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기다림

<김명열칼럼>  기다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대개가 다 기다림속에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하나님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고, 평범한 사람들은 모두가 다 그들 나름대로의 무언가를 기다림속에 기대하고 소망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느 누구나 기다림의 경험을 갖고 있을 줄로 생각된다. 기다린다는 것을 짧은 단어로 묘사하고 표현하기란 그 범위와 뜻이 너무나 광범위하고 무한하다.

당신이란 존재는 이미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누군가의 기다림을 받는 존재였다. 부모님이라고 불리는 분들께서는 소중한 자식인 당신이 세상에 나와서 밝은 빛을 보게 해달라고 간절히 마음속으로 염원하며 기다리기를 열달 동안이나 하신 분들이다. 탄생이라는 순간을 당신과 함께 했고, 같이 웃음 짓고, 눈물을 흘리는, 당신에게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오직 기나긴 기다림 끝에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하나로 기쁨과 보람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지금 당신이 기다리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사람 역시 당신과 같이 세상의 기다림을 받던 사람이다. 당신께서 선택한사람이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지금 당신을 기다리게 하고 있는 사람이 선택한 사람도 당신이라는 것이다. 당신의 진심을 알아주기를 바라던 사람에게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행복함에 떨림을 느껴야만 하는 상황인 것이다. 만약 지금 당신이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가 또는 그녀가 늦는 이유는 당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예쁘게 꾸미고 치장을 하다가 늦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다른 이유로 늦었을 수 도 있다. 그럼에도 그들의 마음만은 어쩌면 지금 이 자리에 서있는 당신보다 훨씬 먼저 와 있었을지도 모른다. 약간의 짜증을 이겨내지 못했을 때는 기다림의 시간과 기다리던 존재마저 잊을 수 도 있다. 물론 별다른 이유 없이 늦는 그런 사람을 이해하라는 것은 아니다. 어찌되었든, 기다림에 발상을 전환하면 기다리는 것조차 즐거워질 수 있는 것이다. 기다리는 것이 짜증을 부르는 이유는 지루함이라는 것 때문이다. 지루함은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죽을 때 까지 겪는 가장 곤혹스럽고 짜증나는 존재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것도 지루하게 되면, 관계가 단절되는 경우가 많다. 인간관계에서 지루함도 외예일수는 없다. 아무튼 기다림의 미학에 가장 중요한 것은 지루함을 오게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이며, 그것이 해답이다.

사랑하는 사람, 연인이 오면 같이 할일을 생각하며 즐거워하고, 어떤 모습을 하고 와서 나를 기쁘게 할지를 생각한다면, 조금은 덜 지루할 것이다. 그 사람과 함께 할 앞으로의 시간과 추억을 생각한다면 기다리는 시간은 행복한 시간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나의 이런 말이 어리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긴 시간을 기다려도 함박 웃을을 띈 반가운 얼굴로 맞이하는 당신에게 한번쯤은 상대방이 물을 것이다. “무슨 생각하며 기다렸어?”. 그때 당신은 “너와 함께 할 행복한 순간을 생각하며 기다렸어. 생각만으로 행복해지더라” 라고 말해보라. 만약에 지금 당신이 어느 누구와 사랑에 빠졌을 경우 이 말을 그대로 실행에 옮겨보라. 이때부터 남들은 모두 지루한 시간이라고 부르는 기다림의 시간마저도 행복함을 함께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기다리는 시간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더욱 단단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당신이 태어난 이유는 어쩌면 기다림을 함께 할 존재를 만나기 위함일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이 기다리거나 혹은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그 존재일수도 있다. 솔직히 기다리던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을 때 우리는 행복감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약간의 기다림을 선사하면, 거침없이 짜증을 부린다. 그래도 이 약간의 기다림을 선사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과 짜증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행복감을 느낀다. 그러나 세상에는 꼭 그렇게 미소를 짓고 행복감을 선사해주는 기다림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그 기다림의 대상이 영원히 자기 곁에 나타날 수도 없는 막연한 기다림,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생이별의 눈물겨운 기다림도 있다.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리 입센(Henri Ibsen)은 전설적 방랑인 페르귄트를 모델로 동명의 희곡을 썼고, 음악가 그리그(Edvard Grieg)는 1875년 이 희곡에 삽입곡을 작곡하여 발표했다. 삽입곡 중에 나오는 솔베이지의 노래(Solveig Song)는 그 속에 흐르는 애절한 정서로 인하여 전세계 음악인들의 끊임없는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젊은 부인 솔베이지를 집에 두고 페르귄트는 황금을 찾아 머나먼 곳으로 떠나 일생동안 방탕을 했고, 솔베이지는 평생동안 페르귄트를 기다렸다. 솔베이지가 남편을 기다리며 부르던 노래가 바로 ‘솔베이지의 노래’다. 노르웨이에 솔베이지 같은 기다림의 능력을 가진 여성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한국 여인들의 기다림의 능력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다.

