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에 찾아온 가을빛, 파란 하늘 아래…!
도심의 오후, 모처럼 오랫만에 여행을 왔다.
내가 살고있는 플로리다 탬파는 아직도 폭염과 땡볕속에 여름이 머물며, 옛날 증기기관차에서 뜨거운 수증기를 내뿜듯, 대기의 열기는 뜨거운 습도속에 한증막에 들어앉은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이 뜨거운 열기, 무더위를 피하여 수천리 밖 북쪽땅 캐나다 밴쿠버로 피서 여행 겸 가을을 만나러 이곳에 왔다. 이곳에 와 보니 태양은 이미 적도를 넘어 남쪽녘을 향하며 화사하게 대지를 비춰주고 있다. 이곳에서 눈으로 보고 체감으로 느끼는 기분은 완연한 가을이다. 한낮의 최고 온도가 섭씨18도에서 20도를 오르내린다. 이곳 캐나다는 미국과 달리 온도를 측정할 때 섭씨로 표현하고 자동차 속도 제한도 마일 대신 km로 표시한다,
머물고 있는 호텔 숙소를 나와 다운타운 해변가를 걷다보니 화사하고 아름다운 가을빛이 너무나 인상적이다. 이곳저곳 여기저기를 둘러보니 ‘가을 빛 예찬’이 저절로 탄성이 되어 흘러나온다. 많은 사람들은 도심에 갇혀 사는 까닭에 가을빛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도심 여기저기에도 가을빛은 있지만, 도시의 삶은 천천히 가을빛을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인도 하지 않는다. 도시에서 가을빛을 보려면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
천박한 땅 도심에도 어김없이 가을은 왔다. 간혹 제철을 잊은 듯 피어나는 꽃도 있지만, 그속에는 가을이 이미 충만하다. 가을은 여느 계절과 달리 겨울부터 지난 여름까지 온 계절 겪었던 삶을 몸으로 표현하는 계절이다.
잘 조성되고 가꾸어진 공원의 꽃밭에 어느 꽃나무는 열매도 맺혀있지만 여전히 꽃망울을 피워내고 있다. 그들에게 계절을 모르는 ‘바보 꽃’이라고 손가락질을 할 수 없다. 그들은 오로지 온 힘을 다해 피웠을 뿐이고, 피어날만 하니까 피어났을 뿐이다.
장미가 혼자 외로울까 싶어 합세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름 모를 노오란 열매가 꽃이 지고난후 아름답게 열려있다. 열매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이 가을이 왔음을 대변해주고 있다. 가을에 피는 저 꽃도 이른봄 피어나 시샘하는 봄바람에 서둘러 떨어지듯 떨어질까 싶다. 이제 머지않아 이곳에는 북극 끝에서 세차게 불어오는 설한풍 속에 열매 맺힌 곳곳에 꽃눈이 수북하게 쌓일 것이다. 한 겨울 추위를 견디고 봄에 꽃을 피우고 여름에 한껏 성장해 열매를 맺고 가을에 노오랗게 익어 가을빛이 묻어나니 더욱 아름답고 참으로 신비롭다.
작은 열매하나 하나에도 온 우주의 기운이 들어 있다. 꽃샘추위와 바람과 햇살과 한 여름의 폭우, 그리고 또 무언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때론 힘겹게 때론 북돋워 가며 그들을 키워냈을 것이다. 그리하여, 농부들이 이른 봄부터 늦가을 까지 땀흘려 거둬들인 작은 쌀 한톨에도 온 우주가 들어있는 신비인 것이다. 늦더위 속에 피어난 백일홍도 보기가 좋다. 사람의 손길이 닿은 원예 종들은 뭔가 야생의 것들과는 달리 쉽사리 싫증나기 마련인데 이곳에 피어난 각종 꽃들은 그렇지 않다. 사람의 손이 타긴 했지만, 땅에 뿌려진 후부터는 자신만의 힘으로 꽃을 피워냈을 것이다. 그것이 대견스러워 꽃들이 더욱 예쁘다.
과잉보호와 과잉 꾸밈의 시대, 이제 외적인 아름다움 정도는 돈으로 해결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TV에 나오는 배우나 탈렌트, 또는 예뻐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다수가 자기의 원래 모습을 배제하고 인공으로 성형수술을 받아 예뻐졌다고 한다. 심지어는 나이 먹은 늙은이들도 축 처진 눈매나 턱, 볼 등의 주름을 제거하고, 쌍꺼풀 수술도 받고, 얼굴 모양마저 돈으로 뜯어고친다고 한다. 인공의 미가 넘쳐나는 시대다. 이런 시대에서 조차도 그의 변신이 아름다운 것은 싹을 틔우고 피어나기 까지 자연의 질서를 마다하지 않은 그들의 마음 때문이다.
