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글을 쓰면서……….

<김명열칼럼> 글을 쓰면서……….

신문사에 보낼 칼럼 원고문을 쓰다가 고개가 아프고 눈이 쥐가 나는 것처럼 힘이 없으며 가물가물해지고 침침해서 밖으로 나왔다. 초록의 대지는 펄펄 끓는 태양열에 주눅이 들은 듯 스치듯 지나가는 바람결에 잎사귀를 힘없이 흔들며 이내 축 아래로 처진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일 년 중 태양이 가장 지구의 한가운데 떠서 7월의 한 여름을 대변하듯 그 어느 때보다도 뜨거워 보이지만, 어째선지 힘이 없어 보이는 태양이 그림자에 잠겨 어두워진 능선으로 서서히 떨어져가고, 하늘색은 왜 하늘색이라 부르는지 자연스런 가르침을 주던 하늘은 공연의 끝에 막이 내리듯 핑크빛과 보라 빛으로 물감을 칠해놓고 있다. 하지만 만약 이 하늘이 공안감 없이 색으로만 도배된 여백뿐이었다면 분명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도 심심했을 것이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인 조물주께서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새털구름이 마치 솜을 찢어 올린듯 머리위에 퍼져있었고, 섬세한 구름의 가장자리는 강렬한 주황빛을 한껏 머금었다가 연한 선홍빛으로 은은하게 뱉어냈다. 자연이 만들어낸 경이로운 풍경에 형용할 수 없는 감탄사가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에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감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적지 않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여 음악을 듣거나 여행을 떠나며 마음에 와 닿는 글을 읽고 문학 속에 빠지기도 하는 등의 자신만의 원하는 감정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사람들은 심혈을 기울여 시간과 정력을 다 소모하며 애를 써서 써 올린 글(산문 및 에세이등)에 눈길과 마음을 주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매일을 반복하는 숨가쁜 삶을 살며, 무의식중에 자신에게 주어지는 감성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발견하기 힘들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덧 사람들에게 일상의 감성은 그저 주어져 보이기 때문에 보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었고, 실제로 사람들이 보고 느끼는 것은 그들의 기대에 적당히 맞춰지게 된 것이다. 어느 작가의 말로는 글에서 얻게 되는 감동과 감성은 그 대상이 마음을 울리며 들어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내가 마음을 열어야 비로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대상인 독자가 마음을 열도록 글을 쓰는 것은 나이들은 처녀가 시집을 가는 것만큼이나 어렵기도 하다. 매일 매일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명상을 하고 글을 쓰며, 한가지 마음속깊이 느끼는 감정이 있다면 내가 써 올리는 글 모두가 모든 사람들에게 일상에서 느껴왔던 수많은 감동의 순간들을 잊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촉촉한 문체와 사례들로 닫혀있던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되돌려주는 글이 되었으면 좋겠다. 또한 바쁘고 힘들은 생활 속에 감성결핍으로 메마른 가슴을 따듯하고 편안하게 만들어주며 적셔주고 싶다. 그리고 일상이 힘들고 지칠 때, 재미없고 심심하다고 느껴질 때 읽혀지는 위로와 용기를 선물해주는 좋은 글로 존립하고 싶다.
온통 화나는 일들로 넘치는 세상이지만 화가 나도 화를 낼지 말지를 선택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화를 내기보다는 나 자신과 세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글을 읽는 실천을 선택하는 것도 감동적인 인생을 만들어 가는데 좋지 않겠는가. 감동적인 인생과 감성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꼭 나의 글을 읽으시길 권해드린다. 나의글 속에는 우리들 인생 삶의 희노애락이 있고 교양이 있으며 노래도 있고 회한도 섞여있으며 인생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철학과 지혜도 있다.
책을 읽는다던가 작가가 써놓은 산문집이나 시와 기타 문학적인 소설을 읽는다는 것……….즉 이러한 것들을 읽는 것을 독서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이러한 독서를 하는 것을 어떠한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들이 어릴 때 학교에서 책을 읽고 독서를 한다는 것은 의무적인 교육방식에 의해 주입식으로 배우고 읽혀지는 습관화된 독서방식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도 그리고 어른들 전부가 다 틈만 나면 책을 읽어라 공부를 해라 독서를 해라 이렇게들 말하는데 그때는 아직 자아가 완성되지 않은 미숙단계의 어린시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최근 독일 베르린에 계신 어느 주부(전직은 고등학교 수학선생님 이라고 하심)님께서 나에게 보내온 이메일 내용의 사연을 읽어보면, 독서를 하고 책을 읽는 것이 얼마나 좋은 건지 최근에서야 알았다고 했다.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의무적인 독서와 연구를 위해서였는데, 자기만의 오롯한 시간을 갖다보니 독서를 한다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고 독서예찬을 늘어놓았다. ‘진작에 이런걸 알았다면 나의 인생은 얼마나 달라져있을까?’라는 회한적인 말도 곁들였다. 그래서 신문에 써 올려진 나의 글을 인터넷을 통하여 빠짐없이 읽으며 마음과 가슴속을 풍요롭게 살찌우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신문에 게재된 나의 글을 읽고 또 다른 책들을 읽으면서 교육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 교육이라는 것은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머리와 가슴속에 뭔가를 알려주는 거라 생각한다고 했다. 이러한 글을 통하여 하나의 인격체가 배우고자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도와주고 길을 알려주며 읽는 사람 스스로 삶의 지표와 정도(正道)를 찾아가는 수행자 된 겸허한 마음을 갖추도록 무장을 하는데 의의가 있다고 했다.
전문성이 실린 책을 읽거나 문학서적을 읽고 신문이나 월간지에 실린 칼럼 및 산문이나 에세이, 또는 시와 소설을 읽다보면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들여다볼 수 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 환경의 지배와 생활의 제약 때문에 한사람이 절대로 많은 것을 해낼 수가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책이나 신문에 게재되는 산문이나 칼럼 집에는 한사람이 평생을 살아오며 느끼고 체험하고 공감했던 삶의 알갱이들이 다분히 녹아져 스며들어있다. 그래서 글을 읽으면 그 사람 인생 전체를 들여다볼 수 있고 거기에서 보이지 않게 대화를 나누고 감동과 감성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물은 100도에서 끓기 시작하지만 겨우 1도가 모자라는 99도에서는 끓지를 않는다. 요컨대 우리들의 삶도 마찬가지다. 조금만 더 노력을 했더라면 이룰 수 있었는데 98도, 99도에서 더 이상은 무리라고 포기해버린 일들이 우리들의 지난 일상에서 얼마나 많았었던가. 한통의 손 편지, 한권의 성경책, 빵 한조각, 1달러짜리 지폐 한장, 신문에 게재된 칼럼 한구절 등등, 어찌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것들이 보이지 않게 일궈낸 큰 성과를 되새겨보며 가슴 한 켠이 따듯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삭막하고 단조로운 생활에 지쳤다면 내가 매주 10여년 넘게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 써 올리는 글들을 통하여 작은 것의 소중함을 깨닫고 삶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느껴보는 계기로 삼아보는 것도 좋을듯하다. <칼럼리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080/2017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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