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다주 100인선 소개>
미국 이민 100주년을 기념해 플로리다코리아(전 한겨레저널)에서 발간한 “플로리다주 100인선”은 플로리다에 거주하는 동포들 중 지역 동포사회의 발전을 위해 수고하고 봉사한 분들을 찾아가 1대1 인터뷰해 발간한 가치 있는 책으로 개인은 물론 지역한인사회의 역사책이기도 하다.
하드커버로 출간된 “플로리다주 100인선”은 총 384쪽으로 당시 플로리다 주지사였던 Jeb Bush의 축하메시지와 이승봉 발행인의 ‘백인선을 내며’, 플로리다 주 소개, 지역 한인단체 소개, 또 플로리다 주에서 동포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탬파, 올랜도, 마이애미, 잭슨빌, 펜사콜라 지역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리고 탬파베이(28명), 마이애미(24명), 올랜도(22명), 펜사콜라(9명), 잭슨빌(7명)외 기타 소도시(10명) 등 총 100명을 인터뷰해 동포들의 생생한 음성을 담았다.
탬파베이지역 동포사회를 시작으로 100명의 지역사회 동포들을 소개한다.
————————————————————————————————————-
<탬파베이>
고준경(에디 고)

참전용사에 대한 지극한 애정
골프장 운영하며 극진한 예우
골프장 안에 대형 풀장과 콘도까지 있는 대규모 시설을 갖춘 성공한 기업인이자 한국전 참전용사를 위한 일에 발벗고 나서는 사람으로서 고준경 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6,25 전쟁 중 실종된 미군 잔해(殘骸)를 발견해 실종가족들에게 돌려주어 아직까지도 생사의 결과를 모르는 그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되고 싶은 것, 이 길을 계속 가고 싶습니다” 그의 첫 육성을 실감케 한 것도 그 날이다. 골프장 구내식당에서 인터뷰를 하던 고 씨는 양해를 구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는 어느 노인골퍼가 주문한 음식을 받으면서 내 놓는 돈을 한사코 되돌려준다. 어째서 돈을 받지 않느냐는 물음에 대한 그의 답변은 아주 명료했다. “한국전 참전용사입니다”
1955년 6월 12일. 그는 이날을 잊을 수 없다. 주한미군에 복무했던 세 명의 군인들이 귀국 후 뉴져지의 한 국회의원을 설득하여 그를 초청하게 되어 드디어 미국 행 비행기에 올랐던 날이다.
함흥 철수작전에서 패잔병이 된 두 명의 미군이 붙잡힐 것이 두려워 마을로 못 내려오고 산 중에서 굶고 있을 때 그들을 발견한 피난 중인 소년 고준경은 마을로 내려와 아무도 모르게 구걸한 밥을 그들에게 전해주어 생명을 연장시켜주기에 이른다. 그러나 몇 일 후 미군들의 자결한 모습을 보고 심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미군과의 첫 인연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났지만 그것에 얽힌 얘기가 번지면서 그는 다시 미국에서 자신의 인생 3분의 2 이상을 코리언 아메리칸으로 살아가게 된다.
많은 이들이 겪은 일이기도 하지만 그도 부모와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진 채 단독 월남한 사람 중의 하나다. 그렇게 피난대열에 섰던 소년 고준경은 운명의 아이러니랄까 다시 학도의용군에 들어가 조직의 일원이 되었으며 이어 미(美) 해병1사단소속 통역관이 되어 북진대열에 서기도 했다. 의용군으로서의 그의 역할은 예비역 대령이 쓴 다큐멘타리 “인천상륙작전 <영어명:INCHON>”이라는 책자에 소상히 나와있다며 자신의 사진이 있는 그 영문책자를 보여주기도 한다.
뉴저지에 도착한 그는 고등학교를 마친 후에 미군에 자진입대 하여 피나는 노력 끝에 캔터키의 육군훈련소를 1등으로 졸업하면서 자신이 원하던 대로 한국에 주둔한 미8군으로 배속되었다. 수사기관에 근무 중 군복무를 마치게 된 그는 귀국 후 뉴져지 대학에 입학한다. 그곳에서도 엔지니어링코스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그는 직장생활 도중 유색인종으로서의 출세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실감한 후 바로 자영사업가로 변신하여 62년 뉴욕의 브로드웨이에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사무실이 달린 EOGUDWJAC를 오픈하고 가발업으로 뛰어들었다. 때마침 늘어나는 가발의 폭발적인 수요의 급증으로 공급이 딸렸던 그는 그 때를 가리켜 “돈이 따라붙더라”고 했다. 그러나 가발업이 사양길로 접어들것이라는 예감이 서서히 현실로 와 닿자 그는 재빨리 사업을 청산하고 생활의 터전을 플로리다로 옮겼다. 그리고 91년에 지금의 골프장(Quail Hollow)을 인수, 탬파에서도 손가락에 꼽히는 고급골프장으로 확장수리 했다. 그렇게 열심히 하다 보니 자신은 아직까지 골프를 못치는 쪽이라며 멋쩍어 한다.
미국과의 인연이 그렇듯 한국전과의 깊은 인연은 지금도 시간만 나면 한국전에 참전한 용사들을 방문하는 것이 일과가 된 그에게 골프장 운영만큼이나 소중하다. 수도 없이 찾아다니며 근황을 확인하는 것 외에도 그는 일 년에 한 번씩은 연락이 닿는 한 많은 참전용사들과 혹은 그 유족들을 자신의 골프장으로 초청하여 하루는 그들을 위해 그린을 내놓는다.
인터뷰 중에도 그는 연신 자신의 사무실을 오가며 뭔가를 가져온다. 꽤 정밀하게 생긴 미군 작전용 지도를 펴놓고 이북의 어느 지점을 지적하며 이곳에 가면 분명 미군 잔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한다. 방문에 필요한 모든 준비는 되어있다고 말하는 그는 방북에 필요한 미국정부의 허가도 받아놓은 상태라고 했다.
그리고 2003년 3월 탬파 컨벤션홀에서 있었던 한국참전 50주년 기념식에 자신 스스로도 참전용사로서 훈장을 단 정복을 입고 나와서 참전기념 메달을 달아주는 이날 행사의 제반 절차와 필요한 것들을 세심히 챙겨 1,500여 참전용사 및 그 가족들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필자도 목격할 수 있었다.
두 아들을 훌륭히 키워낸 고준경 씨와 부인 조엔나(Joanna) 씨의 장남인 알벗(40세)은 현재 외과의사로 보스톤에 근무하고 있으며 차남인 해어리(35세)씨는 뉴저지에서 츄라이얼 변호사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
또 형제애도 많았던 그는 6.25 전쟁으로 인해 고아아닌 고아로 지낸 세월을 안타까워하며 제7안식일 재림교회에서 40년간 목회를 하다 정년퇴직한 형님인 고문경 씨와 지난 12년전부터 이웃에 함께 살며 우의를 나누고 있다.
오늘도 그는 경영하는 골프장에서 파워카트를 타고 골퍼들이 불편함은 없나 혹시 낯익은 참전용사가 필드에 나오지나 않았나 확인하기 위해 검붉게 탄 얼굴에 골프모자를 쓰고 운전석에 앉아 골프장 구석구석을 돌고있을 것이다.
한국전 참전용사를 위해 남은 여생을 바치겠다는 사람 고준경, 그는 서부플로리다 한인회 창립의 일등공신으로 큰 기둥 역할을 했으며, 초대회장이었던 고 이경일 여사와는 학도의용군으로 6.25 전쟁에 함께 참여했던 친구이다.
현재 안식일교회 교인으로 모태 신앙인인 그는 특히 일제시대 신사참배 거부로 구속되어 끝내 옥사(獄死)하고 만 외삼촌이자 순교자인 김예준 목사를 누구보다 존경한다며 외숙부가 처음 연행되어 간 종로경찰서가 비디오 화면에 자주 나온다 해서 연속극<야인시대>를 즐겨본다고 했다.
김 스프링스틴 Kim J. Springsteen

칠순을 앞두고도 펄펄 나는 여걸
정치-경제-교육 사통팔달의 견인차
서부플로리다의 마당발 혹은 팔방미녀로 통하는 현 탬파한인회 이사장 김 씨는 명함에 있는 자신의 좀 긴 이름을 그대로 책에 표기(表記)하길 원했다. 물론 남편이 미국인이기에 그렇다. 여고와 여대를 다니면서 그 꿈 많은 시절에 상상도 해보지 못 했던 긴 이름이다.
1961년 당시만 해도 미국유학의 길은 쉽지 않았다. 자신의 표현처럼 무척이나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에 덕성여대를 졸업함과 동시에 그녀는 도미유학의 강한 집념의 꿈을 기어이 이루어낸다. 그리고 그녀의 희망대로 Stepen F. Austin 주립대학에 입학하여 정말 눈코 뜰 사이 없이 공부에만 매달린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꿈꿔오던 영문학 석사학위(MA)를 받은 후 서둘러 귀국한다. 이어 대학교수로서 그것도 모교의 강단에 서는 화려한 변신 속에 나날이 즐겁고 보람으로 점철된 생활 한 가운데로 어느날 한 사람의 이성(異性)이 다가오는 것을 체감하게 된다. 바로 지금의 남편이다. 한국에 근무 중이던 미남형의 공군중위, 남편이 중령으로 예편한 후 지금은 행복한 부부로 탬파에서 인생의 황혼기를 맞아 서로가 아껴주고 사랑하기에 하루가 가는 줄 모르는 잉꼬부부로서 주변의 부러움을 모으고 있다.
주류사회와 동포사회를 위해 플로리다 땅을 누비고 있는 그녀에게 착실한 외조를 하는 사람, 그 남편은 부인이 있는 곳에는 항상 미소를 지으며 곁에 서 있기에 더욱 그녀에게 힘이 된다.
아무도 그녀를 칠순이 두 해 남은 할머니로 볼 사람은 없다. 검정 투피스정장에 가벼운 색깔이 들어있는 썬그라스를 쓰고 나타난 그녀를 첫 대면했을 때도 필자의 눈에는 50대 중반의 여류 사회활동가쯤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1935년 7월 20일 생으로 부친 김홍근 씨와 어머니 이엄이 씨 사이의 7남매 중 다섯째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미국유학과 석사학위, 그리고 모교교수를 지내던 중 결혼으로 이어지는 숨가쁜 세월을 살아 온 그녀가 워싱턴 펜타곤(미 국방부) 근무를 끝으로 남편과 함께 플로리다에 정착한 것은 1979년으로 거의 4반세기에 이른다. 정착과 동시에 2세들을 위한 모국어교육의 소중함과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은 그녀는 플로리다 최초의 한글학교를 세워 이듬해인 1980년에 창설 개교했으며 교장에 취임 후 2년이 지나 어느 정도 기반이 잡혀가던 무렵 다음사람에게 자리를 넘긴다. 그의 능력은 이미 이때부터 인정되기 시작했으며 이어 한인상공인협회 회장도 2년을 역임한다. 또 전국적인 규모의 미주한인상공인협회의 감사를 지내면서 서울에 본부를 둔 세계한인상공인들의 결집체인 본부협회의 이사로 피택 되기도 했다. 모국의 헌법기관인 평화통일자문위원회의 위원을 3기에 걸쳐 위임을 받을 정도로 모국정부측의 신임도 두터운 여걸(女傑)이다. 그녀의 활동반경은 한인사회 뿐이 아니다. 26년 역사의 플로리다아시안연맹의 초대회장에 이어 몇 차례 회장직을 연임했으며 현재도 사무국장으로 실질적 업무를 총괄하며 활약하고 있다. 뿐인가. 한국-플로리다경제인협의회의 회장직도 96년부터 3년간을 연속으로 맡으면서 매년 한국과 미국으로 교체하며 주최하는 시스템을 만들었고 이제는 플로리다뿐 아니라 미주 동남부지역 7개 주가 참여하고 있어 그 규모나 활동 면에서도 괄목할만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 2000년에는 플로리다와 경기도를 잇는 자매결연도 체결,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교류가 활발하다고 전하는 그녀는 또한 탬파지역에 한국문화회관을 설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추진위원장을 맡았다.
국제적인 자선기구인 United Way에서도 현지의 이사직을 수행하다가 지금은 고문직을 맡고 있으며, 플로리다 최고의 학문의 상아탑인 플로리다 주립대학의 International Center에서 고문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정말일까 싶을 정도의 굵직한 활동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소수민족들의 단체로써 정치적 파워를 과시하는 미주아시안공화당연맹위원회 플로리다주 위원장이 바로 그녀다.
가족으로는 서른 일곱 살의 장남 요셉이 국제변호사로 미네소타주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차남 John 또한 텍사스의 휴스턴에 있는 극동에너지주식회사에 부사장으로 있다.
그러나 눈코 뜰 새 없이 뛰는 그녀도 주일성수는 불문율이다. 남편과 함께 미국인감리교회에 나가 이렇게 기도하는 신앙 깊은 기독인이다. 주여, 저로 하여금 남의 위에 있게 마시옵고 남을 섬기는 자리에 있게 하소서. 나의 섬김으로 섬김 받은 그들이 또 다른 남을 섬길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진실로 바라거니와 늘 주님 닮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허락 하시옵소서.
———————————————————————————
김반희
탬파에 펼치는 히포크라테스의 삶

동포의 건강을 지키는 우뚝한 홈 닥터
쟁쟁하게 진출한 세 딸이 있어 친지들로부터 간혹 듣는 딸 부자라는 소리에 조금도 섭섭함 없이 웃을 수 있다는 김반희 씨. 첫 딸과 둘째 딸이 모두 현직 변호사이며 셋째 딸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현재 의사로써 병원에 근무 중이다. (유일한 아들인 막내는 올해 대학을 갓 졸업하고 사회로 진출한 아직은 ‘사회 루키’다.)
8. 15해방 후의 일이다. 태어나서 줄곧 자라 온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 가는 정든 평양 땅을 떠날 때는 그도 자유를 찾아 뿔뿔이 떠나는 다른 월남자들처럼 적지 않은 모험 속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능선을 넘어야만 했다. 1931년 11월 30일 생인 그는 고향의 향수를 느끼며 살기를 반세기가 넘은 실향민이다.
월남한 후 서울에 정착한 그는 곧바로 용산고등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고교 졸업에 앞서 대학입학을 앞두고 설레던 마음도 예기치 못 했던 6. 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맞고 또 한 번 좌절 속에 남하(南下)하는 피난대열에 선다. 그리고 떠밀려 내려온 대구에서의 피난살이 속에 그는 공군 병과 13기로 군에 지원입대 한다. 그때만 해도 일정복무기간이 설정되어 있지 않았을 때라 그는 공군만기제대 제1기의 행운(?)을 동기생들과 함께 갖게 되었다며 그때 그 시절 병영생활의 일화를 들려준다.
군복을 벗은 그는 곧바로 바늘구멍처럼 경쟁률이 치열했던 서울대학교(치과대학)에 입학, 치과대학 졸업생으로서 제반 과정을 거치며 졸업장을 받자 바로 도미 유학수속을 한다. 그리고 힘겹게 가지게 된 학생비자를 들고 찾아간 곳은 미국의 심장부인 워싱턴 DC였다.
그곳에 있는 Howard University 의 대학원 과정을 수료하고 한국으로 다시 귀국했다. 이어 치과대학이 아닌 일반 의과대학 과정을 다시 밟은 그는 경희대학교 의과대학에서 4년간을 수학(修學)하고 난 후 국가시험(일반의사시험)을 거쳐 의사자격 등을 획득한 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다. DC Hospital Centre에서 이번에는 마취의사로 근무하던 중 병원예산관계로 기구를 축소하는 소위 구조조정으로 다시 St Hart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는 마취의사가 아닌 일반의사로 전환하는 등, 여러 학교와 의료기관을 섭렵한 끝에 그는 80년 여름 어느 날 탬파로 오게 되면서 비로소 동포들과도 인술을 매개체로 하는 인연을 맺기 시작한다.
탬파에서는 당초 병원의 응급실 의사로 재직했으나 아무래도 가정의를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그는 소위 말하는 Home Doctor가 된다.
의사소통에 불편을 느끼는 많은 한인들이 있다는 정보가 그로 하여금 종합병원이나 기타 대형병원들의 상당한 대우와 함께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제안들을 거두게 하는데 한 몫을 했다. 탬파 지역 한인동포사회를 상대로 인술(仁術)을 베푸는 일에 여념이 없는 그를. 기자가 첫 대면을 할 때도 73세라는 연령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렇게 젊게 보이시냐는 질문을 했는데도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그냥 웃기만 한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의학공부를 하고 황혼기의 인생을 동포사회 건강파수꾼으로 우뚝 자리 매김를 했던 그에게는 간호사 출신의 권경린 여사의 내조가 컸다는 것이 그를 아는 사람들의 말이다.
지난 2월(2003년) 탬파지역 한인동포들의 아쉬움 속에 23년간의 탬파에서의 의사생활을 마감하고 정년 퇴직을 한 그는 남은 여생은 하나님사업에 열심히 봉사할 계획이라고 했다.
현재 탬파 제칠일안식일교회 장로직분을 맡고 있는 그는 교회봉사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인다. 필자와 인터뷰를 끝내고 헤어지는 인사에서도 그다운 두 가지를 당부한다. 건강에 유의하고 신앙생활에 충실하라는 의사이자 장로로서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처음 만난 사이인데도 무척이나 오래도록 알고 지낸 사람과 같은 따뜻함을 느끼게 했다.
김석태

