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조선시대 기생 이야기

<김명열칼럼>  조선시대 기생 이야기

 

옛날 조선시대에는 8종류의 천한 (朝鮮八賤) 신분의 천민들이 살았다고 한다. 나 개인적으로는 조선시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근엄하고 그럴듯해 보였지만 속으로는 온갖 추잡한 일들이 일어났고, 양반들의 생활유지를 위해서 수많은 평민들이 합법적으로 수탈을 당했으며 천민들의 경우는 두말 할 것도 없었다. 또한 유교 사상은 불교와 천주교를 탄압했고 여성을 억압하는 것을 합리화 했으며, 상업과 공업을 천시 하고 충효의 명목으로 많은 사람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얹어 놓았다. 내가 너무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는 것 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까지도 각종 쓸데없는 습속(習俗)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그저 씁쓸할 뿐이다. 이러한 조선시대에 가장 고달픈 삶을 살았던 것은 천민들이었다. 그들은 양반에게도, 평민에게도 철저히 멸시와 차별을 당했으며 그 신분은 당대에 그치지 않고 자손에게까지 세습되었다.

팔천(八賤)은 천민으로 규정되었던 노비, 기생, 백정, 광대, 공장, 무당, 승려, 상여꾼을 일컫는다. 천민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던 노비는 관청 등에 소속된 공(共) 노비와 양반집에 소속된 사 노비로 나눌 수 있다. 이중 공노비는 그나마 다른 천민들에 비해 많은 혜택을 받았으나 사(私)노비는 짐승보다도 못한 삶을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노비들은 상속, 매매의 대상이었으며 체벌등도 종종 가해졌고 여자 노비는 주인에 의해 성적인 착취를 당하기도 했다. 노비들이 혼인하여 낳은 자식들 역시 신분이 세습되어 노비가 되며, 노비와 양인이 혼인해도 그 자식들은 노비가 된다. 양반이 여자 노비를 첩으로 두면 그 자식들은 얼자(蘖子)가 된다. 종모법에 따라 얼자(서자)역시 천민이 된다. 또한 기생은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실상은 표리부동한 유학자들의 성 노예와도 같은 삶을 살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황진이와 같이 역사에 이름을 남긴 기녀들도 있지만, 사실 그들의 삶은 고달프기 짝이 없었다.

기녀(妓女=기생)의 말이 나온 김에 이번에는 조선시대 기생들의 삶과 이모 저모의 일들을 조명하여 알아보도록 하겠다.

몇주전 본보의 칼럼난을 통하여 조선의 명기(名妓) 황진이의 이야기를 서경덕의 이야기와 함께 재미난 이야기로 써 올렸었다.

그 칼럼을 읽고, 참으로 많은 독자분들께서 독후감은 물론 자기의 생각이나 견해, 거기에 얽힌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전해 주시고 댓글도 많이 보내주었다. 그중 여러분들은 그 시대의 기생들의 삶과 생활에 대해 궁금하게 여겼고, 그들의 애환을 어렴풋이나마 추상하면서 좀더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이에 부응하여 이번에는 참고로 이곳에 조선시대의 기생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도록 하겠다.

그 시대(조선시대), 그 여인들, 기생들은 노래와 웃음을 팔지언정 평생 지조를 팔지 않는다는, 몸은 비록 천민이지만 머리는 양반이라는 그녀들은 한시대의 멋과 풍류를 알고 즐겼다. 남자들은 풍류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대했으나 그녀들은 온 몸으로 삶을 승화시켰다.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 하여 일명 해어화(解語花)라고도 불렀다. 상류의 고관이나 한학적 교양이 높은 유생들을 상대로 하다 보니 예의범절은 물론 문장에도 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기생은 술자리의 시중을 드는것이 적어도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겉모습들이다. 기생은 천민출신이지만 상대하는 남성들은 고관대작들이다. 상류층 인사들이기 때문에 이들과 맞서 상대하기 위해 여러가지 훈련을 거친다. 춤과 노래뿐만 아니라 거문고, 가야금 등의 악기 다루는 법을 배워야했고 서화도 잘 그려야 하며, 또 시도 잘 지어야 하고 학식도 있어야 한다. 또한 말씨도 고상한 것을 골라 써야 하며 행동도 교양 있는 사람의 행동을 하여야 한다. 이 같은 훈련은 몇년에 걸친 장기간의 교육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교양정도에 따라 명기(名妓)로 알려진 초일류 기생들이 있다. 그들 중에는 이름난 문인도 있으며 유명한 화가도 있고 명창, 그리고 명연주자도 있다. 명기는 또한 지조가 있고 정조관념이 강해서 상대하는 남성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풍류나 멋이 없는 사람은 상대를 꺼리고, 때로는 기지를 발휘하여 골탕을 먹이곤 하였다. 그러나 풍류를 알고 인품이 훌륭하여 상대할 가치가 있으면 돈이 없어도 이쪽에서 접근하여 교류를 하며 때로는 장래성 있는 젊은이의 뒷바라지를 하였다. 또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의로운 일을 하는 기생을 의기(義妓)라고 한다. 일제때엔 항일기생들이 많았다. 진주기생으로 명월관에 드나들던 ‘산홍’에게 친일파 이모가 당시 거금 1만원을 주고 소실로 삼으려 했으나 산홍은 돈을 보고 “기생에게 줄 돈이 있으면 나라위해 피 흘리는 젊은이에게 주라”하고 단호히 거절했으며, ‘춘외춘’은 남산 경무총감부에 불려가서 경무총감으로부터 배일파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달라면서 돈 한뭉치를 주는 것을 뿌리친 일이 있었다. 또한 이와 같은 개인적인 애국행위 말고도 집단적인 애국행위도 있었다. ‘기생조합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1919년 3월29일 수원 기생조합 소속의 기생일동은 검진을 받기위해 자혜병원에 가던 중 경찰서 앞에 이르러 만세를 부르고 병원에 가서도 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병원에서 검진을 거부하고 다시 경찰서 앞에 와서 독립만세를 부르고는 헤어졌다. 주모자되는 기생 이름은 김향화인데, 그후 그녀는 6개월의 징역 언도를 받았다.

