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지난날을 반성하며 새해의 미래를 다짐해본다.
추운 냉기에 휩싸인 겨울의 한 가운데서 새해를 맞았다.
2023년 새해가 시작된지도 여러날이 지나갔다. 누구나 신년 새해가 되면 지난 한해를 되돌아보며 반성과 후회를 반추한 새로운 다짐을 가슴속에 다져본다.
나의 젊은시절, 연초의 한 해는 설렘보다는 자책과 반성으로 부터 시작했다. 그때 그 시절, 그 옛날의 젊은시절 때를 회상해 보면, 새해에는 시작과 더불어 수많은 자책과 무거운 다짐과 각오로 채워졌다. 그것은 피끓는 젊음의 과도한 열망과 좌절과 또 새롭게 생기는 끝없는 열망 때문일 것이다. 그 열망의 바탕은 겨울의 하얀 눈처럼 순수하고 겨울 밤 하늘의 별처럼 높게 빛났다. 혼자 몸으로 날고자 하는 새처럼 존재의 비상(飛翔)에 사로잡힌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고, 버겁고 힘들며 바쁜 이민생활속에 어느덧 중년이 되면서 새해를 맞는 반성이나 자책의 각오는 더이상 하지 않게 됐다. 나도 모르는 사이 봄눈녹듯이 어느새 사라졌다. 바쁜 일상이 모든 열망을 대신했다. 가족을 부양하고, 자식들 공부시키고, 조그마하지만 자영업을 일구어 지탱해 가는 일이 다른 모든 일 보다는 중요해졌다. 한해가 저물고 또 새로운 한해가 오는 것은, 한 해의 수고와 노고가 끝나고 새로운 노력의 노고가 시작되는 것에 불과했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노고의 댓가로 가족들이 먹고살 수 있고, 등 따시고 배부른 여유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교회 사람들이나 지인과 주변 사람들과도 덕담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 시간들은 아기자기 하고 풍요로웠다. 그러나 반복되는 해 바뀜속에 때때로 회의가 든다. 삶이 하루하루 똑같은 일상에서 맴도는 것 같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내년에 나는 어디에 서 있을까? 이러다 보니 삶이 부유(浮留)하고 정지하는 듯 느껴진다. 이럴때 오히려 젊은날의 열망과 반성과 자책과 다짐이 부럽기도 하다. 나이가 들면서 반성과 다짐이 사라지는 것은 삶이 일상의 부담에 매몰되기 때문일 것이다. 일상에 미래가 밀려난다. 이래서 반성과 다짐이 있기 어렵다.
지난해 12월30일, 2022년 연말 특별 아침기도회의 새벽예배시간에 예배의 순서를 인도하면서 나는 성도(회중)들에게 ‘금년 한해 믿음과 행동면에서 하나님께 충실치 못한 것을 반성하고, 새해를 맞으며 신년 새해에는 보다 신실하고 충성된 믿음으로서 하나님 말씀대로 성실히 살 것을 다짐하자’고 인사 말씀을 드렸다.
이 추운겨울은 반성을 하기에 적절한 계절이다. 차가운 대기는 우리의 사고(思考)를 냉정하게 만들고, 길고 긴 겨울밤은 생각을 깊게 이끈다. 깊은 밤, 혼자서 책상앞에 앉아 전깃불을 끈채, 캄캄한 암흑과 적막속에 지나온 한 해를 돌이켜 본다.
무엇보다 내 가족과 나와 관계와 인연을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눈처럼 순수함으로 되돌아가 나의 행동을 자책해 본다. 진정으로 나의 삶속에 가치있고 기쁜 일이 무엇인지 헤아려 본다. 그것을 위해 새로운 한해를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스스로 다짐해본다. 한 해의 시작이 봄이 아니라 겨울인 것은 준비의 의미가 있다. 이 겨울 한해의 시작에 몸과 마찬가지로 마음을 단단히 여미기 위해 추위와 찬바람속에 선다. 그 찬바람 속에서 동트는 해를 기다리며 새로운 다짐으로 새날을 맞는다.