민속공연단 이끄는 우리들의 ‘쟁이’
한국음식의 세계화 꿈꾸는 요식업계 왕손
휴전 50주년을 맞는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휘장 수여식이 화려하게 펼쳐지던 탬파 컨벤션홀에서, 그리고 미주이민 백주년 기념으로 구정맞이 민속놀이파티가 벌어지던 인디아 대형 홀 안에서도 빠짐없이 모습을 드러내어 민속단을 리드하는 어떤 사람을 필자는 눈여겨보았다.
그가 바로 이번 공연을 준비해 한인동포들에게는 흥겨운 우리가락의 민속문화 축제를 외국인들에게는 우리의 전통 문화를 미 주류사회에 알리는 올해 64세의 김석태(전 민속단장)씨다.
그는 탬파 최초의 한국식당을 열어 플로리다 땅에서 한국음식점으로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명동의 메트로호텔에 근무 중 평소에 꿈이었던 배를 타는 직업으로 전향했던 그는 마도로스는 아니지만 1천여 명의 선상근무자가 있는 호화유람선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웨이터에서 요리사로 옮기면서 솜씨를 보이게 된다.
서울 장안에서 내노라 하는 식도락가들이 줄지어 찾던 무교동의 명소(名所) ‘호수 그릴’의 명성도 귀국 후 김 씨가 자신의 이모와 함께 창업해 빚어 낸 그의 작품이다. 맛의 마술사 김 씨는 플로리다 땅 탬파에 짐을 풀고 난 후 최초의 한국식당을 차리고 문을 연 배경을 이렇게 말한다.
“한인 동포들의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으나 한인들의 모임터 역할을 할 수 있는 곳도 필요했고 무엇보다도 주류사회로 통하는 현지인 또는 단체들이나 사계절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한국의 음식문화를 소개하고 다른 여러 고유문화도 선보이며 살고 싶었다”고 한다. 그 소박한 꿈의 소산이 지금 바로 그가 오너이며 손수 요리를 하고 있는 식당 <한일관>이다.
플로리다 민속단의 단장으로서 행사 때마다 젊은이들과 함께 농악대원 복장을 하고 꽹과리를 두들기며 신명나게 한 판 벌어지는 굿 가락을 펼치는 리더로서 손색없는 모습에서 그 순간만큼은 사업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민속놀이밖에 모르는 [쟁이]로 변한다.
그는 매년 3월이면 탬파지역에 거주하는 60여 개국의 소수민족들이 저마다 자신들의 민족고유문화를 소개하는 쎈피국제민속박람회에서도 그가 이끄는 플로리다민속단의 공연은 단연 눈길을 끄는 인기프로그램으로 행사장에 나오는 관객들에게 이제는 정평이 나 있다.
각 민족이 행진하는 퍼레이드의 참여는 말 할 것도 없고 1년에 5회 정도 양로원을 방문하여 위로하는 행사도 인생의 값진 부분이 된 김 씨는 1970년 가을 마이애미에 도착해 유람선에서 일을 하면서 플로리다의 날씨에 매료되어 제2의 고향으로 뿌리내리게 됐다고 말한다.
한일관을 세울 때의 꿈처럼 그의 식당 문을 들어서니 비 한국계 고객들이 대부분이다. “김치도 풍물도 농악도 세계화해야지요. 언젠가 한글간판이나 한국음식이 늘어나 기죽지 않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실현하고 싶다”는 다부진 욕망에 어떤 사람들은 조소의 손가락질도 하지만 그는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일컬어 열등감의 포로라고 말한다.
그는 이 탬파에 한국을 알리는 한국의 모든 것을 전수시키는 꿈에 한껏 부풀어있다.
탬파한인회의 이사장을 지내면서도 동포들을 위한 일이라면 무척이나 바쁘게 나섰지만 현재도 통합한국학교의 후원이사인 그의 역할은 직함 그대로 후원하기에 바쁘다. 만족하진 못 하겠지만 자신의 힘이 닿는 수준까지는 도와준다는 그는 네 사람의 공동노력으로 민속단을 만든 후 중간에 잠시 다른 한 사람이 단장직을 맡은 것 외에는 줄곧 자신이 짐을 떠맡고 있다면서 “누가 시켜하겠습니까? 제가 좋아서 하는 거지요” 공연이 끝난 무대 뒤의 탈의실에서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으며 연신 미소를 잃지 않는 김 씨에게서 땀 내음이 아닌 장인 내음이 풍겨 나왔다.
주말 그 시간이면 식당이 매우 바쁜 시간인데도 딴청을 부리고 있던 그는 부랴부랴 행사장을 빠져나간다. 민속문화사절도 좋지만 그래도 생업이 건실해야 자신이 계획하고 추진하는 이 모든 사업도 잘 진행될 게 아니냐며 한일관을 향해 차의 시동을 건다. 그의 꿈대로 한글간판이 즐비하고 한국음식이 현지인들의 미각을 사로잡을 그 거리에서 다시 한 번 만나보고 싶다. 김석태 씨를… 김 씨의 고향은 경기도 인천, 그곳에서 1939년 10월에 태어났으며 부인 이연임 씨와 사이에 2남1녀의 자녀를 두고있다. 장남인 희복 씨는 이곳에서 가업으로 이어가기 위해 아버지의 식당에서 열심히 사업을 배우고 있으며 한국에 있는 차남은 대기업의 촉망받는 엘리트사원으로 근무하고 있고 딸은 결혼해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
김세복

탬파지역 한인교회의 개척자
어두운 곳에 빛 뿌리는 경찰목사님
플로리다에서 가장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 김세복 목사라는 것은 탬파베이지역에 살고있는 동포들의 대부분은 다 알고있는 얘기이다. 그는 동포사회의 크고 작은 행사에는 어김없이 참석해 목회자의 신분을 떠나 지역사회의 원로로서 그 본분을 다하며 동포사회 화합을 위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웃음으로 전하며 아픈 곳을 어루만져 주는 목회자로 소문이 나있다.
그는 한 울타리를 쳐놓고 그 안에서 양떼를 돌보는 목회자가 아닌 주 정부 산하 경찰국의 경목(警牧 : Police Chaplain)이다. 주류사회의 행사장에서도 교도소나 경찰서, 유치장 같은 곳에서도 그는 늘 경목 신분을 알리는 큼직한 뺏지를 양복 상의에 달고 다닌다.
그도 실향민, 39년 3월 20일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했다.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그는 6.25사변 발발 전해인 1949년 열 한 살의 나이로 남하(南下) 대열에 오른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극심하던 때로 그는 기억하고 있다. 천신만고 끝에 서울에 닿은 그는 신촌에 정착하려 했으나 이듬해 6.25전쟁으로 피난열차 꼭대기에 다시 몸을 싣고 대구로 내려왔다고 한다. 이어 피난시절 천막학교지만 미션스쿨계통에 입학을 한 그는 숭실중고등학교를 마치고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교단 산하의 신학교를 다니던 중 종군(從軍)특기자로 군에 입대하였다가 만기제대를 했다. 그리고 복학은 연세대 연합 신학원으로 했으며 대학 졸업 후 동 대학원을 70년에 수료했다. 이어 도미유학 길에 오른 그는 테네시주의 네시빌에서 미국 감리교 교단 산하인 Scaritte College에서 3년간 기독교 교육학을 전공하고 졸업과 함께 목회일선에 뛰어들었다. Luthek Rise Seminary에서 목회학 박사학위를 받을 정도인 그의 기독교 관련학벌이 말해주듯 경찰목사가 되기까지의 그의 목회경력도 다양하다.
스물 여섯 살에 영등포구 상도동에 위치한 그리스도교회에서 전도사로 6년간의 예비목회수업을 충실히 한 그는 도미 후에는 현지한인 및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네시빌 최초의 한인교회를 개척해 3년여에 걸쳐 교회를 부흥시키고 난 다음 한인밀집지역인 뉴욕으로 날아간다. 플러싱 지역에 교회를 개척해 역시 3년만에 개척교회의 터전을 완전히 뿌리내린 후 다시 선택한 곳이 플로리다의 탬파다.
1976년 4월, 이곳에 도착한 그는 쉴 틈도 없이 탬파지역 동포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다시 탬파 최초의 한국인 교회인 탬파한인연합교회를 개척해 담임목사로 취임해 시무 한다. 이때가 탬파지역에 한인들이 대거로 이민을 오기 시작한 시기로 새로 이민생활을 시작하며 뿌리내리려는 그들에게 신앙을 심어주고 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용기와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등 남다른 열정으로 봉사했다.
그 당시 김 목사는 한인들을 위한 마땅한 봉사단체가 없어 이민오는 한인들을 공항픽업부터 아파트 계약, 운전면허증 통역, 자녀들 학교입학, 병원안내 및 통역, 사회보장 번호 받는 일, 사업체나 직장알선, 장례식 및 결혼식 주례 등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일을 처리해주는 목회자로 봉사자로 탬파 한인들의 산 역사의 증인이다.
그후 교회가 미 남부 침례교단에 가입하면서 탬파한인침례교회라 명명(命名)하고 13년간을 시무하면서 북미 남 침례회 한인교회 총회장을 역임했으며 또 다시 키스톤 한인침례교회를 개척하여 오늘(2003년 5월)에 이르고 있다.
동양인으로서는 플로리다주 최초로 탬파 경찰국 경목이 된 1999년 2월 이후 줄곧 매월 1회씩 경찰들을 상대로 예배를 올리며 또 그들을 상대로 윤리, 종교, 신앙문제 등에 대한 상담도 하는가하면 수시로 구치소를 방문하여 재소자들과 상담하며 특히 그들이 호소하는 애로사항을 카운셀링 후 리포트하기로 되어있는 경목 본래의 의무를 소상히 소개하기도 했다.
목회, 경목활동 외에도 탬파 최초의 한국어방송(주말/1979년~1981년)을 하기도 했으며 교회 건물 안에 세종한글학교(1979년)를 만들어 모국 공관을 찾아다니면서 한글교재를 지원 받는 등의 큰 역할도 했다.
모교인 연세대학교 학장의 특별강사로 초청되어 종종 후배양성에 기여하고 있는 김목사는 민족평화통일자문위원(1998년~1999년)을 역임하였으며, 서부플로리다 한인교회협의회 회장, 플로리다 한인침례교회 회장, 침례교회 목회자로는 최고의 위치인 북미주 남침례교회 한인교회협의회 총회장(14대) 및 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사모 김동희 씨는 결혼 후 지금까지 간호사 생활을 하면서 남편의 다양한 활동을 묵묵히 뒷바라지하고 있다. 슬하에 둔 2녀1남 중 장녀인 은혜 양은 교수를 역임하고 뉴저지주 상원의원의 부사무장을 지낸 후 현재 겐스빌 주립대(University of Florida)에서 법학 공부를 하고 있으며 차녀인 은희 양은 남부플로리다 대학(University of South Florida)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버지니아 노폭 아동병원에서 근무하고 있고 장남인 은국 군은 조지아 공대(Georgia Tech)을 졸업한 후 Industrial Engineer 사에 스카웃 되어 근무하면서 회사 장학금으로 잭슨빌에 있는 북부 플로리다대학(University of North Florida)에서 석사 과정에 있다.
자녀자랑보다도 권사님이신 89세의 노모를 모시고 있다는 게 여간 큰 축복이 아니냐며 노모를 모시고 사는 것이 집안의 큰 영광이자 자랑이라고 했다. 인터뷰 말미를 온통 어머님이 아직 살아 계신다는 기쁨 하나로 메꾸는 효자 목사의 넉넉한 미소에 함께 미소짓지 않을 수 없었다. 김 목사 덕택에 참으로 오랫만에 따뜻한 미소를 지어봤다.
김이태

플로리다의 야자수에 영근 성공
아들 도현군, 「정신대」 파고든 당찬 2세
프로미식축구 슈퍼볼 결승진출의 뜨거운 열기가 탬파를 가득 메우고 있던 황금주말의 아침. 그를 만나기 위해 탬파 외각도시인 러스킨에 위치한 그의 농장을 찾았다.
야자수가 지평선을 이루고 있는 41번 국도 하이웨이 옆 농장에는 입구부터 이름도 모르는 야자수들이 손님을 맞이하듯 잎새를 나부끼며 기분 좋게 손짓하고 있어 콧노래를 부르며 김이태 사장의 넓직한 집무실을 노크했다.
“지금 시야에 전개된 끝이 안 보이는 관상목 야자수 나무는 몇 그루나 되느냐?”는 질문에 그 자신도 잘 모른다며 “전담하는 직원의 컴퓨터를 켜봐야 알 수 있심더”라고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대답한다.
대구능금의 원산지인 경북 경산 임당에서 그는 1949년에 출생한 순종 TK맨이다. 구차스러운 말을 하기 싫어하는 탓인가 도미(渡美) 이전의 한국에서의 활동을 물어봤으나 역시 그다운 답변이다.“다 접은 기억들인데예, 뭐 할라꼬 그 얘기 또 하겄심까, 그 대신예, 서울에서 대한석유공사라고 있지예? 거기랑 관계 있는 사업을 좀 했서예”로 질문을 막아선다. 질문이 무색한 답을 떨군 후 그는 곧바로 아메리칸드림을 일구어낸 스토리부터 전개한다.
”단돈 20불 달랑 쥐고 태평양을 건넜습니더“라며 크게 벌어놓은 것도 없이 이렇게 늙었다며 희끗희끗한 휜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소탈하게 한바탕 웃는다.
그때가 벌써 4반세기도 훨씬 넘는 1976년 2월 어느 날이다. 야자수 나무마저 더위에 지쳐 축 늘어진 플로리다의 여름을 실감하면서 그는 무엇부터 손을 댈까 망설이다 조경사업으로 꿈을 키우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리고 초보부터 배우려는 욕심에서 잔디 깎는 일에 뛰어들었다. 잔디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몇 해를 끈질기게 하고 보니 그의 표현대로 돈이 좀 모아졌다. 그의 꿈은 다부지게 이루어진다. 사업 외에는 한눈도 팔 겨를이 없었기에 그는 사계절을 누빌 수 있는 골프 천국인 플로리다 땅에 살면서도 아직 골프채를 쥐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꿈을 이루기 전에는 모든 것을 외면한다는 그의 밉지 않은 고집의 일면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현재 즉시 파악이 힘든 관상목의 숫자도 그렇지만 필자가 찾아갔던 그날도 이상기온 탓에 혹 얼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에서인지 멕시칸으로 보이는 수많은 일꾼들을 동원해 조경용 관상목을 비닐로 에워싸는 작업을 한참 진행 중이었다. 엄청나게 큰 바윗돌들과 그것을 운반하는 여러 대의 중장비를 보고 용도를 물으니 관상목 재배 뿐 아니고 대형 인공폭포도 만든다면서 거기에 필요한 장비라고 했다. 단돈 20불로 도전한 그의 사업은 사무실 주변에 늘어선 중장비 외에도 25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다는 데서 성공시대의 막은 이미 올랐다는 느낌을 갖기에 충분했다.
자신이 모국이나 한인동포사회에 대해 사업 때문에 소원했던 것과는 달리 장남 도현 군이 아버지 대신에 한몫을 톡톡히 한다. 그래서 김 씨는 인터뷰 처음부터 자신보다는 아들을 이 책에 소개해 줄 것을 원하기도 했다. 어디에 내세워도 떳떳한 자랑스러운 아들 도현의 내력은 이렇다.
대학을 졸업한 후 장래가 보장되는 직업도 마다 하고 1세들도 나서기를 꺼리는 정신대를 위한 일에 뛰어든 그를 아버지의 주선으로 바로 만나게되었다. 듬직한 체구에 아주 믿음직한 인상이다.
그러나 도현이가 도대체 한국말이나 할 줄 알고, 한국 글이나 쓸 줄 알면서 이런 일을 하나 싶어 우정 날카롭게 질문을 시작했다. 어떤 계기로 뛰어들었느냐는 말에 그는 “인터넷 속에서 우연히 읽게 된 종군위안부들의 스토리를 보고는 이 일에 도움이 되고 싶어 나서기로 맘먹었다”고 잘라 말한다. 그의 한국말 실력은 취재용(?) 대화에도 능숙히 답변할 만큼은 완성돼 있었다.
못된 용심이 동해, 그가 만나본 정신대할머니의 이름을 한국어로 써보라고 주문했다. 선뜻 펜을 받아들며 워싱턴 DC에서 99년 11월에 만났다는 ‘김윤심 할머니”라고 또박또박 필자의 취재노트에 옮겨 쓴다. 인터뷰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정신대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2000년 12월부터 6개월간 서울에 가 연세대학교에서 어학연수를 마쳤다는 매사 열성적인 성격의 DK(김도현을 통상 이곳에서 부르는 이름, 이하의 글에서는 DK로 표기하겠음)의 백그라운드를 알았다.
스스로가 인터넷을 통해 알기 전까지는 한 번도 부모나 한국인 친구들 등 그 누구로부터도 들어보지 못했던 사실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으며 그리고 이 땅에 와서 사는 무수한 한국인들은 왜 이토록 이 문제에 침묵을 지키는가에 대한 회의와 함께 가슴 속에서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는 그는 이 충격으로 받아들여지는 문제에 대해 힘이 닿는 한 그 피해 할머니들을 어떤 방법으로든 도와야겠다는 결심이 섰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DK의 이런 장한 뜻에 적극 협조를 아끼지 않았던 아버지의 도움이 컸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1999년에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Public Law 102-450) Asian Pacific American Heritage Month (May)가 제정 선포되어 그의 용기를 북돋우는 촉매제가 되었다. Nashville에 있는 Tennessee 주립대학 시절에 이미 Asian American Students Association에 회장직을 역임하기도 한 그였기에 아시안의 국제위상에 관해 남다른 관심이 많았던 터. 그는 이 정신대 할머니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일본을 상대로 한 보상문제에 대한 국제적인 여론조성을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투쟁하는 것보다 단체를 만들어야 되겠다는 판단 하에 A.P.A.A.F (Asian- Pacific American Awareness foundation of Tampa Bay, INC)라는 단체명으로 2002년 5월에 플로리다 주 정부에 정식 등록을 마쳤다. 탬파 시장 명의의 행사 허가 등록사본도 보여준다. 이렇게 스물 세 살의 DK 가 만든 아시안 태평양계 인권단체의 출범이라는 데서 미국인들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
일본측의 전 방위적인 행사방해로 정신대문제를 다루는 장소 선정에도 신경을 쓴 나머지 이젠 일본측의 방해공작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대학 캠퍼스를 사용해야하는 이중고를 치르기도 한다.
특히 지난해 DK가 주관한 탬파 컨벤션센터에서 열렸던 <숨겨진 진실 : 2002년과 정신대문제>의 행사장에는 관심을 가진 미국전역에서 모여든 한국인과 미국인등 약 1천여명이 참석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이어 한국 나눔의 집에서 초청된 이옥선 할머니가 16살에 강제위안부로 끌려가 겪은 가혹했던 순간의 일화들을 목 메인 채 토로했으며 무대 뒤에는 일본군에 성의 노예로 끌려가 무참히 희생된 정신대 대원들의 넋을 위로하는 한아름의 노란색 장미가 이들의 눈길을 뜨겁게 했다며 그의 눈시울도 촉촉이 젖어갔다. 현지인들의 반응이 오히려 뜨거웠단다.
그 행사가 있었던 5월 17일 당일 탬파시장도 이날을 “위안부의 날”로 선포했으며 주류방송들이 30분 짜리 특집방송을 내보냈고 신문 등도 주요기사로 다루면서 이날의 행사를 주최한 주인공 스물 네 살의 한국청년의 뜻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췄다.
그러나 그는 막상 그 장소에 나와 행사를 협조 했어야 할 현지 한인단체나 한인사회 유지들이 외면을 했다는 데서, 그들의 무관심과 차가운 반응에 몹시도 서운해 한다.
그때 아버지 김 사장은 이렇게 말을 했다. “ ‘어린것이 뭘 안다고 나서’ 하는 식의 그 혹독한 편견을 보고 망연자실했다”며 “이 또한 진작 버렸어야 할, 이 땅에 이식하지 말았어야 할 우리들의 잘못된 유산”이라며 1세들의 의식개혁을 위한 한마디를 잊지 않는다.
미국에서 출생했고 고등학교와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그는 금융컨설팅이라는 장래가 촉망되는 직업을 이젠 포기하다시피 했다. “생존자들이 한 분이라도 더 계실 때 도움이 되어야 하기에 느긋하게 할 수가 없다”는 그의 강한 집념을 살려주고 뒷받침하는 이는 물론 아버지 김 씨다.
이런 아버지의 든든한 배경 탓인지 자금에는 구애받지 않는 듯 아들 도현의 정신대를 포함한 인권운동의 꿈은 부친 농장의 야자수 나무처럼 푸르고 야무지게 자라고 있다. 그리고 그의 인권운동을 위한 도전의 영역과 역할은 어느새 범 아시안계로 넘어가고 있다.
“공통의 역사적 체험을 한 아시안계라는 점에서 할 일이 많다”는 그의 고백은 이어 “왜 한국정부는 정신대문제에 대해 일본의 보상은 커녕 사과도 한마디 받아내지 못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매서운 질타로 이어진다.
귀로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우린 뭘 하고 DK가 선두주자가 되어 정신대문제에 뛰어들었는가 하는 일종의 부끄러움 때문이리라.
“위안부문제는 한·일 간의 과거사 문제만이 아닌 전세계 인권의 문제”라는 그의 말이 플로리다 이민사를 엮어내느라 그간 만난 수 십 명과의 인터뷰 중 가장 체감으로 와 닿았다.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 후세들에게 할 말은 있어야지요”라는 그 어른스러운 말은 우리를 더욱 당혹시키기에 족했기 때문이다.
———————————————————————————————
김재준

