관광단 일원에게 얘기했던 것인데, 나의 얘기를 들은 그 사람이 뜻밖의 뉴스를 알려주었다.

그 역시 먼저 “제가 드리는 말씀이 백프로 확실한건 아닙니다. 다만 저도 신뢰감이 가는 어느 지인에게 들은 얘기인데요….. ” 하면서 말을 시작한다. 그의 말을 빌자면, 북한은 쌀이 너무나 부족하여 잡곡(옥수수, 콩, 감자, 고구마, 귀리, 조 등등)을 쌀 대신 주식으로 먹고 있는데, 이곳에서 관광객들에게 제공되는 쌀밥은, 실은 남한의 경기도 이천, 여주 쌀이라고 한다. 만약 북한 측이 북한의 쌀로 밥을 지어 관광객들에게 대접하면 맛도 없을 뿐 아니라 남한의 쌀처럼 차지질 않고 색깔도 흰색이 아니라 약간 누리끼리한, 누런빛의 색깔을 띄고 있다고 한다.

그러한 쌀을 남한측의 관광객들에게 제공했다가는, 입맛이 고급화로 길들여진 남한 측 손님들에게 흉잡힐 꺼리만 제공해줄 빌미가 됨으로, 더불어서 낙후된 북한의 농업생산기술만 노출시키게 되는 마이너스 경영 사업이 되기에, 아예 사전에 비밀리에 현대아산측과 협의하여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밤중에 대형 화물선으로 바다를 통해 맛좋고 질좋은 경기미를 수천가마씩 들여와서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 보관해놓고, 필요할 때마다 그 쌀을 내다가 밥을 지어 남한측 관광객들에게 대접해 준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북한측의 어느 식당에 가든지 그들이 내놓은 쌀밥은 모두가 한결같이 맛이 좋고 기름지었으며 차지었다. 그때마다 ‘참 이상하다. 북한에서도 이렇게 질 좋고 맛좋은 쌀이 생산되나?’ 하는 궁금증이 생겼었는데, 이 사람의 설명을 듣고 나니, 그 궁금증과 의문점이 해소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의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한 것이 아니기에 그 진위 여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풍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북한의 실정상 그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삼일포에서 점심식사와 대동강맥주 한병을 곁들여 먹은 흑돼지 요리의 맛은 참으로 좋았다. 자연에서 키운 흑돼지로 만든 삼겹살은 쫀득쫀득 하고 지방분이 그리많지 않아서 고소하고 맛이 너무나 좋았다. 장작불에 구운 고기는 개스 불에 구운 고기맛보다 훨씬 좋았다. 내가 보기에는 술안주용으로 구워낸 것 같은데, 거기에 함께 쌀밥과 김치, 도라지무침, 고사리무침 등과 곁들여 먹으니 더욱 음식 맛을 돋구어주었다. 사각형으로 된 큰 접시에 수북히 담겨져 나온 고기는 우리 세식구가 실컷 먹고도 3분의 1 이상이 남았다. 대동강맥주 한병과 곁들여 먹으니 배가 너무나 불렀다. 배가 부르다보니 남은 쌀밥과 고기를 쓰레기통에 버리다가 북한의 접대원에게 발견되어 ‘아까운 쌀밥을 왜 버리느냐?’고 핀잔을 받은 것이었다.

맥주 한병은 3달러를 받았다. ICE Box에서 금방 꺼내어 줘 무척 시원하게 마실 수 있었다. 내가 방금 마신 대동강맥주는 북한에서는 이름난 맥주라고 한다.

북한에서는 4대 맥주로 꼽히는 봉학맥주, 금강맥주, 룡성맥주, 대동강맥주 외에도 평양맥주, 경흥맥주 등 다양한 맥주가 생산된다. 이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북한의 국민맥주로 불리는 대동강맥주다.

현재 북한에서 가장 오래된 맥주는 평양맥주로 195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생산됐다. 그리고 1980년대 조선 로동당 직속으로 맥주공장이 세워지면서 룡성맥주가, 뒤이어 봉학맥주가 생산됐다. 이후 1996년에는 북한 최초의 캔 맥주인 금강생맥주가 출시됐다. 북한의 맥주문화는 2000년 들어서면서 커다란 전환점을 맞았다.

2001년 러시아를 방문한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샹트 페데르부르크에 있는 발티카 맥주공장을 시찰한 뒤 맥주산업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2000년 문을 닫은 영국 어셔즈(Ushers) 양조장 설비를 인수하여 통째로 북한으로 가지고 왔다.

영국에서 북한으로 건너간 양조장설비가 자그만치 커다란 컨테이너 30대 분량이었다고 한다. 맥주공장은 평양시 사동구역에 지어졌다. 영국 양조장 설비에 당시 최신식이었던 컴퓨터로 통제하는 독일제 양조기술을 도입해 2002년 6월 준공식을 했다. 그것이 대동강맥주의 시작이다.

다음주에 계속 이어짐 <문학 작가 김명열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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