야누스(Janus)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의 이름이다. 그는 앞뒤로 두개의 머리를 갖고 있으며, 집이나 도시의 출입구등 주로 문을 지킨다. 문은 시작을 나타내는 데서 모든 사물의 출발점의 신이라고 생각되었고, 신들 가운데 최고의 지위가 주어졌으며 한 해 계절의 개시자로서 숭배되었다. 12개월 가운데 1월이 야누스의 달이어서, 1월의 영어이름 제뉴어리(January)는 야누스의 달(라틴어로 Januarius)에서 온 말이다.
야누스가 두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1월이 야누스의 달이란 것은 깊은의미가 있다. 한개의 얼굴은 어제(과거)를 돌이켜보는 반성의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내일(미래)을 내어다 보는 희망과 설계의 얼굴인 것이다. 그리고 1월은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달이므로 반성과 계획의 달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한해를 맞이했다. 원래 시간이란 것은 연속적인 것이어서 토막지울수 없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시간을 해(年), 달(月), 날(日), 시간(時間)등으로 나누어 생각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은 참으로 현명하고 지혜로운 일이다. 우리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주 우리의 지난날을 반성하고 새 생활을 위한 계획과 다짐을 할수 있기 때문이다
해마다 연말연시가 되면 사람들마다 송구영신(送舊迎新)을 말한다. 내가 적을 둔 교회 역시 지난달 12월31일 송구영신 예배를 드렸다. 오늘은 송구영신에 대하여 생각을 해 보도록 하겠다. 옛날 해가 지지 않는 영국의 속담이다. ‘남자는 마음으로 늙고 여자는 얼굴로 늙는다.’ 맞는 말이다.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길, 기다려주지 않는 세월을 탓하며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인생의 나이 따라 세월속도 또한 빨라지니 해마다 송년을 맞는 노년층들의 마음은 결코 즐겁고 기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영국의 철학자 실러는 ‘시간의 걸음걸이는 세가지다. 미래는 주저 하면서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하고 있다’고 가르쳐 준다 지난날의 송구영신을 통하여 우리는 많은 반성과 다짐을 하며 묵은 해를 보냈고 새해를 맞았다. 새해를 해마다 맞으면서 내가 세웠던 계획들이 작심삼일이 되지 않았는지 되돌아보며 반성하고, 금년 새해에는 큰 각오로 일신일신 우일신(日新日新 又日新)정신으로 꾸준함을 유지해 나가야 겠다.
성경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나와 나의 자손들은 늘 근면하고 노력을 해야 한다. 송구영신의 정신으로 일평생 살아서 어제의 과거, 오늘의 현재는 보람으로 보내고 내일의 미래는 설레임으로 맞는 창조적 인생관이 되어 축복의 통로로 주어진 년월시분초(年月時分秒)를 살아가자.
옛날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은 직접 경작하는 사람들에게만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경작권이 주어졌을 때의 일이다. 대부분의 인디언들은 어차피 땅이야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에 필요한 만큼의 땅에다만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피츄라는 한 인디언은 땅을 더 가지고 싶은 욕심에 잠자는 시간까지 아껴 넓은땅에 농사를 지었고, 그 결과 인디언들 중에 가장 많은 곡물을 수확하여 창고 가득히 채워 넣었다. 피츄는 자신이 땅을 많이 가진 것을 자랑하고 싶어서 마을에서 가장 적은 땅을 경작하는 인디언을 찾아가 자기가 경작하던 땅을 주겠다고 선심을 쓰듯 말했다. “내 땅을 자네가 요청하면 얼마든지 주겠네” “힘들게 일군 땅을 준다니 나야 고맙지만 괜찮다네, 농사를 그렇게 많이 한다면 노래할 시간이 어디 있겠나?”. 이상의 이야기는 삶의 목적이 달랐던 두 인디언의 모습이다.
오늘 우리들도 땅의 것만 매달리지 말고 하늘의 것을 찾도록 노력해 보면 어떨까? 하고 권해드린다. 믿음을 갖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늘의 농사도 지어야 하는 것은, 종말이 가까워 오고,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해 오는 이 시대에, 미래를 대비한 포석이고 인생의 가장 값지고 가치있는 투자이기에 강력하게 권고말씀을 드리고 싶다. 반성과 후회 없는 삶을 위해 천국을 향한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며 굳건한 나의 믿음을 다짐해보는 한 해, 축복되고 건강한 한해가 되시길 모든 분들께 거룩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리는 바이다. (아~멘) <문학 작가 김명열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342/2023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