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동칼럼> 육두문자백화점, 익명성 악풀의 횡포

<김원동칼럼> 육두문자백화점, 익명성 악풀의 횡포

익명성에도 아름다운 측면과 부끄럽기 그지없는 다른 두가지의 측면이 공존하고 있다. 물론 차원이 다른 익명성의 호(好)불호(不好)다.
가령 적잖은 성금을 내면서 실명을 밝히지 않는 예쁜 손의 익명의 기부자를 볼 때는 선행의 주인공이 과연 누구일까 하는 생각과 함께 관심이 실명기부자보다 더 증폭된다.
왼손이 한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서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그 얼굴 없는 선행의 주인공 말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특히 인터넷 강국으로 세계인의 주목과 찬사를 함께 받고 있는 한국사회라는 점과는 극히 상반되는 익명성을 무기로 하는 악성 댓글의 횡포 때문에 인터넷 강국의 위상에 못 미치는 심각한 후유증이 따르고 있다.
해외 한인동포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아름다운 익명성 성금기부자의 행위와는 달리 사회악의 범주에 속하는 또 하나의 다른 익명성 사례가 우리 주변을 휘졌고 있어 적잖게 당황하게 만들 때도 있다.
즉 익명성 횡포를 일삼는 악성 댓글을 두고 하는 말이다. 말이나 글에는 책임이 따르는 일이거늘 이건 완전 책임소재로부터는 무풍지대라는 데서 저지르고 마는 모자라는 사람들에게 마음껏 뛰놀고 보는 무분별한 분야로 자리 매김한 비극의 운동장이다. .
남의 글을 보고 나와는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고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의 그런 문화권에서 살다가 온 사람들이 아니기에 그럴 것이다 하고 악풀에 시달리면서도 이해도 해 보려했다.
필자의 글이 가끔 자신의 생각과 반한다는 사실 하나로 익명성을 무기 삼아 논리가 있을리 만무한 욕설과 비방으로 터무니없이 퍼붓는 묻지마 인신공격형 악성댓글에 시달려 본 적이 있는 그 문제에 관한 한 한사람의 피해자인 입장이다.
물론 지금과는 달리 악풀에 대한 면역성이 약한 시절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무시하고 지나가기에는 너무나 무겁게 짓눌려 힘든 순간을 겪기도 했다.
뉴스로써 또는 핫이슈로써 사회의 쟁점으로 부각되고 공론화 될 입장도 아닌 필자와 같은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야 당해봤자 대수롭잖은 일로 지나간다. 그러나 공인인 사회 명사나 연예인들의 경우는 다르다.
무책임하게 올리는 악성 댓글 몇 줄에 인기절정의 연예인을 죽음의 코너로 몰고 가기도 했고 장난삼아 띄운 댓글로 건전한 한 중소기업이 주식이 곤두박질치고 도산되면서 회사는 물론 성실하게 살아온 오너와 가정은 날벼락을 맞으며 길거리로 나섰다는 기사도 본적이 있다.
그러나 책임소재를 구명할 수 없는, 악성 댓글로 인해 입은 피해는 구제할 길도 없다. 익명성의 지탄받아야 할 악성 댓글의 폐해는 그렇다 하고 지나가기 보다는 댓글 본래의 의미로 환원하도록 하는 네티즌 모두의 노력이 절실하기도 하다.
실명을 거론하고는 쓸 수 없는 부득이한 사례도 있다. 그런가하면 눈칫밥에 도가 튼 귀머거리 벙어리 언론들을 대신해 언론이 못하는 비판과 감시기능을 대리하며 읽는 이에게 만족을 주는 사례도 있는가하면 댓글 공간 특유의 번득이는 지혜와 함께 건전한 대안도 제시하는 네티즌들도 있다.
그래서 댓글의 필요성은 백번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다. 단 댓글이라는 문화 공간의 본령을 지키며 공론(公論)의 장(場)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하며 지켜 나가면 된다.
오늘 아침 후배 한 사람이 어느 인터넷 토론방 창으로 들어가 보라고해서 열어보았다. 좁은 동포사회에서 벌어지는 익명성의 악풀은 엄청났다. 기가 막혔다. 완전 육두문자 백화점이다. 이래도 되는가싶어, 개선해 보자는 취지에서 띄우는 글이다. (kwd70@hotmail.com) <754/2010-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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