당수도 구령 속에 민족혼 담아 한평생
탬파의 일출처럼 영원한 우리의 당수도인
플로리다의 탬파시를 중심으로 동쪽으로 매끈하게 뻗은 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미국남부의 내노라하는 교육도시 브랜돈에 닿는다. 브랜돈 선상에서 약간 비켜난 뒷길에 위치한 민족무예의 함성을 들을 수 있는 곳. 바로 김재준 관장이 운영하는 당수도장이 그곳이다. 첫 느낌이 예사롭지 않더니 급기야 도복을 입고 있는 김 관장이 1929년 8월 15일생이라는 말을 듣고는 인터뷰 초반에 연필이 흔들리는 것을 감춰야 했다. 75세의 현역사범이자 세계 무덕관 총관장(총재)인 김 관장이 운영하는 그곳의 역사와 당수도를 통한 그 기나긴 외길인생의 내력을 알아봤다. “영광의 외길이었으며 보람된 삶의 전부였습니다. 무도인의 길이라는 게 처음부터 자기와의 처절한 투쟁입니다. 숙달된 정도를 남에게 보이려는 기술함양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의 성취감을 만족시키며 갈고 닦는 외롭기까지 한 기예죠. 제가 제 자신에게 되물을 때 서슴없이 후회 없다고 답할 수 있으니…다시 말해도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죽는 날까지 이 길을 걷겠다는 것입니다.”
카랑카랑한 그의 제일성은 당수도의 구령만큼이나 우렁차기만 했다.
해방되던 해인 1945년 그는 16세의 나이에 당수도에 입문했다. 당시 서울 용산구 한강로 3가에 있었던 당수도 무덕관의 문을 두드린 것으로 그의 무도인생이 시작됐다. 그리고 60년의 무도 인생에서 절반이 훨씬 넘는 세월을 미국 땅에 당수도를 심으며 후진을 양성하는데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고 황혼기까지 보태야만했다.
태권도 국기원 공인 9단에 당수도 10단인 그가 1969년 미국 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것은 김 관장이 58년 무덕관 용산지관 사범으로 있을 때 당수도에 입문해 제자가 된 미군 Dale Drouilard의 초청 때문. 당수도의 전파로 벽안의 미국인들에게 한국을 올바로 알리는 것이 무도인으로서 나라사랑일 수 있겠다는 데 생각이 닿자 주저 없이 짐을 꾸렸다. 미시간주로 온 후 그곳에서 18년 동안 당수도장을 운영하다가 87년에 탬파로 이주했고 그 이후 줄곧 이곳에서 칠순이 넘은 연령의 테가 무색할 정도로 오직 당수도인으로 한길만을 걷고 있다.
직접 운영은 하지 않지만 자신의 뿌리가 내려진 산하의 당수도 지관이 세계에 300여개, 미국 내에만 해도 150개라고 했다. 배출한 제자들이 어느 정도냐고 물었을 때는 “제자 한 명 한 명을 그 제자 가르치다 끝낸다는 심정으로 일일이 돌보고 가르쳤지만 세월의 벽을 넘을 순 없어서인지 애석하게도 몇 명이 나로 인해 당수도인이 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니, 제자를 몇 명이나 두고 있는지를 헤아릴 시간도 없이 오직 당수도 전수에만 전심했기 때문일지도…” 그런 탓인가. 그가 주최하는 올해로써 32회가 되는 대회도 그 참가인원이 엄청난 듯하다. 올해(2003년) 7월에도 열릴 이 대회는 매년 개최되던 것이 최근에는 격년제로 치러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미국에서 당수도를 통한 그의 업적과 존재를 인정해주는 사례도 만만찮다. 현 미국대통령인 부시가 주지사(텍사스)시절 당수도를 통한 그의 업적을 치하하는 공로감사패를 증정한 사실도 특이할 만 하지만 제자였던 미군 중령의 간곡한 초청의뢰에 못 이겨 파나마를 방문했을 때의 일화는 사뭇 이채롭다. 호텔에 투숙했는데 밤새 덩치 큰 현지인 몇 사람이 호텔방문 앞을 서성거리기에 후론트데스크에 전화를 걸어 그들의 신분을 확인한 결과 당시 파나마 대통령이었던 노리에가 씨가 경호원을 배치시켜 놓았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 흐뭇해 한 적이 있었다며 웃는다.
인내심을 통한 인격도야와 국가에 대한 충성심 함양, 그리고 부모에 대한 공경심을 심는 것이 제자들에 대한 자신의 당수도 철학이라는 그는 동포사회에 대한 코멘트를 부탁했을 때는 좀 망설이다 이렇게 말한다. “단합 되어야 할 동포사회가 별 것 아닌 것 가지고도 아귀다툼을 하는 모습을 볼 때 마음 아프죠…그래서 좋지 않은 일이 발생했을 때는 가끔씩 소방관 역할도 하다보니 탬파 한인회 이사장까지 거치게 됐는데.. 소방관 역할이 불필요한, 모든 면에서 성숙한 동포사회가 돼야겠죠”라고 작은 바람을 피력했다. 탬파 노인회 부회장도 지냈던 그는 교회 봉사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으며 동포사회를 위한 크고 작은 일에도 「봉사」라는 명분이 있는 일이면 기꺼이 앞줄에 나선다. 그래서 2003년 2월에 있었던 미국이민 100주년기념 플로리다 민속단 주최 민속놀이공연 및 구정잔치에서도 그는 감사패를 받아야 했다.
29년 서울태생으로 동국대학교 영문학과 출신인 당수도계의 한 축을 이루는 김 관장은 31년 생인 부인 김금순 씨와 슬하에 3남2녀를 두어 현재 10명의 손주들이 있는 다복한 대가족의 가장이다.
5명의 자녀들 모두가 당수도인이지만 특히 장남(명남)과 차남(명석)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당수도 사범으로 확고한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 분야에서 기대되는 유망주들이다. 대를 이어 무도인의 혼과 한민족의 얼(정신)을 미국 남방 플로리다에 뿌리 내리고 있는 김 관장의 무도일생은 탬파를 붉게 물들이며 차오르는 일출만큼이나 우리를 감격케 한다. 진정한 무도인 김재준. 그의 힘 찬 구령과 함성이 여전히 귓가에 쟁쟁히 울려온다.
김춘식

한-흑 갈등 해소의 견인차 ‘헬로 파파’
노인권익을 위한 거침없는 영어실력
1974년 4월 17일에 고용계약으로 이민 온 그는 한국에서의 경력이 남다르다. 한마디로 미국 통이었다. 미 7사단과 2사단 등 휴전선 부근의 일선 미군주둔지인 동두천지역에서 7명의 미군 사단장을 보좌한 경험을 털어놓는다. 통역관으로만 16년을 일했다는 그는 노무관계와 행정 회계 등에 관해서도 깊이 관여했다.
그래서 탬파 지역 노인들 중에서는 영어가 단연 뛰어난 사람으로서 지역사회를 상대로 한 그의 역할도 다분히 남다른 데가 있어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도 LA흑인들의 폭동사건이 보여준 한(韓)흑(黑)간의 갈등이 빚은 비극적인 상황을 눈여겨 본 그는 미처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한 한흑 두 민족간의 예기치 못 할 상황 발생에 대한 대책마련에 부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만든 것이 지역 흑인학생들에 대한 장학회 설립. 흑인촌에서 장사하는 한국사람들을 상대로 우선 설득작업을 벌여 관심을 환기시킨 후 결속을 다진 끝에 장학회를 설립하는 데 성공한다.
매년 흑인 커뮤니티에서 추천하는 장학생을 심사 후 선발해 <흑인장학금>을 주기로 했다. 장학금 수여식에는 흑인 상원의원을 초청해 시상하는 행사가 매년 이어지고 있다. 장학회를 창설하고 초대회장으로서 계속 참여하고 있는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한흑 간 갈등의 사전해소라는 데서 절대적 가치를 인정하는 공감대가 널리 확산되고 있다면서 이 일을 주도한 그에게 가장 협조적이었던 교회협의회의 지원을 잊지 않고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의 장학에 대한 관심은 흑인장학회로 끝나지 않았다.
작년(2002)부터 제1회 송학노인회 장학금이라는 것을 만들어 동포자녀 3명을 선발, 1인당 500불씩 모두 1,500불을 매년 지원하고 있는 장학사업도 앞으로는 그 수혜 대상과 수혜금액을 확대할 것이라며 앞으로 계속 이어질 값진 사업이라고 했다.
1930년 7월 2일 전남 여수에서 출생한 그는 일흔 셋이라는 고령에 걸맞지 않은 지역사회 봉사 자세는 대부분의 동포들이 칭송을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한국인으로서는 탬파베이지역 최초로 가스스테이션을 오픈 했던 그는 영어에 어려움을 겪는 동포들이 같은 업종에 관심을 가질 때마다 늘 도와줬으며 적어도 주유소 사업에 관한 한 이 지역 동포사회에 길잡이 역할을 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탬파베이지역 동포사회에 터주대감 이기도한 김춘식 씨는 현재 송학노인회장으로(차기 플로리다주 노인연합회장) 노인회의 비영리단체 승인을 받아냈으며 그로 인하여 지금까지 없었던 제도인 노인회 기부금에 대한 세제(稅制)상의 혜택을 보는 세금공제영수증을 발급하게 되었다. 이렇듯 영어를 할 수 있는 노인으로서 매사 주류사회나 정부측을 상대로 실리를 챙기는 일에 앞장서 그는 남들이 못하는 일들을 많이 해냈다.
고국문제나 동포사회 문제에는 지나치게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땅에서 유권자로서 책임이나 의무를 너무 무관심하고 소홀하게 다룬다면서 이 점이 아쉬워 유권자 등록 등 주류사회 참여에 적극성을 보이도록 계몽하겠다는 단단한 포부를 밝히는 김 옹의 고향은 전라남도의 미항(美港) 여수이다.
부인 김용순 씨와의 사이에 둔 4남매들도 남다른 효심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 부부는 자녀들의 장래와 형제지간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아낌없이 서로를 사랑할 수 있도록 네 자녀 모두를 차별 없이 생명보험금 및 이외 모든 재산을 골고루 분배한다는 유언장을 미리 작성해 놓을 정도로 부성애가 지극하다.
자녀들이 명절이나 특정일과 같은 날에는 함께 모여 식사를 하며 노년의 부모님들을 모시고 다닌다고 자랑하는 행복한 아버지 김 옹은 현재 탬파한인회의 이사직도 맡고 있다.
김풍진

플로리다의 자랑인 유일의 여성변호사
한인사회 굵직한 자리 모두 역임
플로리다주 최초의 여성 공인회계사이며 변호사인 김풍진 씨. 그는 미주한인이민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본사가 플로리다 한인 이민역사를 기록에 남기고자 기획한 인터뷰에 두 번씩이나 <나보다 더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이 많으니 그러한 사람들을 인터뷰해야 된다>며 극구 사양한 사람이다.
이에 기자는 세 번째 끈질긴 시도 끝에 그녀를 힘겹게 인터뷰 할 수 있었다.
1943년 서울 출생으로 재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전국의 수재들이 모인다는 경기여중고를 거쳐 서울대 사범대학을 졸업한 김 씨는 당시 유행어로 진짜 “KS” 마크를 획득하고 1965년 미국으로 오게된다.
김 씨는 탬파에 정착해서도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University of South Florida에 입학해 교육학석사학위(1969)를 받은 후 같은 해 스위스 University of Lausanne에서 프랑스 문학을 수료했다.
그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불타는 배움의 갈증은 그를 다시 University of South Florida에 재입학 하게 해 그는 영문학 학사(1973)와 회계학 학사(1975)를 취득한 후 탬파베이지역 최초의 공인회계사로 첫발을 내디디며 한인동포사회에 봉사한다. 그 후 그는 또 역마살이 발동했는지 Stetson 법대에 입학해 1994년 졸업하고 다음해인 1995년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해 변호사로 변신하는 등 일생을 학업과 동포사회 봉사에 온 힘을 기울인 인물이다.
그는 한국에서의 학창시절동안 집에서는 품안에 Mozart와 Beethoven 음악이 나오는 라디오를 끌어안고 살았으며 외출시에는 Andre Gide의 책 한 권만 손에 들면 부러움이 없었다는데 이렇게 낭만의 세계에서 성장한 탓인지 지금도 옛날처럼 집안에서 누워 뒹글수 있는 소파 하나와 밥그릇 하나 숟가락 하나만 있으면 살 수 있는데도 주변의 현실은 왜 그렇게 복잡한지 해답이 안나온다고 했다.
이렇게 항상 바쁘게 살다 보니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경기장으로 향하는 로마의 글래디에이더의 느낌을 갖는다며, 오늘은 또 어느 관중들 앞에서 누군가와 싸움을 해서 이겨야 하는데 어떠한 전법을 써야 되는지 항상 긴장된 마음으로 하루가 시작된다고 한다.
또 변호사라는 직업이 이렇게 힘든지는 몰랐다는 김 씨는 오늘 재판도 분명히 백인 노인 재판장 일 것이며 상대방은 날고 긴다는 유명한 변호사를 고용했을 텐데 한국인 의뢰인은 무조건 이겨 달라고 한다며 이들의 분쟁거리는 위자료를 조금더 챙기려는 이혼건, 조용히 피해없이 끝내달라는 경범건, 돈 받아 달라는 고소건, 미국에 합법적으로 살게 해 달라는 이민건 등 하나같이 이겨야만 되는 일들이기에 김 씨는 항상 긴장에 살고 있다.
이렇게 바쁜 가운데도 김 씨는 탬파와 플로리다주는 물론 미주 전지역의 한인동포들을 위해 시간이 나는 대로 봉사해 미국 내 한인동포들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알려져 있으며, 본국의 영어 방송인 아리랑 방송국의 미국특집 프로그램에 초청 받아 30분간 “플로리다 한국인과 변호사의 역할” 이라는 주제로 생방송에 출연해 관심 있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여장부이다.
특히 지역에서 일어나는 동포들의 회계일과 변호일 말고도 부탁만 하면 성의껏 도와주며 살아온 김 씨는 한인사회 봉사도 타의 추종을 부러워 할 정도로 서부플로리다 한인회장과 플로리다한인회 연합회장, 서부플로리다 실업인협회 회장, 미주한인 총연합회 고문변호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플로리다한인회 연합회 이사장,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 미주한인총연합회 건축위원회 고문변호사 등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김 변호사는 자의인지 타의인지는 몰라도 너무 바빠 학창시절의 버릇인 소파에서 뒹굴며 생각하는 생활과는 결별한 인생이 되었다며 방송사나 신문사에서 생방송 인터뷰나 기사청탁, 포럼에서 페널리스트 자리 청탁이 계속 있어 마지못해 하나씩 승낙을 하다보니 인생이 이렇게 바쁘게 됐다며 오늘도 여기저기서 부탁한 기사가 나를 재촉하고 있다고 서두른다.
김 변호사는 능력이 있을 때까지 동포사회에 도움이 되는 옳고 좋은 일이라면 기꺼이 나설 것이라며 피곤한 몸으로 또 다음 일을 위해 일어났다.
외동딸인 세라(33세) 씨는 예일법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현재 샌프란시스코의 대형 법률사무소에서 유능한 변호사로 근무하고 있어 모녀 변호사로 사회에 봉사하고 있다.
—————————————————————————————————–
노흥우