실제적인 이야기로, 전북 전주시 교동에 있는 전주 성심여고의 정문 옆에는 민가 한채가 학교의 담에 걸쳐서 반 이상 교내로 진입해 있다. 1960년대 전주 성심여고에서 부지를 넓히기 위해 좋은 가격으로 집을 팔라고 요청했지만, 이집의 여 주인은 끝내 팔지 않았다. 이집에서 함께 살다가 1950년 발생한 6.25전쟁으로 북한 공산군에 강제로 끌려간 남편을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남편을 기다리는 세월이 수십년을 넘기면서 신문사 기자들이 찾아와 인터뷰를 청하면 “저의 남편이 이집을 알고 있으니, 계속해서 그분이 오실 때 까지 이집에서 기다리고 싶다” 고 말했다. 망부석 할머니로 소문난 이 기다림은 어언 60여년을 넘었다. 이러한 사연을 알고 나면 기다림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를 기다려보지 못한 이들은 잘 모른다. 그것도 한,두해가 아니고 몇십년을 넘게 기다린다는 것은 곤혹이 아니라 잔학이다. 사랑하고 좋아하면서도 타의에 의해 서로 어긋나는 안타까움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런 사정을 잘 모른다. 세상에는 이러한 마음이 아프고 가슴속이 숯검정이 되도록 까맣게 타버린, ‘이산가족’을 비롯한 불쌍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잠시 머리를 식히며 생각을 해본다. 살아오면서 무언가를, 그것이 일이든 사람이든 아니면 먼 미래에 실현하고 싶은 꿈이든, 심각하고 치열하게 기다려 본적이 있는가를 말이다. 기다림에는 언제나 기대와 설렘, 초조와 불안이 함께 한다. 기다림은 미래가 있고 가능성이 있다. 일찍이 유년시절에는 유난히 가슴에서 일렁이는 설렘이 많았던 것 같다. 설빔을 머리맡에 두고 설을 기다릴 때도 그랬고, 봄 소풍 날짜가 정해지면 손가락을 꼽던 날이 여러날이 그랬다. 닷새에 한번씩 서는 시장에서 돌아올 엄마를 기다릴 때도 산모퉁이를 바라보며 그랬고, 동네에서 어깨에 메는 책가방과 검정운동화를 제일먼저 읍내에서 사다주신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시길 기다릴 때도 그랬다.

어린시절의 기다림은 크지도 않고 순박했으며 희망만 있었다. 그러나 서서히 세월에 덮개가 쌓이면서 기다림에 설렘과 희망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의 고통을 알게 되고 희망찬 기대보다 불안과 초조, 절망이라는 단어가 더 크게 자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기다림을 달관하여 감사로 선택한 사람들에게는 걱정과 불평대신에 그 뒤에 숨어있는 ‘변장된 축복’을 미리 보는 눈이 생긴다. 과정이나 결과에 예속되지 않고 최선을 다 한 뒤, 기다림 속에 성장을 꿈꾸며 감사하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다.

기다림을 나 자신 중심의 이기적인 생각으로 집착할 경우 뜻대로 안되면 불평이 된다. 그러나 기다림을 타자 중심의 이타적인 생각으로 하면 이해와 감사가 싹 튼다.

자기가 원하는 시간을 고집하는 사람에게는 기다림이 고통이 될지 모르지만, 이웃과 함꼐 시간을 나누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기다림이 기대가 된다.

기다림 가운데 감사를 하느냐 아니면 불평을 하느냐의 선택에 따라 우리의 인생은 성숙해 질수도, 뒷걸음질 쳐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다림을 가슴 설레는 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감사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 모두 기다림을 즐기며 기다림 뒤에 다가올 성숙한 미래를 꿈꾸어보자.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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