동기(童妓)란 기생교육을 받은 10세 안팍의 어린기생을 말한다. 이 동기가 교양을 쌓고 기생이 되기 위한 수업을 어느 정도 마치고 나이가 15~16세가 되면 남자를 받게 되는데 처음 이 동기와 동침하는 남자는 ‘머리를 얹어준다’ 라는 표현을 쓴다. 즉 초야(첫날밤)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기생의 종류도 그 직책과 품위에 따라 다양하며 따라서 이름도 갖가지로 불리운다. 관기(官妓)란 각 지방 고을 수령의 청을 들기 위하여 두었던 기생으로, 대체로 중앙에서 임명된 관리가 가족을 떼어놓고 혼자서 부임하는 경우가 많아 이들을 위한 위안 대상이었다. 감사가 부임하는 날에는 각 고을의 관기가 총 동원되어 감사를 영접하는 습속이 있는데, 이 기생들은 녹의 홍상을 떨쳐입고 나귀타고 풍악 잡혀 지화자를 부르며 맞이하였는데, 그 수는 4,5백명이며 또 행렬이 10리에 달했다고 한다. ‘약방기생’이란 궁중내에서 대궐의 의복을 지으면서 내연(잔치)에 도 참가하는 기생을 일컫는데 이 약방기생과 상방기생을 합쳐 약방기생이라 하며 이들을 ‘기생재상’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기생으로서 가장 출세한 것이기도 하며 재상이 되는 것 보다 더 어렵다고 해서 하는 말이기도 하다.

기생에게도 종류가 있어 1패, 2패, 3패의 등급이 있는데, 1패란 궁중에서 여악(여자악공)으로 어전에 나가 가무를 하는 기생을 일컫는다. 2패는 관가나 재상집에 출입하는 급이 낮은 기생으로서 은군자 또는 은근짜라고 하며 내놓고 몸을 팔지는 않으나 은밀히 매음도 하는 즉 겉으로는 기생의 품위를 유지하면서 숨어서 매음하는 류의 기생으로서 대개 이들이 관리의 첩이 되거나 한다. (기생은 이론적으로는 술좌석 또는 연회의 흥을 돋우는 연예인이므로………).

3패는 술좌석에서 품위 있는 기생의 가무 같은 것은 하지 못하고 잡가나 부르며 내놓고 매음하는 유녀(노래 계집)를 가리킨다.

기생들의 조직은 1909년 ‘관기제도’가 폐지된 후 지방의 기생들이 서울로 상경함으로써 생겨나기 시작했다. 1913년에 서도(황해도와 평안도)지역 출신의 기생들이 ‘다동조합’을 구성했는데 조합원 수가 약 30여명에 이르렀고 여기에 대항하여 서울출신과 남도(경기도이남)출신 기생들이 모여 ‘광교 기생조합’을 구성하였다. 이 조합은 1914년부터는 이름을 ‘권번’으로 바꾸어서 한성조합은 한성권번, 다동조합은 다동권번으로 불렀으며 이 당시에 있었던 권번은 한성권번, 대동권번, 경천권번, 조선권번 등이 있었다. 각 권번에는 1번수, 2번수, 3번수의 우두머리가 있었으며 그 외에 연령에 따라 선,후배의 위계질서를 이루고 있고 서로 나이에 따라 한살 위이면 ‘언니’, 두살 위이면 ‘형님’, 다섯살 위이면 ‘아주머니’라고 불렀다.

기생은 옷차림으로 보아 여염집 여자와 구별이 되게 입었다. 여염집 여자들이 황색 또는 다홍색을 입음으로 기생들은 이 색을 입지 않고 기생의 지위에 따라 옷을 입었다. 1,2,3번수의 우두머리는 옥색치마를 입었고, 보통의 기생들은 남색치마를 입었다. 일제의 저급한 게이샤 문화가 유입되어 사회적 경시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원래 우리나라 기생은 격이 높아 ‘천민의 몸, 양반의 머리’라 일컬었다.

비록 신분은 천민이었지만 상대하는 이의 격에 맞게 가무(歌舞), 시(詩), 서(書), 화(畵)의 재능과 지조(志操), 지략(智略), 의협(義俠)의 덕목을 고루 갖춘 교양인이었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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