“자네들이 한국을 아는가?”
불모지 윈터해븐에 뿌린 효친의 민족혼
유도 7단에 태권도 8단으로 15단 짜리 69세의 현역무도인 노흥우 관장이 사는 Winter Heaven 이라는 곳을 찾아 나섰다. 플로리다 탬파와 국제적인 관광도시인 올랜도와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세계 각국에서 관광객이 모여드는 Cypress Garden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곳 중심가에서 그는 33년째 Ro Taekwon-Do라는 본관을 지키고 있다. 이젠 자신의 완전한 소유물이 된 긴 플라자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이 도장 외에 그는 타운 내에 2개의 지관도 가지고 있다. 바로 그 아름다운 관광도시 Winter Heaven에서 그는 명예시장과 명예 경찰서장직을 맡을 정도로 주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차지하고 있는 자랑스런 한국인이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그는 사담으로 전날 있었던 시장취임식의 일화를 들려준다. 신임시장 Michael Estling(태권도 4단)이 취임인사 직전에 했다는 코멘트, 만장한 내빈들을 향해 “지금 이 자리에는 이 지역의 명예시장이며 나의 태권도 스승이신 노 관장님이 참석해 주셨다”라고 특별소개를 받던 순간의 벅찼던 감정이 하루가 지났는데도 식을 줄 모르고 있었다.
1970년 플로리다주 정부 초청으로 그곳에 도착한 그는 이튿날부터 시청이 제공하는 도장에서 한국무도를 그 땅에 심기 위해 유도복 대신에 태권도복을 입고 나섰다. 태권도가 뭔지 코리아가 어디 있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 앞에 선지 33년째, 이제는 본관 유리창에 붙여 놓은 태권도라는 한글과 태극기가 그곳 사람들에게 익숙해졌으며 코리아라는 나라도 거의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그는 국기 태권도를 그 땅에 심으면서 민간외교관으로도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한국을 알리고 태권도 정신을 심기 위해서는 어린이들부터 교육시켜야겠다는 생각에서 그는 학교측과 부모들을 상대로 꾸준한 설득 끝에 지금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아이들이 학교가 끝나면 학교정문에 대기중인 노태권도 스쿨버스에 탑승하는 숫자가 적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추세가 날로 늘어나고 있다. 일하는 엄마들은 퇴근길에 도장에 와서 아이들을 데리고 간다. 도장 안에는 학습실도 있다. 운동과 학과 후 공부를 도장에서 병행한다. 그 도장에 소속된 어린이들의 학교에서는 성적표를 직접 도장으로 발송한다. 그래서 성적이 떨어지는 학생을 부모가 아닌 태권도 사범이 관리함으로 얻은 학교성적의 상승효과 등 본인마저 예기치 못 했던 성공담을 얘기하며 흐뭇해한다.
그리고 무술을 통한 신체단련과 인격을 도야하는 것 외에도 학업성적의 향상과 무도를 통해 배운 효(孝)에 대한 바른 자세로 부모에 대한 존경심도 입관 전과는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냥 태권도를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라 부모와 학교선생 이상으로 어린이들에게 좋은 스승과 사범으로써 인생에 모든 것을 가르치려고 노력한다는 설명을 하는 중에도 연신 어린아이들이 노 관장 옆을 지나가면서 인사를 통한 동양범절의 예를 지킨다.
그를 아는 많은 이들은 길거리에서 노 관장을 만나면 으레 Hi Chief!하면서 반겨한다. 그래서 그는 대화 도중에 글로 싣지는 말라면서 어느 날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평소 술을 절제합니다만 그날 따라 조금 마신 술이 냄새가 났던 모양입니다, 순경이 차를 세우고 검문을 하려던 순간 저를 알아보고 하는 말이 ‘관장님 저쪽 길 옆의 커피샵에 가셔서 술이 좀 깬 뒤에 운전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는 말에 몸 둘 바를 몰랐다”는 내용이다. 공무집행을 하는 경찰의 형평성 논리에 어긋날지는 몰라도 아무튼 이 정도의 대우가 따른다. 동양인이 백인경찰에게서 받는 이만한 정도의 서비스라면 말이다.
그는 태권도를 이 땅에 어느 정도 정착시켰을 무렵에는 속해있는 서부플로리다 한인회를 위해 봉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92년도에는 한인회장을 다음해에는 플로리다주 한인연합회 회장도 역임해 당시 그의 업적을 기리는 뜻에서 전해 온 모국정부(외교통상부장관)의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7월에 발표한 모국의 헌법기관인 평통자문위원회의 11기(2003~2004)위원으로 위촉되어 봉사하고 있으며 또 노인들의 친목단체인 플로리다 송학노인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1933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로 올라가 경동중고등학교를 거쳐 연세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유도부의 창설멤버가 되었으며 연대 유도팀의 선수로 많은 시합에 출전하기도 했다. 부인 노경자(68) 씨와의 슬하에 둔 두 형제 중 서른 아홉 살의 차남 재용 씨가 아버지의 대를 이어 현재 본관 운영을 비롯하여 지관까지 관할하고 있다.
공인 6단에 미국태권도연맹 플로리다주 회장을 현재 2회에 거쳐 연임하고 있는 재용 씨는 태권도 매력에 푹 빠져 태권도 전파에 일생을 걸었다며 또 이것이 부친인 노흥우 관장의 희망이라며 오늘도 제자양성에 전념하고 있다.
재용 씨는 약관의 나이에 미국대표팀을 이끌고 네델란드의 세계태권도대회와 Pan-Am 대회에 감독자격으로 미국대표팀을 인솔하고 간 관록의 보유자다. 한국태권도의 중앙무대를 옮겨놓은 듯한 기라성 같은 태권도인들이 모여있는 플로리다에서 39세의 나이로 주 태권도연맹의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된 데는 선배들로부터도 적잖은 신임을 받고 있기에 가능할지 모른다. 자신의 이야기보다는 아들 재용의 타고난 태권도 기질과 차세대 미주 태권도의 리더로서의 부상을 눈 여겨 보고있는 70세의 현역무도인 노흥우 관장, 그를 만나고 돌아서던 귀로의 발걸음이 가벼웠음은 물론이다.
문성수

‘교육’과의 끈질긴 인연 ‘한평생’
탬파 노인사회의 정신적 지주
탬파에 정착한 지 20년, 한인사회의 원로로서 그의 자리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민 전 한국에서 교육계에 오래 몸담아 온 탓인지 교육자답게 한인사회를 위한 포용력과 설득력, 그리고 혜안이 가득한 원로로서의 체취가 한껏 풍긴다.
대구가 고향인 1928년 생, 지방으로서는 명문 공립학교였던 대구농림을 거쳐 영남대학교 법과대학을 1955년에 졸업한 그는 곧바로 교육계로 투신한다. 대구 혜성중고등학교를 거쳐 대구 배문중학교에서 교감생활을 한 그는 이어 경상북도 내의 지방단체장들과 국가교육기관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대학교 수준의 경북향토교육원에서의 교수생활을 끝으로 교육자 생활의 막을 내렸다. 별로 내세울 것이 없다면서 인터뷰를 극구 사양하던 그는 말문을 열면서 자신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우선 한인사회에 대한 걱정부터 시작했다.
이민인구의 유입으로 친화력이나 단결에서 오히려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면서 그럴수록 한인회가 구심점이 되어야 하는데 여러 단체로 파워가 분산되는 것에 아쉬움을 느낀다며 자신이 한인회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을 네 번이나 해보았지만 모두가 하나같이 나올 때와 그만둘 때가 너무나 다르다고 개탄한다. 회장임기가 끝나면 한인회 출석마저 기피하는 현상이라며 이래서야 한인사회의 미래가 있겠느냐고 따끔하게 꼬집은 후 모국에 대한 정치관심도는 지나친 반면 동포사회나 지역사회에 대한 무관심은 애석할 정도라고 말한다. 그러나 교육자 출신답게 한글학교에 대한 애착과 함께 노인문제 등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컸다.
이민을 와서 보니 수많은 단체들 중에 노인들의 친목단체가 없는데 대해 필요성을 느낀 그는 탬파 최초의 노인친목단체인 송학노인회를 창설하여 초대에서부터 2대, 3대에 걸쳐 회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탬파노인대학의 학장도 교육자인 그의 몫이 되어 열심히 일구어 나갔다고 한다. 노인회를 만들어놓고 사회보장문제에 관한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노인복지에 관한 혜택문제를 비롯해 건강문제 등 노인들 스스로가 알아야 할 문제들에 대해 지도 계몽한 것이 보람이면 보람이라고 말하는 그는 연신 “별로 자랑거리가 없다”며 자리를 뜨려고 한다.
종교를 묻자 불교라고 선뜻 대답하는 그는 풍년에 가까운 자식농사 앞에서는 별로 머뭇거림이 없었다. 자식들의 대견스러움이 그의 환한 웃음 속에 스며 나온다.
부인 한정희 여사와의 사이에 5남1녀의 자녀를 두고있는 문 씨에게 자녀들에 대해 물어보니 한사코 자랑할 것이 없다며 모두들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고 겸손해 한다. 그러면 현재 자녀들이 미국에 다 살고 있냐고 물으니 한국에 세 아들이 살고 있으며 두 아들과 딸이 이곳 탬파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그중 한국에 있는 장남 권도 씨는 대구의 명문 경북대학교 사대부고를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를 26기로 졸업했으며 현재 현역 해군대령으로 진해 해군교육사령부에 교수로 재직 중이며 차남 주철 씨는 영남대학교 재학시절 학생회장을 지냈는데 이때 문교부 추천으로 전국 대학생을 대표해 동남아 7개국을 순방했다며 현재는 본국의 LG화재 법인 대리점 대표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촉망받는 금융엘리트다.
최근에는 탬파 한인사회 바둑애호가들의 모임단체인 기우회의 고문으로 취미활동을 위한 노인들의 바둑인구 저변확대를 위해 노력한다면서 “이건 기사화 하지마이소”라는 경상도 사투리로 기자와의 만남을 마무리했다.
박정환

월남전 사선을 넘나든 죽음의 산 증인
수의사-태권사범으로 드라마 같은 인생유전
문제의 저서 “죽음의 정글을 뚫고..”의 저자 박정환! 1966년 ROTC로 임관된 후 그는 주월 한국군사령부 산하 태권도 교관단의 일원으로 불타는 정글 속의 월남 땅을 밟았다. 그러나 1968년 1월 30일 예기치 못 했던 베트콩들의 구정공세가 터지면서 월남 동남부 지역인 MI-THO에서 포로로 붙잡혀 적진 깊숙이 자리한 포로수용소에서의 참담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3개월만에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캄보디아 국경을 넘으려는 순간 붙잡히고 말았으며 이어 캄보디아군은 그를 간첩으로 누명을 씌워 군사재판에서 6년형을 선고했다. 실형이 선고되고 군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1년 반만에 한국정부와 미국정부의 석방교섭이 이루어져 그는 한국으로 귀환했다. 그날 69년 6월 18일자 서울의 신문들은 “쥐 고기 먹으며 연명”이라는 제하에 기구한 그의 운명의 순간 순간들을 사진과 함께 실었다. 근 1년 반 동안의 생사의 기로를 헤매던 기억의 파편들을 모은 책의 이름이 바로 “죽음의 정글을 뚫고“이다.
69년 당시 불가피하게 말을 아껴야했던 그 무렵의 상황과는 판이하게 다른 자유로운 미국 땅에서 제약 없이 모든 기록을 자유롭게 수정 보완한 “느시(1.2권 문예당)”라는 이름의 새로운 책을 2000년에 펴냈다며 보여준다.
그의 귀환을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박정희 전대통령의 빛 바랜 친서가 벽에 걸려있는 그의 사무실을 들어섰다. 수의사 출신인 태권도사범 박 관장의 도장 사무실이 그곳이다.
수의사로서 1971년 워싱턴 DC로 이민을 온 그는 다음해에 수의사가 아닌 태권도 사범으로 도장을 개설한 이래 8년간 도장을 운영하다가 80년에 플로리다로 이주해 지금까지 탬파에서 J. Park Tae Kwon Do & Hapkido Center라는 본관에 이어 플로리다주에만 10개의 지관을 관할하고 있으며 심사 때에는 현장에 나가 심사를 한다고 한다. 매년 봄, 가을 두 차례 J. Park National Taekwondo Tournament도 연다.
고향 대구에서 중고등학교를 거쳐 경북대학교 수의학과를 졸업(1966)한 태권도 공인 9단에 합기도 9단이다.
그는 위의 두 저서 말고도 87년에 영문판 태권도교본과 95년에 역시 영문판 합기도교본을 서울의 청맥출판사에 의해 출간한 바 있는 5권이라는 적잖은 저서를 펴낸 저자이다.
영덕 대게로 유명한 경북 영덕에서 태어난 1942년 생으로 현재(2003년 3월) 플로리다한인회연합회 회장직을 맡고 있으며 서부플로리다한인회장은 4년간을 중임하기도 했다.
재임 중의 보람으로써는 지난 7월 1일 탬파컨벤션센터에서 한미동맹 50주년과 미주이민 100주년을 맞아 한국정부에서 미국과의 우의를 돈독히 하기 위해 파견한 서울시립무용단과 국기원 태권도 시범단 공연을 주관해 성공적으로 끝낸일과, 서부플로리다 한인회장 당시 매년 국제민속박람회에 한국을 대표해 참가해 주류사회에 한국을 알렸다는 기쁨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전참전용사기념회에도 깊숙이 참여해 한국공연 지원 등 아낌없는 협조를 하고 있다는 것이 주위의 평이다.
현재 탬파한인연합감리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그는 조부님을 자랑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는가 하면 영덕군 최초의 교회 장로였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그는 자신도 대대로 내려온 기독교집안의 장손으로 모태신앙인 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도 부산동아대학교의 외래교수로 체육대학 무도학과에서 1년에 네 번씩 강의를 하고 있고 또 애틀랜타 신학대학의 체육학교수로 체육선교학 박사 과정 중 지난 2003년 6월 15일 동 대학으로부터 체육선교학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월남전에선 죽음을 담보 당했고, 수의사로 이민해 태권사범으로 사회의 한 디딤돌이 돼 있는 그의 인생역정을 「드라마」라고 이른다면 비약일까.
그의 소설 <느시>는 영문 변역 후 시카고소재 SMS Productions 제작사에서 영화화하기 위해 계약을 체결한 상태라며 2004년 봄부터 촬영에 들어갈 계획이라고 한다.
——————————————————————————————————
서진희

