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 금강산 관광때 있었던 이야기들<9>

<김명열> 금강산 관광때 있었던 이야기들<9>

이전에는 동구권과 서구권, 공산권과 자유권 진영간 이벤트화가 되어 미국에서 하면 공산권 국가가 불참하고 소련 모스크바에서 하면 서구권 국가들이 불참했다. 우리나라는 서구권인데, KAL 폭파사건을 보고 많은 동구권 국가들이 참가를 하겠다고 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북한은 1989년도에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한다.

전 세계 젊은이들의 마음을 얻자며 초청장을 보낸다. 이때 한국에서는 임수경 북한 불법입국사건이 발생한다. 그 배경과 내용을 참고로 소개한다.

이때를 기해 이 축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남한에서는 임수경을 보낸다. 세계청년학생축전은 “반제 자주와 반전 평화”를 슬로건으로 내건 축전이었다. 제13회 축전은 1989년 7월 평양에서 개최되었다. 한국 외국어 대학교 용인캠퍼스 불어과 4학년에 재학중이던 임수경은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전국학생 대표자 협의회(약칭 전대협, 회장 임종석)대표로 선발되었다. 형식상 일본 관광으로 위장해 출국했지만, 독일을 거쳐 1989년 6월30일 북한에 입국했다. 축전에 참여하여 북한 인민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같은 해 정의구현사제단의 대표로 파견된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 걸어서 귀환했다. 임수경은 입국과 동시에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국가안전기획부의 조사를 받았다.

다음은 임수경이 북한에 머무르며 있었던 이야기들이다.

임수경이 불법으로 북한의 세계청년학생축전으로 그곳에 갔을 때 이야기다. 그들은 그녀를 체제선전에 이용하는 홍보물로 삼으려 했다. 그런데 북한사회는 남한에서 온 젊은 여대생의 존재 자체에 더 관심을 보였다.

극도로 폐쇄적인 북한의 특성상 임수경의 영향력은 북한의 일부에 해당, 한정됐지만, 당시를 기억하는 탈북자들의 증언과 임수경 자신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북한 일각에서 임수경은 인기정상의 아이돌 이었다고 한다. 당시 임수경은 전형적인 새내기 운동권 여대생의 복장(하얀 티셔츠에 긴 청바지)을 하고 있었는데, 이런 이미지부터가 북한에서는 엄청난 충격이었던 것이다. 마치 극성 아이돌 팬들이 하듯이 북한 젊은이들이 임수경에게 달려들어 포옹을 하고 격하게 스킨십을 해 대서, 보호위원이 진땀을 빼며 이들을 떼어놓는 모습이 영상으로 찍히기도 했다. 후에 임수경이 남한으로 돌아갈 때 그녀의 안위를 걱정한 북한 중고생과 대학생들이 못가게 막으려고 스크럼을 짜고 함께 데모를 했으며, 단식까지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1990년 남북 고위급 회담차 북한을 방문한 남한 취재진에게 북축 안내원들이 눈물을 흘리며 임수경 언니를 살려달라고 애원까지 해서 남측 취재진들이 대단히 당황했다고 한다.

당시 북한에서 대학생의 이미지라고 하면, 그저 시커먼 치마와 흰색 저고리를 입고 당의 규율이나 주체사상만 외워야만 했던, 수동적이고 암울한 이미지였는데 작고 당돌한 남한에서 온 여대생의 캐주얼한 복장으로 통일, 통일을 외치니 신선한 충격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인민군 군인들이 부대 안에서 임수경 사진을 아이돌처럼 들고 다닐 정도였다고 하니….. 그래서 당시 북한 대학생들은 몰래 모여서 “남조선의 대학생이 저렇게 당당하게 다니는데 우리는 뭐냐” 라고 한탄 비슷하게 말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45일간의 방북을 마친 임수경은 그해 8월15일 문규현 바오로 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 이후 대한민국 법원은 임수경과 문규현신부에게 국가보안법상 특수탈출 및 잠입, 회합, 고무찬양 등을 적용해 최종 대법원의 판결로 징역5년과 자격정지5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이들은 3년5개월간 복역 후 1992년 12월24일 성탄절 특사로 가석방되었다. 이상은 그 당시 북한에서 세계청년학생축전때 한국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를 참고로 삽화 하여 설명을 드렸다.

