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 칼럼> 자식들에게 짐이 되는 부모님.

<김명열 칼럼> 자식들에게 짐이 되는 부모님.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인생사를 볼 것 같으면, 자식으로 태어나 부모가 되어 다시 자식을 낳고, 그러고는 낳은 자식들을 위해 평생을 온몸을 다 바쳐 희생하고 헌신하며 자식들의 양육을 위해 갖은 고생과 힘든 일들을 감내하며 한평생을 살다가 세상을 떠나가는 것이 우리네의 평범한 삶이고 인생이다. 자식이나 부모는 인간의 삶에서 대부분이 거치게 되는 사회적 지위나 부귀와 명예, 성공여부는 부모자식간의 천륜적인 혈연관계에 입각해서는 그렇게 대수로운 일은 아닌 듯싶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이 하 수상하니 그런 지위나 부, 명예, 성공이나 실패에 좌지우지되는 일이 예사롭지 않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얼마 전 한국 본국지의 일간지 신문에 실린 사회면의 기사를 보니, 어느 가난하게 살던 노부부가 자식들에게 짐이 되고 부담을 주기 싫다면서‘먼저 간다’라는 짤막한 유서 한마디를 남기고 스스로 노부부는 목숨을 끊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그 노부부는 십여년전에 평생 고생하며 아끼고 절약하며 모은 전 재산을 자식들에게 골고루 물려주었다. 많은 재산을 물려주는 내막의 그들 부부생각에는 이렇게 자식들에게 재산을 넘겨주었으니 나중에 노후에는 당연히 자식들이 자신들을 부양하고 도와줄 것으로 기대하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은 100%로 완전히 빗나갔다. 십여년이 지난 후에 보니, 이젠 자기들도 늙어서 일을 할수도 없고 운신하기도 불편한데 자식들은 코빼기 하나 보이지도 않고 찾아오지도 않았다. 아들 둘에 딸 하나인데, 모두가 결혼하고 잘 살고 있는데도 서로가 미루며 부모를 돌보지 않았다. 자식들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으나 번번이 거절을 당하고 심지어는 며느리에게 문전박대를 당하는 수모도 겪었다. 결국은 두부부 자신이 생활고로 허덕이다가 최후로 결심한 것은‘차라리, 치사스럽게 구걸 말고 깨끗이 죽자. 자식들에게 더 이상 부담을 주지 말고 짐도 되지 말자’였다.

이와 같은 경우로 자식에게 모든 재산을 다 물려주고 헌신해온 어버이들이 졸지에 자식들로부터 버림을 받는 경우가 종종 뉴스에 등장한다. 그러다보니 어느 경우에는 이제 부모는 자식들에게 부양비를 받기위해 법에 호소해야하는 시대가되었다. 이러한 세태를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참으로 착잡하기만 하다. 어느 노인대학에 나온 노인들의 대화내용의 일부다. “자식들에게 죄다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정말로 바보짓이야”, “그럼 그 후에 물려받을게 부양밖에 없는 부모란 애물단지밖에 더 되겠어?”, “결국에 가서는 애 새끼들 기르느라고 죽을 고생을 한 부모는 헛물만 켜는 거지 뭐”. 한편으로 젊어서는 죽어라 일만하며 간신히 아이들을 길렀지만 노후대책을 전혀 갖지 못해 자식들의 부양에 기대어 살아야하는 부모들은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이들은 결국 자식들에게 자신들이 짐이 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부모들의 과거는 자녀들의 현재를 있게 만든 근원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식을 길러낸 자신들의 헌신을 자녀들에 대한 권리로, 자녀에게 부양을 요구할 수 있는 자격으로 이해하는 게 마땅하다. 그러나 부양을 요구하는 것도 당당해야 한다고 믿는 것은 자식들에게 경제적인 뒷받침의 혜택을 제공한 부모라야 그러한 권리의 당위성을 주장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한국의 속담에“내리 사랑은 있어도 치(위로)사랑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부모, 자식간의 사랑의 성격을 진솔하게 지적한 표현의 진실이다. 내리 사랑은 의무가 아니지만 치 사랑은 흔히들 의무로 이해된다. 그것은 치 사랑이 본능의문제가 아니라 이성의 문제라는 뜻이다. 서글프지만 이 의무의 이행 여부가 효와 불효를 판가름하게 해주는게 현실이다. 반대로 예의 속담은 내리 사랑이 본능의 영역에 있다는 사실을 환기하면서 그 맹목성을 확인해준다. 자식의 부모 봉양에는 이유가 따른다. 부모이고 길러준 은혜에 대한 보상적인 갚음 이라는 이성적 이유 말고 거기 본능은 필수가 아니다. 그러나 부모의 자식사랑에는 이유가 없다. 이 눈먼 사랑은 그러나, 얼마 후 일정한 시간과 세월이 흐른 뒤 자식이 부모가 되면서 다시 내리 사랑의 형태로 재현된다. 동시에 치 사랑의 부재는 현실적으로 그의 아픔이고 현실이 된다. 어찌 보면 부모 자시간의 사랑이란 참으로 공평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엇갈린 지위나 엇갈린 상황의 반복이 우리네 인간들의 삶인 것이다.