2세 교육이 천부의 책무
문학-미술에도 남다른 일가견
성탄절 전야로 온 세상이 들떠있던 밤, 1942년 12월 24일 서울에서 출생한 그녀는 꿈 많은 문학소녀시절을 거쳐 한양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남녀공학이 싫어’ 다시 숙명여자대학교로 옮겨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전공과목이 그러했듯 플로리다 한인사회에서 그녀의 활동영역도 다분히 외교적인 측면이 많다. 무척 바쁜 그녀를 붙들고 겨우 인터뷰 할 시간을 빼앗을 수 있었다.
대학시절 국영방송 KBS에서 2년간을 근무하던 도중 그는 1972년 청운의 꿈을 안고 미국유학 길에 오르는 행운을 잡는다.
University of Tory Alabama에 수학(修學)시절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한 남학생의 프로포즈로 재학 중인 유학생 신분으로 결혼을 했다.
그리고 낳은 두 아들, 30세의 큰아들 Allen은 어느새 미 연방정부 공무원으로 자리 매김을 했으며 대학시절 풋볼선수로 활약했던 스물 세 살의 둘째아들 Anthony도 현재 대학원생의 신분이다. 어느새 그렇게 자랐는지 모를 정도라며 웃는 그녀가 가정에 머무는 주부로 안주하기에는 세상이 그리 한가하지 않았다. 눈을 뜨고 사방을 한 바퀴 둘러보면 자기를 필요로 하는 곳이 수없이 많았다. 특히 동포사회가 그러했다. 그래서 그는 나섰고 힘껏 뛰었노라고 자부한다.
1980년부터 현재까지 힐스브로 카운티 교육청에서 교육문화 전문교사로 활약하고 있는 그녀는 교육전문상담요원으로 힐스브로 카운티 복합문화 커뮤니티의 Tesk Force Community 멤버인가 하면 96년에 설립한 탬파 통합한글학교에 5년간 초대에 이어 2대까지 교장을 역임했으며 이사장으로도 2년 동안을 학교지원을 맡은 사람으로서 맡은 바 소임을 다했다. 또, 86년부터 현재까지 근 22년간 힐스브로 카운티 교육청 소속의 한국어 번역과 통역을 전담하면서 동포사회의 영어 난해(難解)권에 속하는 사람들을 위해 지난 19년간 연방법원과 지방법원에서 현재까지 봉사하고 있다.
21개에 달하는 플로리다 전역의 한인학교 협의회의 회장을 98년부터 3년간 역임 후 2000년부터 현재까지는 미국전역을 총괄하는 재미(在美) 한인학교협의회의 이사와 기획위원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으며 모국공관측의 요구에 의해 제9기 평통자문위원직도 맡고 있다. 종교는 침례교인으로서 현재 외국인침례교회에 오래 전부터 출석하고 있으며 교육에 관여한 그의 업적을 기리는 감사 공로패도 다양하다.
98년의 교육 봉사상을 위시하여 다음해에 한인 커뮤니티가 수여한 교육문화상, 98년에는 교육부 장관의 감사장에 이어 현지 교육청으로부터 교육상을 수상했다. 2000년에는 조중표 총영사로부터 총영사감사패를 받았으며 2002년에는 한인학교협의회에서 수여한 공로패에 이어 2000년과 2002년에도 탬파 통합한국어학교로부터 2회에 걸친 공로패를 받았다.
상패와 상금이 함께 걸렸던 미주중앙일보의 미주 전역을 상대로 한 수기공모에서 “10대의 갈등”이라는 작품을 제출하여 우수상에 입상했는가 하면, 본인의 유학 생활 체험기를 “흙의 색깔”이라는 책으로 서울에서 출간하여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이 작품을 2002년에는 “Color of Land”라는 영문 소설로 출판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한 그녀는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어 St Josep Hospital Art centre에서 열렸던 꽤 규모가 큰 미술전에서 특선의 기쁨을 안기도 했다. 이 후 그녀는 여러 차례 개인 미술전을 열어 그 수익금 모두를 어린이 치료를 위해 기부하여 많은 이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2세 교육에 관한 한 마당발로 불리는 그녀의 역할은 아직 끝나려면 멀었다. 어쩌면 더 바빠질 것으로 보이기에 동포사회에서의 그녀의 존재가치는 여전히 남다르다.
신대용

미국 방산업계에 각인 된 큰 이름
동포사회에도 힘 나누는 독실한 크리스천
동아일보의 특집 “세계 속의 한국인”에서 워싱턴 특파원 발 기사로 그를 일컬어 “무일푼 유학생에서 방위산업체의 거부”라고 특별인터뷰를 게재했을 때 국내외의 한국인들은 무한한 호기심으로 그의 발자취를 숨죽이며 읽어내려 갔다. 그만큼 위력을 발휘한 기사 내용이었다.
그 글을 읽어본 기자도 언젠가는 한번 만나서 성공의 비결을 인터뷰하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미국방위산업체 DSE의 대표인 그를 만나기 위해 그가 출석하는 교회로 주일에 찾아가 보았다. 친교실에서 깍듯하게 대하는 그 성공한 사람도 그날만은 장로님으로 주일예배를 전후해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한 평범한 크리스찬, 그 자체였다.
이렇듯 양순한 인상의 인물이 어떻게 그 거칠고 척박한 군수시장에서 거부(巨富)가 되었을까 하는 호기심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보았다.
신씨의 방산업체는 미군에 각종 탄약과 미사일부품을 만들어 납품하는 회사다. 91년에 있었던 걸프전에서 난공불락으로 불리던 이라크의 지하벙커를 미군들이 부수면서 그 속에 감춰져 있던 모든 것들을 한 번에 요절을 낼 수 있었던 것도 알고 보면 신씨의 창의력과 집요한 집념에서 나온 작품인 신형무기 탓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의 소유 방위산업체는 공장만도 6개에 달한다. 이렇게 미주 이민생활에서 크게 성공한 그도 방위산업에 손을 대기 전까지는 보통 이민자들이 다 겪었듯 안 해본 것이 없다.
그러나 어느 날 그의 근면 성실을 눈여겨보던 폴먼이라는 변호사로부터 자신이 주주로 있는 어느 자동차 부품업체의 공장을 인수해보라는 권유에 못 이겨 ‘벌어서 갚겠다’는 조건으로 덥석 인수를 했다. 그러나 80년대 초 때마침 불어온 미국 자동차산업의 불황에 봉착해 진퇴양난 속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다시 걸려온 폴먼의 전화는 방위산업으로 전환해 보라며 새 대통령 레이건의 등장과 함께 미국의 대외정책은 ”힘을 통한 평화“라면서 방위산업체의 전망을 알려주며 강력히 권했다. 그러나 생소한 분야인 방산업체에 뛰어들기는 했어도 견적서 하나 작성할 줄 몰랐던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앞길이 캄캄하게만 느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만은 좌절이나 실패는 없다며 궁리 끝에 방위산업체 운영에 경험 있는 유능한 사람들을 구한다는 신문광고를 냈으며 그때 찾아온 독일계 미국인과의 만남은 그를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을 만들어주는 계기가 됐다.
세계 속에 한국인으로 급부상한 신대용 사장, 1944년 8월 15일 생으로 산촌마을인 경북 청송에서 태어났으며 대구의 사립명문 계성고등학교를 거쳐 연세대학교를 졸업했다. 우여곡절 속에 홀로 서기에 성공해 남부럽지 않은 부와 명예를 함께 가진 그답게 도미(渡美)후에 받은 상만 봐도 그의 능력은 주류사회의 충분한 검증과 평가를 거친 듯 하다.
미(美)국회하원에서 주는 American Flag라는 권위 있는 상을 받았는가 하면 미국 속의 소수민족으로서 뚜렷한 공로나 업적을 세운 사람을 엄선해서 수여하는 <소수민족 기업인상>도 받았으며 한국으로부터는 통상부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사업으로 성공한 후에는 지역 동포사회에서의 활동도 남 못지 않게 해냈다. 서부플로리다한인회장을 역임했으며 플로리다한인연합회 이사장과 미주한인총연합회 부회장 및 평통자문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주류사회에서도 그는 국제교육재활재단 이사와 콜럼비아 신학교 이사를 지냈으며 주지사가 임명하는 아시아․아메리카기업자문위원도 역임했다.
그리고 한미방위정상회담의 미주대표단의 일원이기도 했으며 미하원공화당 기업자문위원 및 플로리다 명예위원장을 맡고있으며 중소기업청 플로리다지역 대표 3인 중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고 있다.
또 탬파한인장로교회의 시무장로로 교회의 기둥으로써의 큰 역할을 충실히 해내며 또 성도들의 믿음의 표본이 되는 겸손과 사랑으로 성도들을 항상 감싸안으며 믿음의 선배로서 부인과 함께 성가대 활동도 열심을 내 하고있다.
KBS TV 탈랜트 출신인 부인 김인숙 씨와의 사이에 지혜, 성혜, 미혜로 불리는 딸만 셋을 두고 있는 착실한 크리스찬 가정의 가장이다.
신범수

농가특수의 원조 ‘양송이 아버지’
흙을 믿고 살아온 영원한 농업인
“신범수”하면 아무도 누군지 몰라도 “양송이 버섯”하면 누구나 그를 안다. 한국최초의 양송이 재배로 쾌거를 올린 신범수 씨, 그는 지금 양송이 버섯이 아닌 이민현장의 민속단과 한글학교 학생들이 양송이 자라듯 쑥쑥 커 가는데 보람을 느끼고 산다.
전북대학교 농과대학을 1951년에 졸업한 그는 모교의 대학원을 마치고 1954년에 농림부의 공무원 공채시험에 합격하여 공무원으로서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한국 최초로 양송이 재배에 관한 연구활동에 몰두한다. 어느 정도 연구진척의 성과를 느끼기 시작할 무렵, 그는 공무원으로서의 자신의 꿈을 펼치기에 한계를 느낀 나머지 미련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와 1971년 전북 옥구군에 부지를 마련해 버섯 재배와 가공을 전문으로 하는 「대당농장」을 창업한다. 그러나 창업으로 숨 가쁘던 시간을 추스릴 새도 없이 전혀 예측하지 못 했던 저렴한 가격의 중국산 양송이들이 대거 수출되면서 양송이와의 첫 사랑은 6년여만에 여지없이 박살났다. 그러나 양송이에 대한 그의 열정을 하늘만은 깊이 알아 줬나보다. 그의 기술과 사업으로서의 가능성을 타진한 당시 국제그룹이 그를 영입해 산하 자회사에서 부사장의 직책을 맡기게 된다. 당시 세계적으로 양송이 재배에 성공한 네델란드의 Dutch시스템을 도입하기 위한 수입과 기술이전의 책임자로 기용한 것. 그의 승부욕이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이번엔 해낸다. 전북 익산에 농장을 짓고 본격적인 재배에 들어가 수도생활에 가까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1년 반만에 재배, 생산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질투의 여신이 그때쯤 또 잠을 깬다. 국제그룹의 와해! 양송이와의 두 번째 서러운 이별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버섯종류의 재배과정과 학술적 이론을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회 등을 열기 시작한다. 버섯재배에 관심 있는 사람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기 시작한 데 힘입어 농가소득 증대를 위한 “최신 버섯재배기술과 경영”이라는 책자를 85년 2월에 발행했다. 특히 양송이 등 특용작물 재배 연구가인 그는 축산이념에 관한 한 한국 내 최고 대학인 건국대학교에서만 강의를 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여러 번의 버섯재배, 가공연구를 발표했던 그답게 한국통조림수출조합 부 이사장과 한국버섯생산협회 대의원회장을 역임했다. 구미각국 버섯재배 및 가공업계 현장견학 등 다채로운 국내에서의 경력을 접고 1985년 12월 뉴저지를 향한 미국이민 길에 오른다. 뉴저지에서 몇 년간 「미국 익히기」의 세월을 접한 그는 91년 3월 탬파로 자리를 옮기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다. 탬파 최초로 한인식품인협회를 창설하여 현재 상임고문으로 협회의 실질적 발전을 위해 세월도 잊은 채 불철주야 뛰고있다. 서부 플로리다의 노년층 친목단체인 「송학노인회」의 회장을 96년과 97년에 역임하면서 동시에 플로리다한인노인연합회를 창설, 초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어 송학민속단을 만드는 한편 1년 후 독립플로리다민속단을 조직 약 70여 회의 공연기록을 갖는 민속단으로 키워냈다. 현재도 그 단체의 상임고문직을 맡고있는 것은 물론 당시 여러 곳에 산재해 있던 한글학교를 통합해 탬파통합한글학교를 세우는 산파역을 훌륭히 치러 냈다. 지금도 이사 겸 고문으로 활약하고 있는 그는 키스톤한인침례교회의 집사직을 맡고있는 착실한 크리스찬이다. 그의 “이모작 인생”이라는 이민수기는 척박한 이민생활을 하고 있는 수많은 동포들에게 꿈과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는 따뜻한 저서로 현지 동포언론에 게재되어 많은 감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부인 김상원 씨와의 결혼60주년기념잔치를 가족끼리 2003년 1월 10일에 치루었다고 말하는 신 씨. 큰아들 상균 씨도 현재 서부플로리다 식품인협회 회장을 맡고있으며 고등학교 전교 1등 졸업으로 명문인 Pen에 재학 중인 큰손주와 미 해군에 현역으로 복무 중인 둘째 손주를 자랑하며 3남3녀의 대가족 가장으로서 오늘도 그는 아름다운 수채화 같은 삶을 호흡하고 있다.
오명근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 의리의 무도인
태권도인으로는 처음 사마란치 올림픽위원장 공로패 받아
한국에서 도장이나 사업을 하다가 실패를 한 후배들 사이에서는 예사로 나오는 말이 있다. 바로 “플로리다나 가야겠어”라는 이 말은 오 관장이 이곳에 있기에 회자(膾炙)되고 있는 표현이라는 것이 그를 잘 아는 태권도 사범들 사이의 공통된 의견이다.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뭔가 잘 풀리지 않아 어렵게 된 측근이나 동료들이 그를 찾아오는 회수는 빈번하다. 그 만큼 그는 이 사회에 특히 후배들 사회에서는 한마디로 “의리의 사나이”로 통한다. 본관을 비롯하여 세 곳의 태권도장을 가지고 있는 그는 청과상을 함께 경영하고 있다. 도장 외에서 버는 수입, 그는 이곳에서 버는 적잖은 수입을 그를 찾아오는 어려운 후배들에게 쓰는가하면 그냥 놀고 먹지는 말라면서 그곳에 일거리를 만들어 줘 이역생활에 다소나마 취미를 붙일 여유도 만들어주는 따뜻한 마음에서 나오는 넉넉함이 있다.
그는 늘 이러한 마음으로 건강한 이민생활을 위해 지난 20여 년간 하루 16시간씩 성실과 근면으로 열심히 일한 결과 현재 오스 태권도(Oh’s Teakwondo)도장 본관과 청과상 건물 등 세 곳의 건물을 소유하고 있는데 주위의 그를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의 피와 땀으로 이뤄낸 결정체라며 그를 평범한 이민자의 성공적인 모델이라고 말하고 있다.
청도관 9단인 그는 국기원의 공인8단으로써 한때는 플로리다 무술 사범협회의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공수특전단 소속의 태권도 교관으로 월남전에 참여한 그는 3년간의 월남생활을 포함하여 10년 세월을 특전단 태권도 교관으로 복무 후 제대를 했다. 군 시절 각별한 관계의 상관이었던 고 우종림 장군의 배려로 1975년 중남미의 볼리비아에 태권도 사범자격으로 파견 나간 것이 오늘의 미국생활과 연결고리가 되었다는 그는 볼리비아생활 3년을 청산하고 미국(뉴욕)으로 온다. 그리고 1984년 아름답기로 유명한 탬파의 외곽도시인 센 피터스버그에 정착한 후 태권도 보급으로 국위를 선양하는데 한몫 톡톡히 했다.
태권도를 통한 무도정신으로 화합과 발전에 기여한 오 관장의 공을 확인한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사마란치 위원장은 2002년 어느 날 뜻밖에도 그에게 공로패를 수여했다. 전 세계에 산재해 있는 태권도 사범들 중에서 유일하게 받은 사마란치 위원장의 공로패. 정말 무게 나가는 큼직한 상패를 보고 필자가 물어봤을 때 그는 엉뚱한 답을 한다. “잘못 온 거겠지요, 제가 받을 상패는 결코 아닙니다.”라며 겸손한 말을 한다. 누가 추천했는지 참으로 잘못했다면서 정색을 하고 말하는 그는 “저보다 훌륭한 태권도인들이 어디 한두 분입니까?”라며 자기가 받기에는 너무나 벅차고 거창한 상패이지만 받은 이상 도장에 이렇게 걸어 놓았노라며 연신 겸손해한다. 그를 잘 아는 한 후배사범은 오 관장이 연령이 비슷한 동료관장들의 행사에는 바빠서 별로 참석을 못해도 1.5세나 2세 사범들이 치루는 태권도 관련행사에는 빠지는 법이 없다며, 한 예로 그가 매년 주최해 1천여명 이상의 태권도 선수들이 참석하는 ‘대통령컵 태권도 대회’ 에 미국의 태권도를 이끌어 갈 차세대 한인 태권도 후배사범들이 대거 참석해 대회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만 봐도 후배사범들의 그에 대한 인기를 짐작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한다.
부인 서명자 씨와의 사이에 2남을 두었으며 태권도 4단인 장남 성환(25) 군은 가업이자 국기인 태권도 사업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을 준비기간과 수습을 마친 상태로 이젠 세 군데의 도장을 거의 차질 없이 총괄하며 아버지의 후광과 본인의 빈틈없는 노력으로 도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둘째 아들 두환 군은 올해 열 일곱 살로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다.
본책자 발행의 취지를 설명하고 몇 달을 설득한 끝에 힘겹게 인터뷰를 할 수 있었던 사람 오 관장. 인터뷰를 고사하는 그의 변은 일관되게 “부족한 사람”이라는 겸손이었다. 의리의 무도인이자 후배들 사이에서 ‘형님’으로 통하는 사나이라 그런가 인터뷰 내내 대부분의 공을 태권도 선배와 동료 관장들, 그리고 후배사범들에게 돌렸다.
이렇게 힘들게 마련한 인터뷰 중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고서 그는 “태권도 사범인 후배가 한 명 와 있는데요. 영어가 통하지 않아 태권도 사범으로서 당장은 활동을 할 수가 없어 이민생활을 배울 수 있도록 직장을 알아 봤는데 그곳에서 연락이 왔다“며 휴대폰을 끄자마자 가봐야 한다며 주차장으로 가 벤츠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창문을 열고는 다시 한 번 이 책에 안 나오도록만 해준다면 정말 톡톡히 한잔 살 건데… 하는 여운을 남기며 자리를 떴다.
멀어져 가는 그의 자동차를 바라보며 선배 무도인들을 존경으로 대하고 동기들에게는 의리의 사나이로 후배 무도인들은 사랑으로 보살피는 그의 겸손과 의리가 진정한 무도인의 정신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필자의 마음에 젖어들게 하는 기분 좋은 인터뷰였다.
윤대일

