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우리 민족의 애환이 서린 봉선화(여름의 꽃 봉숭아)
현대 여성들은 손톱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손톱을 길게 기르고, 색깔과 광택을 입히고, 장신구로 치장하는 일은 꽤 많은 노력과 돈이 소모되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러한 손톱을 가꾸는 네일 미용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이 되었을까? 그 궁금증을 알아보자.
기원전 3200년, 고대 바빌로니아에서는 남자들이 손톱을 치장하고 다녔다. 바빌로니아의 용맹스런 장군들은 적군을 압도할 수 있도록 검은색의 매니큐어를 칠하고 전쟁터에 나갔다. 신분이 낮은 전사는 검은색 대신 초록색으로 손톱을 색칠했다. 헤나를 쓰던 고대 인도에서 비롯된 풍습이었지만 바빌로니아에서는 안티몬 등 중금속이 함유된 콜먹(kohl)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고대 남부 바빌로니아 지방의 왕실 무덤에서는 전투용 무기의 일부를 콜먹과 함께 황금 매니큐어를 바르는 도구가 발견되기도 했다.
한편 인더스 문명의 헤나 염색은 기원전 3000년 고대 이집트에 전파된다. 이집트 사람들은 수준 높은 미용 문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높은 지위의 사람들은 붉은색 헤나로 손톱을 염색한 것으로 알려졌다. 네페르티티 왕비와 클레오파트라 여왕은 새빨갛게 염색한 손톱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 역시 유구한 네일 미용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주(周)나라 이전부터 귀족 남성들과 여성들은 손톱을 매우 길게 길렀으며 귀한 금속과 보석으로 장식하여 보호했다. 손톱 보호구는 지갑투(指甲套) 혹은 호지(㣗指)라고 불렀다. 긴 손톱은 부와 권력을 상징했고, 곡선의 아름다움도 느껴졌다. 또한 밀랍과 계란 흰자, 아교, 젤라틴을 풀과 꽃잎에서 추출한 염색약과 혼합하여 손톱에 색을 물들이는 기술도 전해지고 있다.
19세기 말부터 네일 케어는 본격적인 산업의 테두리 안에 편입된다. 최초의 네일샵은 19세기 후반 파리에 문을 열었다고 전해지는데, 댄디즘(Dandyism=세련된 복장과 몸가짐으로 일반 사람에 대한 정신적 우월을 과시하는 경향, 프랑스에서는 정신적 귀족주의로 나타남)의 영향으로 말쑥한 외모를 선호하던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인기였다. 크림과 색조오일, 파우더 등으로 손톱을 깨끗이 하고 광택이 나도록 닦는 기술이 생겨났는데, 이것이 네일 미용을 네일 폴리시(Nail polish)라고 부르게 된 어원이다. 프랑스에서 네일 미용을 배워온 미국의 마리 콥(Mary E. Cobb)씨는 맨하탄에 “프레이 부인의 매니큐어(Mrs, pray’s Manicure)”라는 첫 매니큐어 샵을 열었다. 당대 사람들의 편견을 깨고 마리콥씨는 사업가로서 크게 성공한다. 마리는 네일 미용제품을 대량 생산하여 매니큐어 지침서를 집필함과 동시에 에머리보드(손톱 다듬는 줄)와 분홍, 빨강 에나멜 매니큐어의 독점권을 가질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고려시대 이전부터 봉숭아(봉선화)로 손톱을 붉게 물들이는 풍습이 있었다. 봉숭아 꽃과 잎을 백반이나 소금에 섞어 찧은 뒤 손톱에 얹고 헝겊으로 감싼 뒤 하루나 이틀 밤을 보내면, 수개월 동안 손톱을 붉은빛으로 물들일 수 있다. 조상들은 붉은색은 악귀를 물리치는 힘이 있다고 믿었기에 여인들뿐만 아니라 남자 아이들도 봉숭아로 손톱을 물들이곤 했다.
첫눈이 내릴 때 까지 봉숭아물이 손톱에 남아있으면 첫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속설도 전해지고 있다.
봉선화를 내가 살았던 고향 마을에서는 봉숭아라고 불렀다. 이 꽃은 중국이나 인도네시아가 원산지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심었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1241년 완성된 “동국이상국집”에 봉선화가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이전부터 봉선화를 널리 심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줄기의 높이는 30~50Cm 정도이며 굵고 곧게 자란다. 꽃은 붉은색, 흰색, 노란색, 분홍색 등으로 피고, 다섯개의 꽃잎을 가지고 있다. 봉선화는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라는 독특한 꽃말을 지니고 있는데, 씨주머니를 건드리면 톡 하고 터져 씨가 사방으로 튀어 나가는데서 유래한 꽃말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옛날부터 어린 아이들과 여자들이 봉선화로 손톱을 붉게 물들이는 풍속이 있었다. 한자로는 염지(染指) 라고 한다. “동국세시기”에 보면 ‘봉선화를 따다 백반에 섞어 짓찧어서 손톱에 물을 들인다’는 기록이 있다.
“임하필기”에도 봉선화가 붉어지면 잎을 쪼아 백반을 섞어 손톱에 싸고 사나흘 밤만 지나면 심홍빛이 든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린 아이들이 손톱에 봉선화를 물을 들이는 것은 손톱을 예쁘게 꾸미는 것 보다는 병마를 막기 위한 것 이었다고 한다.
