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칼럼> 명화속에 흐르는 복음 5

<목회자칼럼> 명화속에 흐르는 복음 5

“참된 위로와 승리자 예수”

누군가 힘들고 아픈 일을 당하면 우리는 쉽게 힘내라고 말합니다. 힘낼 힘이 없어 아픈 사람에게 힘을 내라 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힘내라 말하기는 쉬울지 모르나 그렇게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때 누군가 함께 해준다면 힘이 됩니다. 차갑게 식은 물에 더운물이 들어오면 데워지듯 지금 내 삶의 자리로 누군가 찾아와 잠시라도 나와 눈 마주치며 내 이야기를 귀 기울여 줄 때 큰 힘이 됩니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힘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위로합니다.

그런가 하면 상처 난 마음이 아픈 마음을 위로합니다. 과부 마음은 홀아비가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이 서로의 아픔을 가슴으로 알고 위로할 수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으로 자녀를 잃은 부모의 마음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희생자 부모들이 위로했다는 기사를 봅니다. 어떠한 말과 위로도 공허한 울림처럼 들렸을 그분들입니다. 미끄러지듯 빗겨나갔을 수많은 위로의 말들이 있었겠지만 비슷한 아픔에 상처 났던 가슴에서 나온 진심 어린 위로의 말은 그렇게 상처 입은 자들의 마음 깊이 다가왔습니다.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힘내소. 쓰러지지 마시오.”

아파본 사람이 아픈 사람 마음을 압니다. 배고파 본 사람이 배고픈 사람의 비참함을 알고 버림받아 본 사람이 버림받은 사람의 아픔을 압니다. 이걸 보고 ‘동병상련(同病相憐)’ 같은 병을 가진 사람끼리 서로 가엽게 여깁니다. 영어로 ‘Compassion’도 동병상련의 맥락과 같습니다. ‘Com(함께)’과 ‘Passion’(고통과 아픔) 입니다. Compassion을 가진 연민의 마음 긍휼의 마음은 고통과 아픔을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상처 입은 한 사람의 마음이 상처로 아파하는 타인의 가슴을 이해하고 위로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마귀의 시험을 받았습니다. 40일 광야의 굶주림을 겪으신 후 떡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성전에서 뛰어내려 자신을 증명하고픈 유혹을 받으셨으며 세상의 부귀영화 권세에 대한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우리 삶이 가지는 무게와 아픔을 예수님이 친히 아신다는 근거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매일매일 순간순간 당하는 죄의 유혹이 얼마나 거부하기 어렵고 달콤한지 예수님이 친히 아신다는 근거입니다. 예수님이 몸소 겪어보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의 아픔을 안다. 힘내라!” 예수님은 내게 이런 말 할 자격이 있습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가정이 완벽하다면 굳이 가정의 달을 지킬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가정이라도 거기에도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부부라 한들 서로의 마음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이게 당연합니다. 정상입니다. 아무리 내가 난 자식이라고 내 마음을 모르고 아무리 나를 낳은 부모도 내 마음을 다 알 수 없습니다. 내가 네가 아니고 네가 내가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어차피 남인데 그만큼 알아주는 것도 대단한 겁니다. 우리 인간의 한계입니다. 오직 예수님이 당신 마음을 완전히 아십니다. 꿰뚫어 보십니다. 힘들어 미칠 것 같고 죽을 것 같은 그 마음을 아십니다. 그분이 친히 경험해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있으므로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브리서 4:15)

1308년 두초라는 화가가 그린 ‘산 위에서 시험받는 그리스도’라는 작품을 봅시다. 광야의 세 가지 시험 중에 마지막 시험을 모티브로 그렸습니다. 이 그림을 보시면 커다란 두 인물 ‘예수와 마귀’ 가 중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여기에 비하면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상징하는 건물들은 매우 작습니다. 장난감 같아 보이기까지 합니다. 마귀가 금방이라도 발로 밟으면 부서져 버릴 듯합니다. 마귀가 얼마든지 이리저리 장난하며 휘젓고 다닐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걸 다 줄 수 있다고 거짓말을 태연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이 정도로 강력합니다.

시선을 돌려 예수님에게 향해봅시다. 예수님의 위치가 마귀보다 한단계 높은 곳에 계십니다. 제아무리 마귀가 세상을 다 가진 듯 까불어대나 예수님 손바닥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라는 창세기 말씀처럼 예수님이 발로 차버릴 수 있습니다. 마귀와 예수님이 서 있는 곳이 서로 다른 진영을 대표합니다. 사단은 황토색 산을 밟고 있습니다. 세상의 진영을 대표합니다. 예수님이 밟고 있는 곳은 하얀 반석의 산입니다.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 하신 말씀처럼 예수님의 교회를 대표합니다. 곧 2천 년 역사 가운데 존재한 교회. 오늘 여러분과 제가 속한 교회입니다.

예수께서 이처럼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자신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바로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계속해서 유혹받아 수없이 넘어지고 실패합니다. 마귀와 싸워 이길 때보다 질 때가 훨씬 더 많은 우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와 늘 함께하시며 위로하십니다. 일으키십니다. 예수께서 마귀를 이기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시 일어날 용기를 얻습니다. 사람들이 내 맘을 몰라준다고 실망할 것이 없습니다. 모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마음을 구석구석 다 아십니다. 예수님의 피 뭍은 손이 당신의 상처난 마음을 만지십니다. 고치십니다.

오늘을 힘겹게 살아가는 여러분들에게 힘내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힘은 반짝하다 금세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당신의 삶에 모시면 새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마음에 새 희망의 빛이 비출 것입니다. 보이지 않던 문제에 새 길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을 위하여 친히 시험받고 승리하신 예수님이 오늘 당신의 삶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위로합니다. 상처난 가슴이 상처난 가슴을 압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만이 당신의 삶에 치유를 주십니다. 예수님이 시험받고 이기신 이유와 목적입니다.

김호진목사(올랜도 연합감리교회 담임> 1071/2017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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