무료시술 마다않는 ‘탬파의 허준’
남을 도울 때 가장 행복해 하는 마음의 소유자
북한에서 태어나 남한에서 자랐고, 미국에서 마지막 여생을 보내는 그의 돌고 도는 물레방아 같은 인생유전에 걸맞게 그가 가졌던 꿈도, 그가 거친 직업도 참으로 다양하다. 엔지니어의 꿈을 안고 우선 기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다며 서울공고를 들어간 그는 고3 때부터 엔지니어 분야와는 무관한 문학서적에 심취하여 시인이나 작가가 되겠다며 변신(變身)의 장을 연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동국대학교 문리대 국문과였다. 그러나 졸업까지 참지를 못한 그는 문학서적을 거두고 다시 별을 향한 꿈을 안고 육군간부후보생으로 들어가 소정의 교육을 마친 후 육군소위로 임관하여 한참을 군 고급장교로 전후방을 오가며 근무하던 중 제대를 한다. 군복을 벗고는 무도인의 길을 걷고 싶은 욕망에 합기도장에서 모든 것을 잊고 거의 생활하다시피 매달린 그는 2단이라는 벨트를 짧은 시간에 손에 넣고 다시 도장 문을 나선다.
이어 한의학의 신비함을 우연히 느끼고 그는 한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서울에서 한의업을 개업하느니 보다 넓은 무대에서 꿈을 펴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 뉴욕으로 온다. 뉴욕에서 다시 한의학을 공부한 그는 미국전역을 커버하는 라이센스인 NCCA를 딴 후 다시 죠지아 주 정부에서 라이센스를 받고 기왕이면 [따뜻한데서]라는 생각으로 플로리다를 향해 자신의 말대로 마지막 이사보따리를 쌌다.
그때가 96년 2월, 인구의 급속한 유입으로 자꾸만 늘어나는 탬파에, 특히 고령화 추세에 들어서는 동포사회의 노인인구 분포로 보아 한의원의 필요성이 있음을 느끼고 한의원을 개원한다. 탬파의 유일한 한의사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동포사회의 건강을 책임지는 파수꾼으로 노인들을 위해 무료 진료로 봉사함은 물론 많은 헌신을 해 주위 노인회원들의 칭송을 받았다.
1985년도에 이민자로서 미국 땅을 밟은 그는 황해도 평산에서 39년 2월에 태어났다. 대주주였던 부모들 덕분에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토지개혁으로 땅을 몽땅 빼앗긴 그의 가족들에게 공산정권은 그것도 모자라 원산 쪽으로 이주하라는 강제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원산 쪽으로 가느니 목숨을 걸고라도 남하(南下)하자는 가족회의의 결과에 따라 칠흑 같은 야반을 이용하여 얼어붙은 임진강을 뒤꿈치를 든 채 숨죽이며 건넜다고 한다. 9살 어린 나이에 겪었던 살을 애이는 그 추위 속에 강행된 가족들의 죽음이 엄습하는 적막한 밤 행렬은 지금 생각해도 한 편의 드라마 같았다고 당시를 술회하는 윤대일 원장. 탬파에 병원을 개원했지만 탬파 내의 교회초청, 한국유학생들 및 지역주민들의 초청으로 건강진단을 무료로 하는가 하면 한인들이 모여 사는 소규모 도시의 한인들로부터 초청을 받고 무료순회진료도 수없이 한 사람이다.
노인들의 건강문제를 돕다보니 노인들의 친목단체인 탬파송학노인회로부터 사무총장을 맡아달라는 청에 못 이겨 장기간 사무총장도 했던 그는 한겨레저널 등 현지동포언론에도 건강상담을 위한 칼럼을 많이 집필하기로 유명하다. 그리고 민족문화창달에 작지만 일익을 담당한다는 뜻에서 민속단의 창단 주역으로 힘껏 도왔는가 하면 지금도 아낌없는 지원을 하고 있으며 도움이 필요로 하는 곳엔 언제나 기꺼이 참여한다. 그 스스로가 기자에게 한 말 중에도 “내가 남을 도울 수 있는 길이 뭔가를 늘 골똘히 생각하는 습관이 있다”고 했다.
그는 이 말을 실천이라도 하듯 동포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이 겪은 쓰라린 고통의 경험담도 과감히 신문에 기고를 하여 알리는 등 동포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있으며 또 한의학에 대한 동포들의 잘못된 고정 관념이 깨어지길 바라는 뜻에서 한의학에 대한 계몽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그는 또 기자에게 현대의학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에도 한의학 특유의 처방비법이 있다면서 몇 가지 사례를 자세히 밝혀주기도 했다.
활명당 윤대일 한의원장은 탬파제일장로교회의 집사로서 교회 봉사에도 적잖은 역할을 하고 있으며 현재 한국통합한글학교와 탬파한인회의 이사로서 2세들의 모국어교육의 지원 육성과 함께 지역한인사회 발전에도 기여하는 바 크다.
이건국

동포사회의 오늘을 용접한 정착 안내꾼
땀방울로 일궈낸 아메리칸 드림의 완성
이건국, 그를 일컬어 탬파의 한인들은 “정착의 길잡이” 혹은 “정착의 대부”라고 까지 부른다. 그만큼 그는 플로리다 땅 탬파로 몰려드는 새로운 이민자들에게 길잡이라는 꼭 필요한 사람으로서 취업을 알선해 주는 무료복덕방의 역할을 훌륭히 실천해낸 사람이다.
1977년, 살기 좋은 플로리다 탬파에 도착했을 당시 그에게는 시간당 2불 30센트 짜리 하수도시설 공사장의 막노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술을 배울 것도 없고 장래가 내다보이지도 않는 그때 그 일을 가리켜 그는 “흙 파서 먹고 살던 때”라고 아픈 회상을 한다. 그래서 뭔가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에서 정부 산하 직업훈련학교를 찾아가 간단한 테스트 끝에 6개월 코스의 용접기술을 3개월에 끝내고 그 무렵 탬파 외곽의 이름 있는 조선소(造船所)인 Misners Industrial 이라는 바지선(무동력으로 인양선에 의해 끌려가는 화물선) 제조전문업체에 입사한다.
그리고 입사 반년만에 그는 회사측으로부터 전적으로 신임을 받은 나머지 슈퍼바이저라는 파격적 대우로 험한 일손에서는 일단 손을 떼고 감독일에만 전념하기 시작한다. 그때 반년간의 현장에서 작업하였던 상황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생각해 보십시오 차라리 추운 곳이라면 몰라도…. ”라고 운을 띄운 그는 사철이 따뜻한 플로리다의 기후 때문에 피서객과 관광객이 모여들지만 <플로리다와 용접>을 한번 생각해보라고 한다.
그 더운 플로리다 여름 날씨에 용접만해도 한증막이나 다름없을 텐데 그것도 배 제일 밑바닥 몸 하나도 겨우 들어가는 후미진 곳에서 가죽으로 된 두꺼운 용접 자켓과 장갑을 끼고 일을 할때면 온몸에 흐르는 땀방울은 그곳이 바로 한증막이요, 염천지옥이었음을 말해준다며 용접봉과 함께 화로(火爐)로 규정되는 고통스러웠던 시절을 얘기한다.
그러면서도 항상 주위에 일자리 없는 동포들을 위하여 손수 기술을 가르치고 배우게 해 자신의 소개로 웰딩(용접) 기술자로 취직까지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49명 중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도중탈락 없이 그 어려운 작업환경을 견디고 이겨낸 나머지 최고의 용접 기술자로서 일을 했고 그 사람들이 오늘날 탬파 한인사회 구석구석에서 중요한 자리를 지키며 활동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흐뭇하게 보람을 느낀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슈퍼바이저가 된지 7년 만인 84년 8월 그는 그간 저축한 돈으로 개인사업을 하기 위해 직장에 사표를 낸 후 현지 흑인주민을 상대로 한 그로서리 상점을 오픈했으며 이어 한인으로서는 최초로 미용재료상인 뷰티서플라이를 개점하여 성공하기에 이르렀고 자녀들에게 가업으로 이어받도록 한 후 자신은 은퇴하여 취미생활로 남은 여생을 즐겁게 보내고 있다.
낚시도 할 수 있는 아름다운 힐스브로 강(Hillsborough River)을 끼고있는 집은 아름다운 정원을 가진 꼭 별장지대 같은 곳에 위치해 있어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아름다운 외형도 그렇지만 집에 들어섰을 때 꼭 박물관이나 골동품 전시장에 온 착각을 하게 만드는 그의 골동품 소장품들은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하다. 수시로 하는 세계여행 중에 취미로 모은 것들이라고 하는 골통품들은 100년 넘은 Victor유성기(축음기)를 비롯해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전화기 역시 100년이 넘었다고 한다.
이외 수동사진기를 비롯해 아주 옛날 것으로 보이는 스키장비와 자동차 번호판, 호미, 마차바퀴, 전등대용품, 그리고 1865년에 제작되었다는 최소형 풍금 Roller Organ도 기자의 발과 시선을 꼭 붙잡는다.
1944년 백마강의 지류가 유유히 흐르는 충남 부여에서 태어났으며 부인 이재은 씨와 2남1녀를 둔 이민자들의 정착대부였던 이건국 씨는 여유 있는 생활 속에 세계여행과 골프 등으로 육신의 건강을 다지며 성공한 반열에 드는 행복한 노후생활을 보내고 있다.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한 사람들 중의 하나로 탬파제일침례교회에 출석하는 세례교인이다.
집 뒤로는 강이 흐르고 집안에는 진기한 골통품으로 가득한 아담하고 그림 같은 집에서 차 대접을 받으며 가진 인터뷰를 끝내고 나오려니 왠지 기자의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아쉬움이 마음에 가득하다.
임승우

이민100년 미주 한인사의 2번째 판사
초등학교 때 이민-2세 성공사의 산 표본
“임승우 판사 임명식 성대히 치뤄”라는 제하의 플로리다를 대표하는 한국계신문인 한겨레저널(발행인 : 이승봉)의 2002년 6월 28일자 특종보도는 즉각 한국의 연합통신의 전파를 탔으며 각 신문과 방송이 다투어 플로리다 발 연합통신으로 보도했다. 플로리다 최초의 한인검사를 역임했으며 역시 플로리다 최초의 한인판사가 탄생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묵직한 기사거리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플로리다뿐 아니라 이민100주년을 맞는 미주한인사회에서 두 번째의 판사로 탄생한 임 판사가 살고있는 플로리다 동포사회는 그야말로 축제분위기 그 자체였다. 우선 그 날자 한겨레 저널의 기사를 옮겨본다.
“임승우 판사 임명식이 21일 오후 4시부터 크리어 워터 법원 Criminal Justice Center에서 40여명의 현역판사 및 법조계 관계자들과 30여명의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동포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거행됐다.”고 리드를 잡은 후 이날 임명식 광경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임명식은 성 루가 성당의 Ron Poirie 신부의 개회 기도로 시작, 피날레스티 카운티 David A Demers 판사장과 Henry J Andringa 법원장이 그 자리에 배석한 현직판사들에게 임 판사를 소개한데 이어 플로리다 주변호사협회 회장의 축하인사로 이어졌다”고 상세히 소개했다.
그날 화제의 인물로 각광받았던 임 판사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부모를 따라 미국 땅에 이민을 왔다. ABC부터 배우며 마이애미 초등학교 5학년에 편입, 미국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한 그의 학교생활 적응도는 그 속도에서 남달리 빠른 모습을 보였다. “지켜보았을 뿐 일체의 간섭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인터뷰에 배석한 부친 임춘호(67세 : 마이애미 거주)씨의 말이다. 심지어 상급학교로 진학할 때를 맞추어 갖는 그의 졸업식장에도 단 한 번 참석하지 못했던 것이 지금 생각하면 미안하고 아쉬움도 있다고 말하는 임춘호 씨는 물론 바쁜 생업에 시달리다보니 시간도 넉넉하지는 못했지만 매사 자식 본인이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의도적으로 간여하지 않았다며 공부를 잘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을 뿐이었다며 미소를 띄운다. 그러므로 임 판사 스스로가 자신이 선택한 학업에 열중하여 오늘의 영광을 차지했다는 설명이 맞다.
판사 임명장을 받기 전에도 임 판사는 마이애미대학교 법대를 졸업하면서 사법고시에 합격한 후 1991년에 검사로 임명받아 피날레스카운티 검찰청에서 검사생활을 시작했으나 법조인이면 필수적으로 거치고 싶다는 뜻에서 이어 변호사의 길을 선택했다.
그후 1995년부터 피날레스카운티와 페스코카운티 등에서 법조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체구가 유난히 큰 그에게 운동을 했느냐고 물었을 때는 서슴지 않고 유창한 한국어로 내력을 이야기한다. 마이애미에는 지역 특성상 남미권 학생들이 많다보니 그들과 함께 한국식 축구를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대학입학과 동시에 축구가 취미생활로서의 스포츠가 되었으며 학교운동장에서 늘 눈여겨보았던 미식축구(Football)를 시작한 후로는 바쁜 학업 중에서도 고등학교시절에는 대표선수까지 했다고 한다. 아마추어선수이기는 했지만 레슬링실력도 수준급이라는 그는 만능스포츠맨이다.
현재 Pinellas County 의 판사로 재직 중인 그는 아버지 임춘호 씨와 어머니 임희자 씨의 사이에 외동아들로 1963년 4월 7일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했다. 그리고 92년 12월에 결혼한 부인 임현경 씨와의 사이에는 1남2녀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법조인으로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는 부모님들의 무언(無言)속에서 나오는 자식사랑의 힘도 컸지만 아내 임 씨 또한 인생의 반려자로서 지금 이 순간 자기가 있기까지 아낌없는 내조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해 준 것에 항상 고마워하며 사랑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주말이면 미국교단의 침례교회를 나간다는 그는 가족 모두가 신앙생활에 충실하고 있다는 점도 자신에게 큰 힘이 되노라고 힘주어 말했다.
설날 민속 대잔치가 한참 무르익어 가던 행사장의 2층에서 임 판사와 필자는 2층 별실로 옮겨 인절미를 먹으며 아래층에서 울려오는 꽹과리 소리 속에 짧은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법을 다루기에 그러한지 인터뷰 도중 그에게서 느낀 품성은 정중함 그리고 근엄함이었다.
장익군

21세기 최대역점인 환경사업의 선구자
차세대 사회진출의 막강한 통로
1955년 3월 27일에 전남 광산군에서 출생한 그는 광주고등학교와 전남대학교 국사교육과를 졸업한 뒤 ROTC장교로서 육군소위로 임관되어 강원도 홍천의 일선소대장으로 발령이 난다. 그리고 그는 눈 덮인 능선을 누비며 국토방위 임무를 마치고 중위로 전역, 고향으로 내려온다. 잠시 교직에 근무하던 중, 다시 공부를 하고 싶었던 그는 휴직을 하고 모교의 대학원 사학과에 등록하여 당시 전공자가 드물었던 한중일 3국 비교문화사를 전공하던 사학(史學)통이다. 학업도 군복무도 마쳤으니 이젠 결혼을 하라는 집안의 재촉이 심할 무렵 공교롭게도 양가의 고모부들이 나서서 중매결혼에 골인한 그는 미국으로 가서 좀 더 공부를 하며 학문의 시야를 넓혀보겠다는 생각에서 도미유학 수속을 마치고 미국 땅에 발을 디딘다.
West Virginia University에 입학한 그는 새로운 도전의 자세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첨단과학을 목표로 삼고 공대에서 전기전자공학을 3년반 동안 전공한다. 이후 플로리다주에 있는 방위산업체에 엔지니어로 입사하여 경험을 쌓은 뒤, 다시 공해관련 환경설비 컨설팅회사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던 중 한국 측으로부터 소속회사 산하의 자체환경회사로 의뢰가 와 한국의 공해산업문제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Vulcan(소각전문회사)의 한국담당이 되어 한국중공업 등에 기술이전 컨설팅을 했으며, 그 외 여러 환경설비 신기술들을 한국에 소개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특히 도심에서 진행되는 불편한 상하수도 공사에 있어 신기술인 비굴착 보수공법(원격조정 로보트)을 한국에 소개하고 다양한 기술들이 정책적으로 정착하는데 필요한 기술 및 자료제공 시찰알선 등으로 모국 한국에 기여한 보람을 그는 소중히 다루고 있었다.
그후 자영업을 하겠다는 결심이 서면서 그는 탬파에 케미컬 수출을 목표로 하는 바우렉스 무역회사를 설립하고 사업영역 확장을 위해 뛰고 있으며, 2000년부터 현재까지는 환경 및 건강산업의 전망 등을 고려한 나머지 한국중외제약의 미국 중동남부지사를 설립하여 지사장으로 활동하고 있고, 2002년부터는 한방기능성 건강보조 식품회사인 인성내추럴 지사장을 맡아 지역 동포들에게 건강을 전달하고 있다. 또한 한인동포사회의 참여도 역시 상당히 높은 편이다.
여류변호사 김풍진씨와 함께 노인아파트 건립위원회를 창설했는가 하면 96년도에는 서부플로리다한인회장을 역임했으며 이어 미국 전역의 한인회 총연합체인 미주총연에 의해 차세대분과위원장을 맡았을 때는 차세대들의 주류사회 진출을 위한 노력에 일익을 담당했을 정도로 그의 수완과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이 중평이다.
한인회장 재임시, 20년간 지역 연례행사로 내려오던 다민족민속축제(SPIFF, 60여국가 회원국)에 처음으로 참여하여(96년도) 다양한 프로그램과 짜임새 있는 진행으로 단연 주목을 끌었던 바, 참가 첫해에 곧바로 민속축제의 이사국으로 선임되는 영예도 있었다. 또 6.25 참전용사들을 초청하는 행사를 처음 시작하여 돈독한 관계를 이루었는데, 이로 인해 한국참전용사회가 활성화되면서 플로리다에 6개이던 지부가 지금은 플로리다에 23개 지부로 늘어난 것도 보람이라 하겠으며, 그동안 이러한 행사가 해마다 발전하면서 이어져 내려온 것에 대해 후임 한인회장들과 임원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 함께 보람으로 여긴다 한다.
같은 전남대학교 출신(간호학과 졸업)인 부인 장현숙 씨는 University Community Hospital에서 심장수술실을 처음 조직할 때 간호과장으로 스카웃되어 10년간 탬파 최고의 수술팀으로 이끌었으며, 현재는 일반정형외과 수술실의 간호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특히 한국에서 찾아온 심장병 어린이들을 도와 건강을 회복하고 돌아가던 기억이 항상 보람으로 남아 있으며 남편을 위한 내조의 공 또한 크다고 한다.
2남1녀의 자제들은 모두 학생으로 재학 중이며 미국에 10개 주를 사업상 방문하는 관계로 한 달이면 반을 비워야 하는 생활에도 아내의 노력으로 균형을 잃지 않은 다복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다. 장익군 사장의 취미는 독서와 음악감상. 가끔 골프를 즐기기도 한다. 서부플로리다교회협의회 창설멤버일 정도로 교회생활에도 충실한 크리스천으로서 4대째 이어오는 장로교신자 가족이다. 미국에 뿌리내릴 한인이민교회의 성공적인 모델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가족 전부가 탬파한인장로교회에 출석 중이다.
전영호

