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북한 금강산 관광 때 있었던 이야기들<1>

북한 금강산 관광 때 있었던 이야기들 <문학작가 김명열>

매주 내가 써 올리는 칼럼의 글을 읽으신 독자들께서 독후감이나 칭찬의 댓글을 보내주시는 분들이 많이 계신다.

지난 7월 26일자 ‘여름철의 별식 냉면 이야기’를 읽으신 독자 여러분께서도 이멜을 통하여 독후감이나 개인의 의견을 보내주셨다. 그중에서 의외의 주제로 문의를 하신분이 계신다. 내용을 보니 A씨~ 김작가님께서는 미국 시민권자라고 하셨는데 미국 시민이 공산국가인 북한을 방문할 수 있었나요? 미국에 들어올 때 문제없이 귀국할 수 있었나요? B씨~ 금강산 관광은 제약없이 자유롭게 구경할 수 있었습니까? 그곳 주변의 북한 사회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C씨~ 나는 금강산 관광을 하려고 예약까지 해놨었는데, 어느 여자 관광객이 북한군의 총에 맞아 피살되는 사건으로 가지를 못했습니다. 그곳의 치안이 그렇게 불안하고 공포분위기 입니까?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구경을 제대로 할 수는 있었나요? …… 등등의 질문들을 보내주셨다.

그 당시. 2005년 8월달에 나는 금강산 관광을 갔었는데 이후 여행 기행문을 시카고에서 발행되는 중앙 일간지에 여러번에 걸쳐서 기행문을 기고했었다. 그때 역시 많은 독자들께서 흥미와 관심속에 재미있게 나의 여행기행문을 읽으셨다. 십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그때의 여행 기록들을 모두 열거하여 말씀드릴 수는 없으나. 이번에는 그때 신문에 올리지 않았던 비화(秘話)의 재미있었던 이야기들을 들려드리도록 하겠다. 위에서 독자들께서 질문하신 내용들이 전해드리는 글의 내용 중에 다 들어있으니 참고하시기를 바란다.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 철따라 고운 옷 갈아입는 산 / 이름도 아름다워 금강이라네 금강이라네…<이하 노래 생략>

태백산맥 북쪽에 위치해 있는 금강산은 사계절, ‘봄에는 금강산’ 새싹이 돋아나고 만물이 소생하며 330여종의 식물이 꽃피는 향기 그윽한 봄철의 이름은 금강석과 같이 아름다운 보석에 비유하여 금강산이라 한다.

‘여름에는 봉래산 逢來山’ 녹음이 우거지고 흰구름과 안개가 감도는 여름철의 금강산은 마치 신선, 선녀가 사는 산이라 하여 봉래산 이라 한다.

‘가을에는 풍악산 楓嶽山’ 금강산의 기암절벽과 단풍이 어우러져 한곡의 멋진 풍악을 울리는 듯 하다 하여 풍악산이라 한다. ‘겨울에는 개골산 皆骨山, 또는 설봉산’ 기기묘묘한 바위들에 흰눈이 덮인 겨울철의 금강산을 개골산 또는 설봉산 이라 한다.

이렇게 금강산은 사계절이 각각 다른 아름다운 경관을 지닌 명산중의 명산이다.

금강산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강원도 금강군, 고성군, 통천군과 대한민국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 거진읍, 현내면, 수동면에 걸쳐있는 산이다. 태백산맥에 속한 높이 1638m의 이산 이름 금강은 불교에서 유래했다. 불교에서 금강은 불퇴전(不退轉), 즉 물러나지 않는 진리를 향한 굳은 마음을 뜻한다.

1998년 11월18일, 현대그룹의 첫 해상관광, 유람선으로 시작된 금강산 관광은 남북교류 협력의 상징으로 불리다 2008년 고(故) 박왕자씨 피살사건으로 완전 중단된 금강산 관광은, 1998년 11월18일 유람선 ‘아산 금강호’를 이용한 해로(海路) 관광으로 시작됐다. 1989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북한을 방문해 ‘금강산 관광 및 시베리아 공동개발 등에 관한 의정서’를 체결해 초석을 다졌고, 1998년 6월 정 명예회장의 ‘소 떼 방북’으로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금강산 관광은 남한 국민이 북한을 직접 여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관광 그 이상의 상장적인 의미를 지녔다. 금강산 인근에 숙박시설이 없었던 초창기에는 유람선에서 숙박하면서 관광이 진행됐다.

금강산 육로 관광이 가능해지면서 관광시작 6년만에 관광객이 100만명을 넘겼다. 해로를 통해서만 갈수 있었던 금강산 관광은 2003년 9월부터 육로 관광을 시행했다. 다음해인 2004년부터는 유람선관광이 중단되고 육로 관광만 가능했다. 2005년 6월7일에는 금강산 관광객수 100만명을 돌파했다.

