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동칼럼> “타향은 싫어 고향이 좋아”

<김원동칼럼> “타향은 싫어 고향이 좋아”

어느 가수가 부른 대중가요의 한 구절이다.
이것을 오늘의 칼럼 제목으로 붙인 대는 이유가 있다.
고향땅에서 붙잡힌 카다피를 보면서다 후세인도 붙잡힌 곳이 고향땅이고 보면…..
지난 주말 점심을 하자는 친구가 있어 함께 자리했다.
화두는 온통 카다피의 죽음과 고향에 대한 이야기였으며 다음차례는 김정일이 아니겠느냐면서 한참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자기도 죽을 바에야 고향땅에 묻혔으면 원 없겠건만 그놈의 통일은 와 이래도 늦느냐며 진한 함경도 사투리로 짜증을 부린다.
열네살 때 동생들과 놀다가 우연찮게 남하하는 피난민 대열에 끼여 떠밀려 내려온 그는 반세기가 넘도록 두고 온 고향과 부모형제들의 모습을 잊지 못해 숱하게 많은 밤을 벼갯 잎을 적셨다는 소위 말하는 “1.4후퇴 실향민”이다.
우리는 가끔 노래방도 함께 간다.
노래실력이야 음치 수준이지만 애창곡에 취해 흐느적 거리다 보면 그 날은 짱이다.
그는 일편단심 “꿈에 본 내 고향”이며 나는 “고향 역” 못 말리는 십팔번 곡으로써 대표적인 애창곡이다.
“코스모스 피어나는 정든 고향 역”으로 시작되는 1절만 해도 그럭저럭 맨 정신에 부르나 “흰머리 날리면서 달려오는 어머님”으로 이어지는 2절의 한 부문에서는 콧등이 시큰해 오면서 나는 뭔가 비워있는 어느 한 곳의 허전함을 느낀다.
그 때는 마이크를 놓고 “참 소주”를 원 샷하고 캬! 하는 소리가 나오면 늘 비워있는 그 자리, 고향이 아니고는 채워지지 못할 가슴속 내 고향 땅 한구석의 얼은 가슴속을 물바다로 흥건히 녹여준다.
그래서 마음이 허전할 때면 고향이 있는 이웃 노래방으로 실향민 친구와 함께 간다. 그리고 음치끼리 남이야 뭐래던 “나는 가수다”처럼 뜨거운 열기를 토해낸다.

그런가하면 동향으로써 나와 동년배인 어느 은퇴교수도 적잖은 책자를 펴내면서도 읽어보면 한결같이 고향을 무대로 한, 못 말리는 고향 예찬론자다.
고향 안동을 주제로 다루는 글인데도 즐겨 읽는다.
더러는 어쩌다 가족동반해서 한 끼 때울 때도 고향얘기가 단골메뉴다.
동석하는 또 다른 동향 어르신인 은퇴하신 의학 박사님 또한 고향예찬론자로서 지지 않고 대화 속으로 파고 들어온다.
그래서 그 두 분과 만나고 나면 한 열흘 밥 안 먹어도 부자 같은 느낌이라고 가끔 뻥을 까기도 한다.
아무리 진수성찬 먹어도 타향은 늘 허전하다.
거기에는 미처 채우지 못한 아쉬움과 담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다.
그러나 고향은 채워주고 담아주는 어머니 품속 같은 곳이다.
세상의 온갖 부귀 다 누려봤지만 빈곳을 채워 주는 고향만한 그 넉넉한 그릇은 없었을 테다.
그래서 악명 높은 카다피나 사담 후세인도 뭔가를 세상에서 못 채운 것들에 대한 허전함을 채워보기 위해 그 길이 어쩌면 마지막 길인 줄 알면서도 고향을 마지막 피신처로 택했을 것이다.
시신이 푸줏간에서 전시용으로 진열되어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마지막 목숨이 붙어 있었을 때 고향은 나를 살려주겠지 하는 그들 나름의 고향 생각이 있었기에 두 사람은 모두 고향땅을 택했지 싶다.
해서일까 “타향은 싫어 고향이 좋아”라는 이상진의 노래가 엷은 늦가을 햇살사이에 얹혀 창가로 스며드는 순간 두 사람의 희대의 독재자들의 마지막 운명과 고향을 함께 연결해 생각해보았다.
고향땅이 여기서 얼마나 될까 푸른 하늘 끝닿는 저기쯤 될 테지…. <805/1101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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