‘태권도의 길’ 지키는 태권수호신
춘추고서에 익숙한 진정한 무도인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공부하는 무도인’이라고 했다. 그 말을 그의 도장 사무실을 들어가 보며 실감했다. 트로피 사이에 많지는 않지만 그의 일면을 보여주는 듯 한 책들이 차곡히 진열돼 있다. 보통사람들은 이해는 커녕 읽어내기 조차 어렵다는 <주역>을 비롯해 귀에 익은 이름의 철학책들, 맹자와 공자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그런 종류의 품격 있는 책들이 방문자의 눈길을 끈다.
그런가 하면 금년(2003년)부터 태권도사회에서 그를 호칭하는 직함도 달라졌다. 종전의 창무관 미주 총관장에서 전세계 창무관을 총괄하는 총재로 격상되었다. 인터뷰에 임하는 그의 자세도 남다른 데가 많았다. 무도사회에 한 축을 이룬 그답게 대화는 물론 모든 면에서 퍽 신중하게 처신하는 모습에서도 창무관 세계 제1인자로서의 품위를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조심스레 말을 고르면서 아주 조용하게 그의 태권도 인생과 철학을 들려준다.
태권도 본래의 정신과 개념에 변질이 왔다면서 태권도의 型은 무시한 채 오직 대회에서 매달을 획득하기 위한 대련에만 주력하는 잘못된 태권도문화를 개탄한다. 한국사범들 보다는 한국도장에서 배워 유단자가 되고 이어 자신들 스스로가 사범이 되어 도장을 설립하여 운영하는 외국인 사범들에게서 그런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말하는 그는 태권도에 있어 ‘형’이 가장 중요하며 어떤 이는 ‘형’ 하나를 개발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사람도 있었다고 힘주어 강조한다. 그는 태권도가 무도본래의 정신에서 벗어나 스포츠로서의 세계화에는 빨라졌지만 우리의 무도정신과 스포츠의 세계화는 별개의 문제라고 단언한다. 승자위주의 태권도는 그 자체가 이미 편법이라고 잘라 말하는 그의 태권논리는 책을 많이 읽은 사람 특유의 화술(話術)로 계속된다.
그는 태권도계를 대표할만한 전문지의 표지에도 나왔듯 <고암>이라는 별개의 무도를 개발한 장본인 4인 방 중 대표적인 한 사람이다. 창무관을 이끄는 총재로서 <고암>이라는 새로운 무도개발이 과연 바람직하냐는 필자의 질문에 그는 그렇지 않다는 명료한 답변을 한다. 그러나 태권도가 무도보다 스포츠화 된데 대한 무도화의 기존철학이나 개념의 변화를 안타까워한 나머지 자신을 비롯한 세 사람의 현역관장들이 머리를 맞대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1998년도에 창설했다면서 창무관 총재로서의 역할이나 기능에 비춰 오히려 할 일을 했다는 자신감을 피력한다.
탬파의 도심지 가까운 곳의 4차선 도로변에 위치한 단독 건물로 반듯하게 세워 놓은 본관 건물에는 넓은 주차장에 어울리듯 대형태극기와 성조기가 함께 이상기온으로 쌀쌀해진 찬바람을 타고 휘날리고 있었다. 도장규모와 제자 수에서 단연 플로리다 제일을 자랑하는 그곳엔 수많은 관원들이 땀을 흘리면서 운동을 하는 중에도 연신 훤칠한 키와 희끗희끗한 머리를 아무렇게나 손질한 채 도복을 입고 서있는 창무관 총재 전영호 관장의 표정을 살피곤 한다. 행여 잘못된 동작 등으로 호된 호령이 떨어질까 해서일까, 무척 근엄한 표정의 책을 읽는 사범 전영호 관장은 그날도 하루를 또 그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1936년 서울태생으로 1953년에 태권도에 입문한 이래 그 부단한 노력은 그를 정상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배출한 제자 중 유단자만 4천 명. 그는 태권도의 전신인 권법, 공수도부터 연마했으며 부산지역에 태수도 협회를 창설한 공로자이기도 하다. 주일이면 부인 전미영 씨와 함께 교회(침례교회)에서 하루를 보내는 착실한 크리스챤이다.
조재항

혈액-암 연구에 바친 평생의술
노인 무료진료에 앞장서
21세기의 난치병들은 예외 없이 혈액과 관련이 있다. 히포크라테스 선언을 외치며 인술의 길에 들어선 수많은 의사들 중 ‘석학’이라는 영광스런 지명을 받는 경우는 거의 혈액연구에 매진했던 것을 볼 수 있다. 혈액연구라는 게 논문 한편 발표하기 위해 부딪히는 연구가 아니며 일단 연구과제로 채택하면 자신의 일생을 바치겠다는 집요한 작심을 해야한다. 그렇지 못하면 아예 도전할 분야가 못 된다.
미국에 있는 한국 의사로는 극히 드문 혈액 및 암 전문의인 조재항 씨를 만난 것은 그래서 무척이나 반갑고 기쁜 조우였다. 그는 1942년 5월 1일 항도 부산에서 태어났다.
부산 앞바다의 비릿한 바다내음을 맡으며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청소년기에 접어들 무렵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이주했다. 당시 3대 명문고교의 하나인 서울고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깐깐한 서울수재들과의 성적다툼에서도 늘 앞켠에 자리를 잡았다. 엘리트코스라는 말이 있거니와 뛰어나게 명석한 두뇌를 무기로 그는 카톨릭의과대학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며 1968년 우수한 성적으로 학사모를 쓴다. 의대생 출신으로 병역의무를 완수하기 위해 그는 육군 군의관으로 입대해 대위로 예편한 후 1972년에 곧바로 도미(渡美)유학 길에 올랐다. 첨단의술을 섭렵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는 어떤 일에서건 목표는 신중히 정하되 일단 방향이 정해지면 초고속이다. 현지의 입학수속을 완료하고 뉴욕의 White Plains Hospital에서 인턴쉽을 마쳤다. 이어 뉴욕의 Winthrop University Hospital에서 내과 레지던트 코스를 일사천리로 끝낸다. 혈액과 암에 관해 University of South Florida College of Medicine에서 연구를 마친 그는 역시 University of South Florida에서 3년간의 의과대학 교수를 역임한 후 1979년에 개업(일반 내과)하여 Tampa에서만 줄곧 24년째 개업의를 하고 있다. 혈액과 암에 관해 조 씨가 쌓아올린 연구결과가 분야연구에 초석이 되고 있음은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다.
탬파 연합감리교회의 평신도 대표직을 맡고있으며 부인 조자원 씨와의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있다.
장녀 승우 씨는 현재 뉴욕시내에서 초등학교 선생으로 교편생활을 하고 있으며 아들 경현 군은 현재 보스턴 칼리지에 재학 중이다.
Tampa Bay 지역에서는 유일한 내과전문의로서 그는 탬파지역의 한국 노인회원들을 위해 무료 봉사등 노년층 건강문제와 특히 건강보험 문제 등에도 많은 상담을 응해 길을 터주는 일도 하고있다.
본인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소속된 탬파 한인연합감리교회에는 유난히도 한국의사들이 많아 교회 대내외 행사나 야유회 등이 있을 때는 저마다 전문분야별로 무료 건강상담을 한다면서 모든 공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열렬한 크리스찬이다. ‘건강을 위해’ 시작한 골프실력은 핸디 90 안팎, 미술감상이 특별한 취미라고 했다.
그는 직종 상 집안 내 돌연변이다. 부친과 형제들은 모두가 사업가들이라고 했다. 종이(製紙) 제조회사로 유명한 기업인 (주)영창제지가 바로 부친이 설립한 후 대표회장으로 있던 곳이며 이제는 가업으로 이어져 닥터 조의 손아래 동생이 맡아 더욱 큰 회사로 성장발족하고 있다. 가족모두가 제지분야로 성공한 집안임을 암시한다.
의사로서의 책무를 다하는 것은 물론 탬파의 여류변호사 김풍진 씨 등과 함께 힘을 모아 오래 전부터 한국노인들을 위한 아파트 설립을 위해 꾸준히 노력한 사람이다.
그는 정부를 상대로 교섭하는 일이 많다보니 뜻대로 빨리 진척되진 않고 있다며 ‘시작이 반’이라고 그런 일에 착수했다는 것만도 얼마나 값진 일이 아니겠냐고 반문한 뒤 바램은 한인동포사회 전반에 걸쳐 우리 동포들이 윤택한 생활과 교육 그리고 미 주류사회 참여 등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했다.
각분야의 전문의들이 모여있는 탬파시 북쪽 USF(University of South Florida)옆 아담한 메디칼 센터 빌딩을 나서며 ‘의술은 인술’이라는 명제를 노인공경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조 씨의 미소를 다시금 떠올려 본다.
최기환

동포경제 전환기의 기수
가치관의 변화를 원하는 탬파의 차세대.
본 책자에 선정되어 지상에 소개되는 사람들 중 필자가 인터뷰를 하기에 가장 힘들었던 인물이 최기환 씨다. 취재를 하기 위해 만나야겠다는 귀뜸을 하고 난 후에 전화를 하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는데도 그를 만나기는 정말이지 쉽지 않았다.
교회에서 예배가 끝나면 친교실에서 인터뷰를 할 생각으로 예배 ‘끝나면 보자’고 벼르던 계획도 축도가 끝나자 그가 사라져버리는 통에 수포로 돌아갔다. 그래서 그의 회계사사무실로 급히 차를 몰고 가서야 한사코 손사래를 치는 최 씨를 마치 연행하듯 억지로 붙들어 간신히 입을 떼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필자와의 만남을 극구 피하는 이유는 이런 무게 있는 책자에 실릴만한 명분이 없다는 겸양 때문이었고 그것이 인터뷰 회피이유의 전부였다.
그래서 필자는 미주이민 100주년을 맞아 플로리다 한인동포사회의 이민역사도 후세들에게 남겨야되지 않겠냐며 수 차례 광고를 통해 추천을 받았는데 많은 분들의 추천이 있었다고 설득해 가까스로 인터뷰를 마쳤다.
경기도 인천에서 1959년 3월 2일에 태어난 그는 올해로 43세. 한국에서 외국어대학교 무역학과를 졸업한 그는 대학에서의 전공을 살리기 위해 수출입은행에 몸을 담는다.
그러나 뜻한 바 있어 그 전도양양한 자리에 6개월만에 사표를 제출하고 미국을 향해 유학 길에 올랐다. 1983년 Illinois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그곳에서 회계학석사학위(Master of Accounting Science)를 받고 다시 Golden Gate University에서 MST(Master of Science Taxation : 稅法碩士)학위를 받는다. 그때가 1986년, 그는 이어 다음해에 캘포니아 주 라이센스인 CPA(공인회계사)자격증을 획득했다. 이어 그는 5년 6개월간의 미국 회계법인회사에 근무한 경험을 토대로 플로리다에 정착하기 위해 1990년에 탬파로 이주하여 플로리다 주 CPA(공인회계사)자격증까지 거머쥐면서 현재까지 14년 동안 탬파에 공인회계사로 일하고 있다.
고객의 비율이 한국인보다는 비 한국계가 더 많다는 그는 한국고객의 확보전략이 아닌 순수한 차원에서 동포사회를 상대로 계몽을 위한 세무강좌 등을 개최하며 많은 활동을 했다.
그는 세무강좌 뿐 아니라 한인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플로리다 유일의 한국계 여자변호사인 탬파의 김풍진 씨와 함께 공동으로 기획-진행한 것이 많다며 공을 김 변호사에게 돌리는 겸손함도 보인다. 처음에 그토록 기피할 때와는 달리 기왕 하는 인터뷰인데 할 말은 해야 한다는 듯 한국인들의 가치관이나 사고방식의 변화를 강한 톤으로 주장한다.
많은 한인 동포들이 장기간의 스몰 비지니스에 매달렸던 탓인지 한 번 도약해볼 기회가 있어도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한다면서 Take off 의 한계점이라면서 말을 잇는다.
그는 올랜도의 한 한인사업가를 예를 들면서 그분의 사업성공담을 잠깐 소개한다. 이분은 비즈니스를 나무를 키우는 것에 비교해 정성을 들인 만큼 사업이 자란다고 말한다며 몇십년 동안 편의점을 운영하면서 검소한 생활로 일관해 지금은 몇백만 불이 넘는 쇼핑몰을 소유하고 있지만 아직도 10년이 넘은 중고차를 몰고 다녀 주위 동포들의 근검과 절약과 검소함의 표본이 되고있다며 규모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 방면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성공이라고 정의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한인동포들의 발전과 성공을 위해서는 “가치관의 변화가 와야 한다”며 매서운 질타를 주저하지 않는다. 열등감도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라는 귀담아들어야 할 말도 곁들이는 그는 상당히 논리적이고 조리 있는 직언으로 일관한다.
이렇게 본인의 뜻을 잘 표현하는 그가 왜 그토록 인터뷰를 피하려 했을까? 너무 하고 싶은 말이 많았기에 그랬을 것이다. 그에게 비친 이민 1세들의 모습을 놓고 그는 가치관의 변화를 거듭 촉구한다. 그를 한국공관에서도 눈여겨본 나머지 차세대 평통자문위원으로 위촉해 두 번(8-9기)의 임기를 역임하도록 했다. 편안하고 좋은 말로만 대화하며 고객만 확보하자는 그런 회계사가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할 말 다 하면서도 고객의 세무 회계문제만은 정도(正道)를 지키는 회계업무로 사업성공의 지름길로 인도하며 보호하는 명실공히 실력 있는 공인회계사의 전형이다.
그는 그동안의 회계사 경험을 살려 지난해 11월 탬파 인근에 8만 스퀘어피트의 대형 쇼핑몰 건물을 동업자와 함께 매입한 후 실내단장을 깨끗이 끝내고 이곳에 탬파 플리마켓을 개장해 한 달만에 점포가 다 입주할 정도로 성공적인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가족으로는 부인 최혜경 씨와의 사이에 공주 둘을 두고 있으며 탬파한인장로교회의 집사로서 교회생활에도 충실한 크리스찬이다.
최미아

꿈을 찾아주는 “엄마, 우리들의 엄마”
여행사에 차려진 신체부자유자의 「오아시스」
거기 사랑에 굶주린 아이들이 있었다. 이 사회에서 소외된 아이들, 정신박약아와 신체부자유자로 불리는 꿈을 잃어버린 아이들을 위해 부모를 그리고 선생님을 대신해서 보살펴주는 한 한국여인이 있다는 말을 듣고 길을 나섰다. 그러나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가르침을 철저히 신봉하는 탓일까, 늘 이런 선행의 주인공들로부터 받는 인상이지만 인터뷰를 무척 사양하려든다. 대단한 일이 아니다, 누구나 다 한 번쯤은 생각하는 일인데 조금 먼저 나섰을 뿐이라는 사양의 변을 달래느라 시간을 꽤 지체해야 했다.
1951년에 경북 포항에서 고 최만용 씨와 이유화 씨의 3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녀가 미국 땅을 처음 밟게 된 것은 1970년이다. 그 무렵 이미 적잖은 한국인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천혜(天惠)의 땅 플로리다를 향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도미(渡美) 5년을 맞은 1975년에 주류사회에서도 전문가가 아니면 힘든 여성전용 헬스클럽을 오픈 해 건전한 사업운영으로 짧은 기간 동안에 10개의 체인망까지 확보하는 사업가로 변신하였으며 지역사회에 도움이 되는 건전한 사업임을 알아차린 시 정부에서 감사패를 수여하기도 했다.
이후 사업체를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고 사업을 구상하던 중 그녀는 얼마 안되는 한인동포들이 흩어져 살고있어 바쁜 이민생활에 함께 모여 향수를 달랠만한 장소가 없다는 생각에 이르자 1979년 탬파 최초의 한국식당을 개업하게 된다. 식당개업 후 그녀는 본래의 취지인 ‘향수를 달래고 친목을 도모’하는 의미 외에 사업상의 성공도 이루었다.
그리고 그녀는 또 하나의 ‘최초’의 기록을 1986년에 수립한다. 플로리다 최초의 한국여행사를 오픈한 것이 그것이다. 늘 그러했지만 사업의 전망보다는 모국을 다녀오려 해도 영어 때문에 외국여행사를 찾기가 불편한 적잖은 수의 한국인들을 위해서다.
그곳이 탬파에서 유일한 한국인이 경영하는 E.T Travel Internationals이다. 규모도 만만찮다. 여행사에 들어서자마자 국적이 다른 네 명의 직원들이 저마다 모국어로 고객들과 대화를 한다. 아마 새로운 여행 팩케이지를 개발했다고 알리는 듯 했다. 그 광경을 유심히 보고 있는 필자에게 최미아 사장은 “한국인들은 휴가를 즐길 수 있는 관광 팩케이지를 홍보해도 별 관심이 없다. 여행은 일상의 수준에서 비약할 수 있는 것인데도 잘 이해들을 못하는 것 같다”며 아쉬움을 털어놓는다.
탬파 중심지인 다운타운 시내에 넓은 주차장이 마련된 자신 소유의 큰 빌딩에는 약 3분의 1을 여행사로 쓰고 나머지 3분의 2에 해당하는 면적이 사회에서 소외된 신체부자유자와 정신박약아들을 가르치고 먹이며 돌봐주는 특수학교이다.
여행사에 대해 질문을 하던 중 옆방의 교실에서는 연신 자신들의 보호자인 그녀를 찾는 소리가 이상한 발음으로 이어져 나온다. “아이들이 또 찾네요”라고 하는 최미아 사장을 따라 교실로 들어가 봤다. 덥석 껴안아주는 최 씨의 모습을 보고 누가 그들 사이를 감히 남남이라고 하겠는가! 무척 익숙한 모습이다.
아버지가 포항에서 제일 가는 부자였던 환경에서 자란 그녀는 나도 언제 돈을 좀 벌어 남을 위해 한 번 써볼까 하는 것이 자신의 말 그대로 ‘평생소원“이라고 했다. 그러했던 그녀의 소원은 비록 ’아직은 미약하지만” 창궐할 수 있는 훗날의 징조는 이미 보이고 있었다.
사랑에 목마른 아이들은 최 씨의 품에 안겨 부자유스런 표현이기는 해도 별의별 얘기를 다 털어놓는 듯 했다.
정부로부터 학교로 승인(Adult Day Training)받는 데만 꼬박 2년이 걸렸다며 허가를 받는 데 무척 고생이 많았다고 했다. 자선을 빙자해 실속을 차리려 드는 일부 못난 사람들 때문에 선의의 피해자는 이렇게 있기 마련이다.
교실 네 개와 체육관 , 그리고 보조원들이 함께 일하고 있는 이곳의 모든 유지비, 식대, 교사비, 보조원급료, 등은 아직까지는 정부나 기타 자선단체의 보조 없이 순수한 최 씨의 개인부담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며 “돈이 꽤 들겠군요?”하는 물음에는 웃으면서 “제가 벌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힘든 기색을 턴다. 선행을 할 정도의 기반(재정적?)은 닦아 놓았다는 그녀의 말에서 뿌듯함 같은 것을 느꼈다. 기반을 잡았다고 해서, 돈이 있다고 해서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기에 드는 마음이다. 50대 초반의 향내 풍기는 자선사업가 최 씨. 진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최 씨의 깊은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던 의미 깊은 그 날의 기억은 꽤나 오래 갈 것만 같다. 좀체 들어보지 못 했던 아름다운 선행, 그것은 제 주머니를 털어 꿋꿋이 행하는 사랑과 박애의 현장에서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최재필