귀신이 무서워하는 붉은색을 이용해 병귀를 쫓아내려는 시도인 것이다. 봉선화가 나쁜 기운을 쫓아낸다고 믿은 옛날 사람들은 못된 귀신이나 뱀을 쫓기 위해 집 울타리 밑, 장독대 옆, 밭 둘레 등에 봉선화를 심었다. 실제로 봉선화에서는 뱀이 싫어하는 냄새가 나서 뱀이 가까이 오지 않는 것을 나는 시골에 살면서 직접 목격하고 경험해 보기도 하였다.
옛날 나의고향 시골, 우리집에서는 꽃을 유난히도 좋아하는 누님 두분이 계셔서, 우리집 주위에는 온통 백일홍, 봉선화, 분꽃, 원추리, 맨드라미, 다알리아, 앉은뱅이 꽃, 등등 수많은 종류의 꽃들이 계절따라 피어나고 지곤 했다. 특히 요즘 같은 여름철에는 분꽃과 백일홍 봉선화가 그중에서 제일 많이 피어나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계절마다 우리 주변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난다. 그러나 그 많은 꽃들중에서 여성들이 즐겨 손톱에 예쁘게 꽃물을 들이는 꽃은 봉선화 꽃뿐이다. 왜 그럴까?.
더 화려하고 예쁜 꽃들이 많지만 다른 꽃들은 꽃물을 들이려고 해도 잘 들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어렸을 적에 나의 누나는 꽃다운 처녀였다. 그래서 해마다 이맘때면 손톱에 예쁜 꽃물을 들이곤 했는데, 옆에서 들여다보며 신기해하는 내 손톱에도 꽃물을 들여 주곤 했었다. 손톱에 꽃물이 들면 그 빛깔이 예뻐서 나도 좋아했다. 그 예쁘게 물든 손톱을 들어 보이며 집식구들이랑 동네나 학교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곤 했는데, 그걸 본 친구녀석들은 남자가 손톱에 꽃물을 들였다고 놀림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런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누나가 들여 주는 봉숭아 꽃물이 마냥 좋았기 때문이었으리라.
봉숭아 꽃은 봉선화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이 봉선화라는 이름에는 슬프고 아름다운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옛날 고려때의 이야기다. 개경에 살고 있던 한 여자가 어느날 밤 선녀로부터 봉황새 한마리를 받는 꿈을 꾸고 딸을 낳았다.
이 딸아이에게 봉선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곱게 길렀다. 봉선이는 거문고를 배워 그 솜씨가 무척이나 뛰어났다. 봉선이는 천부적인 거문고 연주 솜씨로 그 명성이 자자하여 결국에는 왕궁까지 들어가 왕 앞에서 연주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연주를 마치고 궁궐에서 돌아온 봉선이는 갑자기 병석에 눕게 되었다.
병석에 누워 있던 어느날 왕의 행차가 집 앞을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봉선이는 쇠약한 몸으로 겨우 일어나 있는 힘을 다하여 거문고를 연주하였다. 그녀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듣고 찾아간 왕은 봉선이의 손에서 붉은 피가 맺혀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고 애처롭게 여겨 백반을 싸서 직접 동여매주고 궁궐로 돌아갔다. 그 뒤, 봉선이는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결국은 죽고 말았는데, 그녀의 무덤에서 빨갛고 예쁜 꽃들이 피어났다. 사람들은 그 꽃으로 손톱에 물들이고 봉선이의 넋이 깃든 꽃이라 하여 “봉선화”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울밑에선 봉선화야 네모양이 처량하다 / 길고 긴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적에 /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김형준 시, 홍난파 곡. 울밑에선 봉선화 1절). 어언간에 여름가고 가을바람 솔솔불어 / 아름다운 꽃송이들 모질게도 침노하니 /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모양이 처량하다, 2절.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형체가 없어져도 /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3절.
이 노래는 초라한 초가집 쓸쓸한 울타리 밑에서 모진 비바람을 겪으면서도 한 여름 내내 빨갛게 피어있는 봉선화의 이미지를 뚜렷이 부각시키면서 어떤 역경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살아가는 민족의 의기를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이 가사의 1절에서는 봉선화가 한 여름의 시절에 아름답게 꽃을 피우던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2절에서는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낙화의 처량한 모습을 읊었다.
일제의 모진 침략으로 쓰라림을 당한 조국의 비운을 가을에 지는 봉선화에 비유한 것
이다. 그런데 이 노래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3절에 담겨있다. 1절과 2절은 3절을 도입하기 위한 서사에 불과한 것이다. 만약 이 노래가 2절에서 그쳤다면 그것은 봉선화의 낙화에 대한 애틋한 시에 불과했을 것이다. 가사 봉선화의 1,2절은 그야말로 우리민족의 한스런 비애를 표현한 것이었다면 제3절은 그 비애를 넘어서 부활해야겠다는 강인한 의지가 숨 쉬고 있다. 즉 비록 겨울이 닥쳐와서 모진 설한풍에 형체마저 없어진다고 할지라도 그 혼백만은 결코 죽지 않고 길이 남아서 찾아온 새 봄에 다시 살아나기를 바란다는 애절한 민족의 염원을 처절하게 절규하고 있는 것이다. 이 폐부를 찌르는 비원의 시구가 있어 이 노래가 단순히 애수어린 가곡에 머물지 않고 민족의 노래로 승화될수 있었던 것이다.
<문학 작가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416/2024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