관광시행 이후 6년 6개월만이다. 관광이 전면 중단되었던 2008년 까지 195만명 가량의 관광객이 금강산을 찾았다.

2008년 7월11일, 금강산 관광객이었던 박왕자씨가 북한군 초병의 총에 맞아 사망하는 피살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발생일 오전 5시경 해안가 주변을 산책하던 박왕자씨는 북한군 초병이 쏜 총탄에 의해 사망하게 된다. 다음날인 7월12일부터 금강산 관광은 전면 중단됐다. 당시 사건을 둘러싸고 박씨의 이동 거리 및 정확한 피살 시간을 두고 남북이 이견을 보이기도 했다. 박씨의 죽음을 둘러싼 명확한 진상규명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다.

금강산 관광 중단 후에도 재개 논의는 끊임없이 이어졌으나, 재개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특히 박근혜정부는 관광재개를 위해 박왕자씨 피살 사건에 대한 북측의 사과와 진상규명, 재발방지책이 선행돼야 한다는 의견을 내놔, 북한과의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그러나 친북 정책을 폈던 문재인 정부에서 대북정책을 적극 추진하면서 관광 재개에 대한 기대감이 컸으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계속되는 북한의 도전적인 미사일 도발과 이에 따른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강화로 실제 금강산 관광은 물거품이 되었다.

2005년 7월중순, 나는 한국 일주 여행과 곁들여 금강산 관광을 위해 나의 가족 3명은 10여년만에 한국을 방문했다.

8월25일 새벽5시, 우리가족은 머물고 있는 서울의 처제집을 나와 모 여행사에서 제공한 관광버스를 타고 강원도 고성군에 위치한 최북단의 군사분계선 근처 동해선 남북출입 사무소에 9시에 도착했다. 그곳에 가서 보니 각 여행사에서 단체로 여행을 온 관광객 수백명이 북새통을 이루면서 줄을 서서 꾸역꾸역 출입국 사무소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곳에 들어가서는 모두가 출국 검사대에 줄을 서서 신분증과 여행증명서를 제출하며 북한으로 가기 위해 수속을 밟고 있었다. 우리가족도 여권을 지참하고 목에는 여행증을 걸고서 들어가니 어느 안내 직원이 우리의 미국 여권을 보고 저쪽의 외국인 심사대로 가서 줄을 서라고 한다. 내국인(한국인) 심사대는 사람들로 북적이며 긴 줄이 이어 졌는데, 외국인 출국 심사대에는 한사람도 서있지 않았다. 미국 여권소지자인 미국인인 우리가족 3인(나, 집사람, 딸)은 여권과 여행증명서를 제출하고 출국심사를 마쳤다. 길게 줄을 선 내국인들은 우리 가족을 부러운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내국인들은 지루하게 줄을 서서 기다리다 보니 간단하게 수속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는 우리 가족이 무척이나 이색적이며 부러웠나 보다.

북한으로 가기 위해 수속을 마치고 나오니 나의 여행사에서 주선한 현대아산 그룹의 관광버스가 우리 여행객 일행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을 버스에서 기다리다 보니 함께 여행을 할 관광객 40명이 모두 버스안에 승차했다.

인원점검과 더불어 다시 한번 신원확인이 있었고, 4박5일 동안 우리 일행과 동행하여 북한 금강산 관광 안내를 해줄 현대아산 여직원이 자기소개를 한다.

그리고 아울러 북한 금강산 여행중에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여러가지 주의 사항들을 알려준다.

북한 ‘금강산’ 여행중에 지켜야 할 사항들

(1) 지참금지 품목~ 쌍안경의 망원경, 고감도 카메라, 무전기, 핸드폰, 호출기, 총기류, 등 (2) 사적지, 김일성 어록, 돌비석 등에 걸터앉거나 훼손 및 비방하는 것을 금지. (3) 북한 군인들과 대화 및 접근 금지 (4)김일성 뱃지를 만지거나 손가락질 하지 말 것. (5) 지정된 장소 외에는 절대로 벗어나지 말며 남한의 찬양이나 체제선전(자유, 평화, 민주주의)에 대해 일절 언급 금지 (6) 군인 시설이나 북한군인 촬영 절대 금지 등 이상의 사항들을 위반시 북한 당국에 체포 및 구금될 수 있으며 압수된 물품은 일체 반환 안함. 이상의 주의 사항을 듣고 나니 온몸이 두려움과 공포감이 팽대해져 소름이 돋아났다.

우리 일행들은 모두가 겁을 먹고 두려움속에 북한을 향해 버스에 몸을 싣고 판문점으로 향했다.

<문학 작가 김명열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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