앞서에서 말한 것처럼 뉴스에 오른 이야기가 보편적인 상황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걸 특수한 사례 일뿐이라고 덮어둘 이야기도 아니다. 동의하든 동의를 하지 않든 간에 그것은 가족과 부모 부양에 대한 현 이시대의 변화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부모의 부양의무를 간단히 소홀히 여겨버리는 자식과 그 자식에게 부담이 될까봐, 또한 억울한 배신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양 극단이 공존하고 있는 상황이 바로 오늘날 우리 한국인들의 사회현실이다. 각종 언론매체들이 이를 앞 다투어 보도하고 개탄하며 가족윤리의 재정립과 파탄난 도덕의 재무장을 강조하고 있지만, 별로 거기에 상응한 마땅한 해법은 없어 보인다. 자식의 부모부양 거부든,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는 부모의 극단적 선택이든 간에 그 원인은 가난이고 경제적인 문제이다.

일방적으로 자녀를 위해 희생하고, 아무 마련도 없이 노년을 맞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다. 이로 인해 어느 경우를 보면 해마다 가족과 절연(絶緣)된 채 홀로 세상을 떠나는 고독사(孤獨死)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이들은 가족들이 있는 사람도 많이있는데, 그들과 헤어져 연락을 끊고 아예 그들에게 손을 벌이지 않고 짐이 될까봐 스스로 절연한 채 외롭게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고 하니 너무나 가슴이 아픈 이야기다.

뉴스나 다큐를 통해서 보게 되는 힘겹고 초라한 노후를 보내는 이들, 더불어 자식이 여럿 있으나 연락을 끊은 지 오래되었고, 자식들도 살기 어렵고, 또한 알고 보면 자식은 잘사는데 부모가 연락을 해도 부모를 돌보지 않는다는 분노가 솟아나는 이야기들…………저는 안 늙나? 어떻게 키우고 어떻게 배웠으면 저렇게 제부모 놔두고 뻔뻔스럽게 살고 있지? 정말 나쁜 인간이다. 남한테도 저 정도면 베풀고 살텐데……….하지만 이러한 상황의 내면에는 자식은 자식들 나름대로 그만한 이유와 사정이 있는 자식들도 있으리란 생각도 든다.

부모가 자식으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면 자식들 사이에도 누가 부모를 어떻게 모시느냐 는 갈등의 씨를 남겨주는 꼴이 되고 만다. 부모에게는 열 자식도 짐이 아니지만, 자식들에게는 한 부모도 짐이 된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한다. 부모의 노후를 자식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옛날의 가족개념이나 효도사상이 지금의 현실이 아님을 이시대의 노인들은 알아야한다. 그러나 개중에 보면 많은 노인들은 노후를 스스로 해결할 시간들을 잃어버렸다. 급변하는 사회와 이에 따르는 가치관의 변화가 전통적 가족제도의 붕괴를 가져왔고, 이시대의 노인들은 준비 없이 가족 밖으로 밀려났다. 지금의노인은 그 가족만의 힘으로 부양하기엔 역부족이며, 부모나 자식도 원치 않는 현실이 되었다.

효도는 이제 변화하는 시대를 따르지 못하는 낡은 전통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효도를 받던 부모에게도, 효도를 하던 자식에게도, 이러한 현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세상이 되었다.

<myongyul@gmail.com> 1067/0419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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