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칼럼> 명화속에 흐르는 복음2

<목회자칼럼> 명화속에 흐르는 복음2

김호진목사 (올랜도 연합감리교회 담임)

명화속에 흐르는 복음2

‘티치아노와 렘브란트’

성경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이유는 볼 때마다 새롭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희생에 관한 이야기는 수없이 보았고 설교해 봤습니다. 그런데 매번 다릅니다. 특별히 결혼하기 전에 볼 때하고 결혼 후 내 자식이 생기고 난 후에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총각일 때는 아브라함이 가진 아버지의 마음을 읽지 못했습니다. 내 자식이 없으니 하나님께 자식을 번제로 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일지 상상의 차원이었습니다. 근데 내 아들이 생기고 아버지가되니 아버지로서의 아브라함을 알 것 같습니다. 내가 죽으면 죽었지 자식을 죽여서 드린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습니다.

미술가들이 성경을 그리는 것에도 관점과 해석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삭의 희생과 관련하여 많은 작품이 있지만, 대표적으로 두 가지 작품을 봐도 그 차이가 극명합니다. 티치아노의 ‘이삭의 희생’과 렘브란트의 ‘이삭의 희생’입니다.

15세기와 16세기 베네치아 미술의 선두주자였던 티치아노는 인간 내면의 심성을 그린 화가입니다. 그가 그린 ‘이삭의 희생’을 보면 우선 그림의 구도가 대각선의 긴장적 구도입니다. 배경의 하늘은 폭풍 전야를 방불하는 급박함과 불안함에 사로잡혀있습니다. 화폭의 대각선으로 오른쪽 아래 아브라함의 왼손에 이삭이 힘없이 붙잡혀있습니다. 반면 거대한 아브라함은 칼을 들어 내려치려는 결연함으로 서 있습니다. 이 순간 천사가 황급히 하늘에서 떨어지듯 내려와 아브라함의 칼등을 붙잡습니다. 그런데 그림의 오른쪽 이삭 밑에 숫양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이삭을 대신할 제물을 준비해놓으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 한 폭의 그림 안에 기독교의 복음이 다 들어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둘째로 이삭을 통하여 예표 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순종과 희생의 십자가입니다. 셋째로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곧 믿음과 은혜에 의한 기독교 복음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첫번째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브라함을 세우셨습니다는 것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허점과 실수가 잦았던 사람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는 하지만 그 이름에 걸맞지 않은 흑역사들이 많습니다. 일반 위인전 같으면 슬쩍 빼거나 미화했을 듯 하지만 성경은 민망하리만치 사실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기는 했으나 인간인지라 확증을 계속 바랐습니다. 아내를 두 번이나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부전자전이라 아들 이삭도 배워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자기 여종 하갈을 취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다시 확인해주실 때 엎드려 웃었습니다. 옆에서 몰래 엿들은 아내 사라도 웃었습니다. 부전자전에 이은 부창부수 그 남편에 그 아내입니다.

멀리서 보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멋있고 큰 나무 같습니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아브라함이란 나무를 보면 무수히 많은 꺾어짐과 부러짐 휘어짐 여기저기 실수와 허점투성이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으로 끝까지 이끄시고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부러진 곳을 고치셔서 새로운 가지를 내시고, 휘어진 것에서 새로운 방향을 내셨고, 벌래 먹고 구멍 난 곳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막으사 새롭게 이끌어 가셨습니다. 그 결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있는 것입니다. 실수를 묘수로 바꾸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은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목숨보다 더 소중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하나님은 주실 땐 언제고 이제 와서 그걸 다시 바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참 얄밉습니다. 원망스럽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밤새 잠 못 이뤘을 것입니다. 눈물로 밤을 지새웠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하나님이 일러주신 곳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자기 목숨보다 소중한 아들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냥 연기한 게 아닙니다. 진정 소중한 것을 원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돌려드렸습니다. 그때 비로소 아브라함은 100세에 낳은 아들을 믿음의 아들로 다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을 진정으로 소유하는 길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중요할수록 안전한 곳에 맡겨야 잃어버리지 않지요. 하나님만큼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그분께 맡겨드리면 안전합니다. 그래야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정말로 얻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뭡니까? 내려놓아야 얻습니다. 섬김을 받으려면 오히려 섬겨야 합니다. 살고자 하면 죽어야 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을 십자가에 내려놓을 때 진정 얻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여기서 렘브란트의 그림을 봅시다. 처음에 본 티치아노의 그림에선 아브라함이 중심인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이 돋보였습니다. 그러나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중심은 이삭입니다. 빛의 화가라는 이름에 걸맞게 렘브란트는 화폭 중앙에 위치한 이삭에게 빛의 중심을 꽂아놓습니다. 전체적인 그림에 명암의 대비가 주는 긴장과 빛의 흐름이 가지는 주제의 선명함이 있습니다.

이 그림을 보면 이삭이 어린 꼬마가 아닙니다. 건장한 청년입니다. 반면 아브라함은늙은할아버지입니다.그렇다면밧줄로자신을묶으려할때이삭이“아버지 왜 이러세요? 치매 걸리셨어요?” 하면서 충분히 밀쳐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청년 이삭이 순순히 묶였습니다. 순순히 장작 위에 누었어요. 자기가 제물인 걸 알면서 순순히 아버지의 뜻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바로 렘브란트가 주목하는 부분이 이것입니다. 곧 아브라함 중심에서 이삭의 순종으로 중심주제가 전환됩니다. 그에게 모든 빛을 쏟아부으면서 말입니다.

이삭의 순종에서 누가 연상됩니까?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아버지! 할 수만 있으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그리스도! 그 결과 ‘누구든지 저를 믿기만 하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다 준비하신 여호와 이레의 역사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에도 여호와 이레의 역사가 일어나길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복음을 전심으로 믿으십시오. 그분께 인생에 정말로 중요한 것을 내려놓읍시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은 이미 모든 걸 준비하셨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담대히 그분께 나아가고 순종할 때 여호와 이레의 축복이 당신의 것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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