이어서, 그 당시 전 세계에서 7만여명의 젊은이들이 축전에 참가하겠다고 신청을 했다. 그런데 그들 중에 70~80%는 기독교 국가였다. 기독교나 카톨릭 국가에서 청년들이 북한에 왔을 때 이들이 가장먼저 무엇을 찾을까? 교회이다. 만약 평양에 왔을 때 교회가 안 보인다면?, 그들에게는 의문점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결국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는 지시를 내려, 종교를 말살했던 이들이 1988년 급히 봉수교회를 설립한다. 이어서 칠골교회, 장충성당이 건설된다. 교회를 건설하고 목사와 신부(이들은 주체사상이 철저한 가짜 목사이다)를 내려 보냈다. 노동당원과 가족을 선별해 가짜 성도를 배치했다. 매주 일요일 아침10시에 주일예배를 본다. 평양에 와 있는 외국인들이나 학생을 대상으로 ……… 일반인들은 북한교회에 신자가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김일성은 기독교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가짜 신자로 채우고 주일예배를 하는 과정에서 과연 그들이 기독교 사상에 물들지 않을까 궁금해 했다. 행사를 위해 했다고는 해도 계속 말씀을 듣고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부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기독교에 빠지게 된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오지 않으면 강제로 오게 만들었는데, 몇달이 지나고 난 후에는 교회출석부가 사라졌다. 출석을 체크하지 않아도 교인들은 자발적으로 나왔다. 어느 외국인이 물어보니 일요일이 되면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교회로 향하게 된다고 말했다. 교회에 오면 재미있다. 노래방에는 못 가도 이곳에 오면 노래 부르고, 30~40분동안 편안하게 있게 되니까….. 그리고 목사님이 성경책을 읽어주면 처음에는 잠을 잤지만 점점 더 그 내용에 심취하게 되고, 그 내용에 따르게 된다. 목사와 같이 성경낭독을 하다보면 이들이 점점 더 깊이 빠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감시원은 당국에 이러한 사실을 보고를 하게 된다. 이렇게 되니 이후부터는 동원시킬 인원을 절대로 더 늘리지 말고 철저히 단속을 했다. 가짜 성도가 믿음이 생겨서 진짜 성도가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김일성이 알게 된다. 주체사상에 철저히 쇠뇌 되고 물이든 사람들이 믿음을 갖게 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기에 즉각 교회 문을 닫아버린다. 그리고 봉수교회 근처에 망원경을 설치하고 주일예배시간에 사람들이 나타나는지를 감시한다.

전에 가짜로 오던 신자들이 주일 오전10시가 되면 교회주변에 나타나 어슬렁거리며 배회를 한다. 그러면 이들을 잽싸게 잡아들여 어디론가 끌고 간다. 끌려갔던 사람은 몇달동안 보이지 않다가 몰골이 앙상해져 뼈만 남은채 집으로 돌아온다. 사람들에게는 자기가 어디로 잡혀가서 무슨 일을 당했는가를 일체 함구하며 조용히 힘겹게 지낸다. 겉으로는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선전하지만, 실제 내적으로는 무서운 고문과 폭행, 징벌로 종교를 말살시키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기독교인(가톨릭 포함) 신자가 있다면, 그러한 사람을 보고 신고를 하면 그 신고자는 보상금을 받는다고 한다.

이러한 실정이니, 북한에서는 종교 활동이 지하로 스며들수 밖에 없다.

북한 사회에서 하나님을 믿는 비밀 신자가 약 10만명이나 된다고 하니, 종교는 북한 체제를 흔드는데 악성 암 덩어리와 같은 존재라고 하여 저들은 저렇게 핍박을 가하고 있는지 모른다. 다음주에는 북한의 배급제에 대한 이야기이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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