들에는 소위 ‘들국화’로 분류되는 이들이 진한 향기와 함께 피어난다. 사실 들국화라는 이름은 없다. 저마다 들에서 피어나는 ‘국화과’의 꽃이다. 그들은 밤낮의 길이를 묘하게 읽고 밤이 깊어지기 시작하는 계절부터 피어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가을꽃의 대명사가 되었다. 가을에 피어난다고 그들이 가을부터 싹을 틔운 것은 아니다. 이른 봄부터 싹을 틔우고, 아주 오랜시간 준비하여 꽃 한송이를 내어놓은 것이다. 그래서 가을꽃들은 더 향기가 깊다. 꽃 한송이를 피우기 위해 수고한 시간이 훨씬 길기 때문이다. 그 긴시간, 아픔의 시간도 길었을 것이고, 그 아픔의 시간을 넘나드는 기쁨의 시간도 길었을 터이다. 가을꽃의 향기가 더 깊은 까닭이다.
그러한 꽃의 결정체는 결국은 열매로 귀결된다. 저렇게 많은 열매가 맺히기 까지 또 그토록 많은 꽃들이 떨어졌을 것이다. 맺힌 열매보다 훨씬 더 많은 꽃들의 낙화가 지금의 꽃들을 있게 한 장본인들이다. 낙화한 꽃들의 의미를 본다. 과연 우리는 떨어진 꽃과 같은 인생들에게 얼마나 감사하며 살아가는가? 그저 자기 혼자 노력해서 자신의 힘만으로 살아가는줄 아는 인간의 무지함, 그것에서 깨어나는 만큼 가을처럼 깊은 사람이리라.
수천리 타향 , 이국 땅 캐나다 밴쿠버에서 가을빛에 취해 한없이, 정처 없이 걸었다.
그 빛을 보려고 눈을 돌리자 도심에서도 수많은 가을빛이 눈을 맞춘다. 세월은 오늘도 흘러가고 있다. 사람들이 자신이 나이를 먹고 늙어간다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중에도 세월은 계속 흘러간다. 우리는 흐르는 세월을 아쉬워 하지만 세월은 무정하기만 하다. 대신 세월은 우리에게 추억을 남긴다. 추억은 그리움으로, 그리움은 다시 지난 세월에 대한 동경으로 이어지고 그런 가운데 아픔과 기쁨, 그리고 진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흐르는 세월속에 계절도 바뀐다. 신록의 봄인가 싶었는데 어느새 빛과 태양의 계절 여름이 오고, 한낮의 더위, 폭염, 땡볕이 싫기만 했는데, 그런 속에 서도 어느듯 가을은 성큼 우리들 곁으로 다가왔다.
가을은 열매를 남긴다. 열매는 아름다운 결과이기에 그 자체로서 소중하다. 그리고 열매는 절대로 순식간에 얻어질 수 없는 것이므로 가치가 있다. 성경말씀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야말로 눈물 흘리는 수고와 과정이 있어야 비로써 소중한 열매를 얻게 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또한 열매는 반드시 씨를 뿌리는 작업이 전제되어야 한다. 만약 그 누군가가 그런 수 고와 과정없이 열매를 얻으려 한다면 그것은 파렴치한 도둑질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열매는 심은 대로 거둔다. 이 말의 의미는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첫째, 심은 씨앗의 종류대로 열매를 거둔다는 이야기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나게 되어있다. 된장을 담그려는데 팥을 심거나 팥죽을 쑤려는데 콩을 심는 사람은 바보중의 상 바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올 한해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냈나? 에 대해 그리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지금 현재의 나의 모습이 바로 올 한해 동안 내가 심은 삶의 결과물일 테니까………!
두번째, 심는 양에 따라 거두는 양도 다르다는 것이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조금 심으면 조금 거둔다. 따라서 가능한 넓은 곳에 충분한 양을 심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종종 일을 적게 하려면서 많은 열매를 따려고 하는 어떤 요행을 바라는데 그런 불노소득을 취하려는 행위는 결국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갈 뿐이다. 하나님도 그런 사람은 인정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부지런히 심어야 한다. 그리고 많이 심어야 한다. 그리고 난 후에 열매를 기대해야 한다. 열매를 거두고 나면 머지않아 춥고 혹독한 겨울이 온다. 우리의 인생은 누구나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를 거치게 되어있다. 이 네 과정은 마치 계절의 춘하추동 같아서 우리들 인생에 많이 비교되고 있다.
“여러분께서는 인생의 겨울을 준비하셨나요?”
어머니가 김장을 하고, 맛있는 밥과 국을 만들고 일용할 양식을 만들 수 있는 추운 겨울에 온돌방을 따뜻하게 뎁혀 줄 땔감을 준비하며 겨울을 대비하듯, 나에게도 분명히 다가올 인생의 겨울을 미리 미리 준비하는게 현명하지 않을까?…….! 특별히 그 인생의 겨울의 준비가 단지 노후를 준비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면 깊숙한 부분까지 이르러 단 한번만이라도 영혼을 생각할 수만 있다면 좋겠다.
단언컨데 인생의 겨울을 잘 준비하는 것이 정말 지혜로운 삶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문학 작가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424/2024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