중동맨에서 탬파의 성공 기업인으로
행사때마다 불려 다니는 무보수 MC
지금은 전공과는 무관한 Beauty Supply를 하고 있지만 중동지역이 한국의 젖줄이었던 당시엔 한국기업은 물론 미국계 건설회사에서 건설본부장까지 지낸 완전 건설통(通)으로 사막과 싸워온 ‘중동맨’이었다.
서울토박이로서 1952년 4월 25일 생인 그는 배재중학교와 경신고등학교를 거쳐 경희대 토목학과를 75년에 졸업한 후 ROTC 13기로 육군소위로 임관했다. 국방의 간성으로 국가안위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도 중차대한 책무겠지만 적어도 당시 최 씨에게는 ‘잘 사는 나라’를 만드는데 젊음을 투척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갈등과 고심 10여일 만에 중위로 전역하면서 곧바로 건설업계로 뛰어들었다. 때마침 중동 건설 붐을 타고 탄탄한 회사로 성장하던 동부그룹산하의 동부건설에 입사, 토목설계 및 시공분야에서 일을 하며 대학 전공인 토목학을 배경으로 한 6년간의 실무경험을 바탕으로 건설업계에 이름 석자를 굵직하게 아로새긴다. 주지하다시피 건설업계만큼 스카웃 경쟁이 심한 분야도 드물다. 당시 건설업계의 [빅3]로 꼽히던 금호그룹 산하의 금호건설이 최 씨를 낚아챘다. 일약 사우디아라비아 소재 금호건설 현장의 지휘봉을 들고 현장소장으로 부임하면서 열사(熱沙)의 땅에서 6년간 수많은 건설공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해낸 최 씨는 귀국 후에도 건설업계의 기린아로 불리며 업계 중견인으로 자리매김 한다. 건설-토목이라는 것은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원칙대로의 작업이다. 군사정권은 그러나 실적과 내실로 평가돼야 할 건설업계의 질서를 마구잡이로 훼손시켰다. 로비와 뒷거래, 인맥에 의해 하청질서가 완전히 파괴됐다. 평생 뼈를 묻을 천직으로 알았던 건설업계에 대해 최 씨는 처음으로 회의를 느낀다. “그래, 가자, 미국으로 가자”. 1988년 5월 6일 최 씨는 뉴욕의 아침 공기로 새 호흡을 시작했다. 한국에서부터 인연이 있었던 뉴욕 소재 모 건설회사가 그를 반갑게 껴안는다. 파격에 가까운 보직을 받아 본부장 책임까지 맡았던 그는 92년 열사의 태양과는 또 다른 플로리다의 태양이 보고 싶어졌다. 플로리다의 탬파에서 살고 싶다는 당초의 바람이 점점 더 거세 지자 그는 주저 없이 뉴욕을 떠나 탬파에 새 둥지를 튼다.
관광지역에서의 건설업도 재미있을 것 같아 기존 건축업계 관계자들과 조우를 계속하던 중, 인생유전이란 예나 지금이나 참으로 묘하다. 우연히 만나게된 대학동창과 저녁식사를 나누던 중 강력하게 자영업을 할 것을 권유했다. 불타는 사막의 모래바람을 헤치고 수십 톤 씩 나가는 건설자재와 맞붙어 싸우는 것으로 반생을 보낸 최 씨가 Beauty Supply에 뛰어든 것은 일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최 씨는 그렇게 했고 지금 업계에선 내노라하는 사업가로 자리를 굳혔다.
현지 탬파에서 동포들의 입에도 성공한 사업가로 자주 회자될 무렵, 그는 한인사회와의 연결고리에 닿는 계기를 맞았다. 16대 서부플로리다한인회 수석부회장으로 봉사했으며, 국제민속박람회로 널리 알려진 SPIFFS(St.Petersburg International Folk Fair Society) 문화제에 코리언팀 담당 운영위원장으로 뛰어다니고,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을 2차례(9기와 10기)나 연임하면서 친목단체인 탬파한우리동우회 회장직도 맡았었다.
골프 실력은 동포사회에서 보기 드문 싱글로써 핸디 9, 그래서 그는 골프협회도 2년간 이끌어 왔다. 지금은 이사장으로서 협회를 위한 뒷바라지를 하고 있으며 2002년 우수 평통위원으로 선정, 한국 평통사무총장의 공로패를 받기도 했다. 봉사도 봉사지만 그는 우선 다재다능하다.
탬파 동포사회에서 치뤄지는 어떠한 행사에도 그는 붙박이 MC다. 재치 있게 행사를 진행하는 재주꾼으로, 부창부수 부인도 함께 무대에서 영어 동시진행이 필요한 행사에는 영어 쪽 사회를 맡아 줘 부부MC로 유명하다. 모태신앙인으로서 집안에 3명의 목사님이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크리스찬으로 그는 현재 탬파한인연합감리교회 집사이기도 하다.
지나칠 수 없어 밝힐 것이 있다. 프로에 가까운 그의 골프실력이 부럽기도 해 비결을 물었더니 의외로 큰 건(?)이 한 가지 걸려든다. ‘형님인 재성 씨의 영향이 컸었다.’
재성? 최재성?! 미국 내 단 둘뿐인 한국인 시니어 PGA 중 한 명, 최재성 씨가 바로 최 씨의 친형이라는 걸 안 순간 필자는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다.
한용섭

이민 선후배의 의리만점 기둥
사회화합의 ‘보이지 않는 큰 손’
그를 만난 곳은 탬파의 명소 한일관 식당에서였다. 그는 다소 의기소침한 상태에서 “국민들의 선택이 그랬다면 할 수 없지”라는 말을 하면서 오히려 주위의 동석한 사람들(동지들)을 위로하고 소주잔을 건넨다. 그날은 그가 한국대통령선거에서 이회창 후보의 낙방소식을 전해들은 날이기도 했다. 그에게는 결코 무관심하게 흘려버릴 패전(敗戰)의 뉴스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순간까지 그는 플로리다주 이회창후원회 회장이었기에 그러했다. 힘닿는 데까지 지원도 했고 초청을 받아 동지들과 함께 서울을 방문하여 이회창 씨를 만나 해외동포 입장에서 본 모국의 안타까운 현실에 대해 많은 제안과 조언도 하고 왔다. 그런 날 하필 필자를 만났는데 “젊은 분이 당선됐으니 잘 하시겠지요”하며 오히려 덤덤해 한다. 안성맞춤이라는 표현으로 상징되는 경기도 안성에서 1935년 6월에 태어난 그는 1975년 1월에 자동차정비기술자로 기술이민을 한 후 현재까지 탬파에서 살고 있다.
그에게는 첫 대면에서도 벌써 남다른 보스기질이 풍긴다. 그래서인지 플로리다에서 가장 파워 있는 친목단체인 <목요회>는 86년 창설이래 지금까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매주 목요일이면 어김없이 회원들이 모여 같은 이민선을 탄 선후배끼리의 기탄 없는 대화를 통해 친목을 다지고 있다.
이것은 그의 리더쉽이 주효하기에 그렇다는 것이 현지 언론인의 귀뜸이다. “남의 말을 하지 말자”고 외치면서 늘 조용한 가운데 남을 도울 줄 아는 그의 따스한 손길은 안 닿는 곳이 없을 정도다.
뿔뿔이 흩어져 생계를 잇기에 급급한 한인오너들의 친목과 권익향상을 위한 단체의 필요성을 느낀 그는 이민 직후에 현재는 서부플로리다 한인상공인협회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전신인 서부플로리다 실업인협회를 창설하고 초대에 이어 2대, 3대를 역임하면서 회원 단체의료보험을 관철시키기도 했다. 한인사회의 원로로서 한인회 이사직을 오랫동안 맡아오면서도 회장출마를 권유하면 늘 “뒤에서 돕겠다”는 말로 대신하는 그는 실질적으로 뒤에서 돕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한인회는 물론 축구단체 등에도 그의 주머니는 늘상 바쁘며 특히 플로리다가 미주전역의 한인동포사회에 내놓고 자랑하는 플로리다의 자존심이기도 한 민속단의 발전육성에도 그는 큰손의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전쟁통에 부산에서 겪었던 천막살이 생활을 지금도 잊지 못 한다면서 축복 속에 황혼기를 맞는 오늘의 생활에 늘 감사한다고 하는 그의 형제사랑도 남다르다. 작고한 형님말고 3형제가 모두 플로리다에 모여 살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그리고 자식농사 잘 지었다는 주위 사람들의 부러움 섞인 농담에도 그는 늘 “자식들에게 일체 간섭 안 한 것이 그렇게 됐다”며 소탈하게 웃는다.
부인 김봉녀 씨와 사이에 1남2녀를 두었는데 장녀인 경화 양은 소문난 효녀로 결혼해 탬파 인근의 쎈피터스버그에서 살면서 두 아이의 엄마로 애들 키우랴 사업하랴 바쁘지만 틈만 나면 부모님 집을 방문하고 또 식당에서 식사대접을 하며 부모에 대한 공경심을 나타내 한씨는 주위의 나이든 동포들로부터 부러움을 받고있다.
올해 서른 다섯 살의 장남 구진 군은 조지아주립대학 공대 졸업 4개월 전(1992년) 당시에는 엄두도 못 낼 파격적인 연봉제안으로 펩시콜라에 스카웃되어 고속 승진 끝에 Florida Pepsi Division에 부사장직을 역임한 후 현재 미네소다의 미네플리아스에 있는 펩시회사의 총지배인(General Manager)으로 근무하고 있다.
그리고 플로리다주립대학교와 대학원을 거치면서 박사학위의 소유자가 된 차녀 경란 양은 남부의 사립명문 Rova 대학에서 뇌신경분야를 전공 한 후 심리학 전문의가 되자 조지아 애틀란타 인근도시인 이스트맨에 개인병원을 열어 광대한 꿈을 갖고 열심히 근무하고 있다.
많은 주위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고있는 자식농사에 대한 성공담의 노하우를 들어보려는 필자에게 한 씨는 자식자랑도 불출에 들어간다며 안 들었던 것으로 해달라고 부탁하고 건배를 외친다.
해방둥이 부인 김봉녀 씨의 변함없는 꾸준한 사랑의 내조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식들의 성공과 가정의 행복을 일구는 원동력이었다는 것이 필자를 안내한 사람의 귀뜸이었다. 한 씨도 오늘의 풍성한 수확이 모두 아내 몫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는 듯 “그동안 고생 많이 시켰다”며 빙그레 웃는다. 동석한 부인에게 Red Wine 한 잔을 권하면서….
<마이애미 지역>
김강홍

“인체와 사회 건강, 동시에 지킨다.”
“건강과 생명을 지키는 의사의 본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회를 건강하게 하는 일도 소홀히 할 순 없습니다. 그것이 나름대로 소신껏 사회봉사에 참여하는 이유입니다.”
흔히 의사라는 직종은 업무 특성상(늘 자리를 지켜야 하겠기에) 사회참여의 기회를 얻기가 힘들다. 일단 사회 일각의 어떤 책임을 맡게 되면 ‘지속성’이 중요한데, 의사라는 직업이 그 것을 허용하기가(시간을 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분야의 전문인들은 특수한 상황인 경우 약속을 미루거나 조정을 할 수도 있지만 의사야 어디 그게 말처럼 쉬운가. 촌각을 다투는 환자들을 대하면서 시간조정 자체가 불가능하기에 선뜻 사회참여에 발을 디디기가 어려운 형편임은 능히 짐작된다. 그런데 이런 저간의 형편을 과감히 탈피해 사회봉사에 큰 몫을 하고 있는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의사 김강홍. 한인동포사회 구석구석에 많은 봉사부분을 맡아 실질적으로 봉사하고 있는 드문 의료인 중 한 사람이다.
그가 의사로서 그 어려운 일을 해내면서 일면 사회를 위해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그가 맡은 일들을 살펴보면 얼추 이해가 된다. 1996년에 마이애미한글학교 이사장을 맡아 2세 교육을 위한 현장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3년이 걸렸다. 마이애미 한인사회의 형성기에 해당하는 77년도에 마이애미 한인회장을 지냈으며 9기 평통자문위원으로 있을 때는 플로리다 전역을 대표하는 평통회장을 맡아 당시만 해도 관변단체로 비난이 없지 않던 평통을 동포친화적 단체로 변모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현재(2003)도 미주전역에 걸친 모든 한인회의 총 구심체인 미주한인총연합회의 부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이렇듯 전공과는 무관(?)하게 한인사회 곳곳으로 봉사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그는 전공분야에 있어서도 동포들을 위한 의료행위에 관한 제반문제는 물론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는 실향민이다. 1941년 일제 강점기의 꽁꽁 얼어붙은 산하에 북방한설이 휘몰아치던 12월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했다. 다섯 살 나던 해, 8.15해방을 맞아 부모님 품에 안겨 남하해 서울에서 줄곧 성장했다.
1960년, 당대의 3대 명문 중 하나인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 66년 역시 우수한 기록을 남기며 졸업한다. 졸업과 동시에 미국으로 건너와 미국 북부지역인 캐나다와 인접한 자동차공업도시 디트로이트에서 인턴생활을 마친 후 다시 신시내티 종합병원에서 의료진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으며 2년간의 레지던트 훈련으로 선진의술을 몸에 익혔다. 1969년, 자신이 미국생활의 종착지로 선택한 마이애미로 와서 다시 전문의 과정의 레지던트를 마친 후 71년에 마이애미에서 정형외과의 전문의 자격을 획득한 후 1972년도에 마이애미 비취 사이드에 정형외과 의원을 열고 33년 동안 운영하고 있다.
의사로서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이처럼 훑듯이 표현하는 이유가 있다. 도미 이후 미국 내 유수의 병원에서 ‘히포크라테스의 후손’으로 훈련받고 태어나는 전 과정동안 그는 늘 주목받았고, 선두였고, 거칠 것이 없었다. “사회가, 동포사회가 커졌잖아요? 그만큼 사회적 기능이 강해져야 하는데, 직종에 얽매여 머뭇대다보면 봉사, 참여의 기회가 점점 좁아지죠. 전문인들의 사회참여가 확대되어야죠. 사회기능이라는 것이 순환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전문인력의 전문기능이 사회 윤활유 역할을 하면 할수록 전문인의 사회참여 공간은 더 크게 확대될 수 있죠. 자신이 하는 본업에 지장을 받지 않는 모멘텀이 생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해보니까 그렇더라구요…(웃음)” X-Ray를 전공한 부인도 Mt. Sinai종합병원에서 레지던트 티칭프로를 담당하고 있는가 하면 둘째 아들 마이클 김은 샌디애고에서 일반내과와 정신과를 전공한 의사로서 개업의를 하고 있는 ‘의료인 가문’을 이루고 있다.
81년부터는 마이애미한인장로교회의 장로로서 하나님집의 청지기를 맡고 있다. 부창부수, 부인도 96년부터 미국장로교단에서 장로안수를 받아 신앙의 제단을 굳건히 지키며 독실한 크리스찬 가정을 꾸리고 있다. 이젠 봉사에 이력이 난 듯한 명의의 안경 너머로 마이애미 한인사회의 새 희망이 반짝 빛을 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