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인정을 베푸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도리다.

<김명열칼럼> 인정을 베푸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도리다.

우리나라 말 속담에, “콩 한쪽도 반으로 나누어 먹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콩 한쪽의 소소함도 정성으로 나누어 먹을 수 있다는 뜻과 더불어 작은 것도 나눌 줄 아는 사람만이 실로 사람다운 사람이라는 뜻이 은연중 내포되어 있다. 이는 나눔의 미덕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옛날 나의 어린시절, 너나 할 것 없이 넉넉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가난하게 살던 시절에는 밥을 굶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그 시절 밥 한 그릇이라도 굶고 있는 그들에게 나눠 먹으면 그들은 생명의 연장식이 되는 것은 물론, 그 밥속에는 보이지 않는 인정과 사랑이 듬뿍 담겨져 있던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이야말로 보답을 바라지 않는 진정한 베풂의 자세, 나눔의 아름다움을 실천하며 살아오신 분들이다.

오늘날 우리네 삶의 현실은 어떠한가?에 대하여 스스로 물어본다.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라면 남의 것도 거리낌 없이 손을 대거나, 이타적으로 살면 결국 자신만이 손해 본다는 생각에 남에게 베푸는 것을 머뭇거리며 망서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베풀고 나눌 줄 아는 사람은 어디를 가나 사랑과 환영을 받으며,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것이다. 현대는 봉사하는 삶이 존경을 받으며 봉사의 가치가 더욱 빛나는 시대이다.

사회나 불쌍한 이웃을 위하여 나의 가진 것을 함께 나누고 따뜻한 마음과 사랑을 베풀어주는 것이 인간 최고의 덕목을 쌓아가는 길이 아닐까 싶다.

전남 구례 에는 조선 영조시대에 지어진 가옥 운조루(雲鳥樓)가 있다.

이 집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 라는 글이 적혀있는 쌀뒤주 가 하나 있는데, 타인능해 란 다른 사람도 쌀뒤주 덮개를 열수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식량이 필요한 사람은 언제든지 주인의 눈치를 보지 말고 곳간 채 앞의 뒤주에서 쌀을 퍼 갈수 있게 하였다. 덕을 베풀면서도 가져가는 사람을 배려해 그렇게 하였다고 하니 200여년도 훨씬 넘은 그 시대에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에 옮기며, 요즘 시대에 말하는 사회복지의 한 부분을 실현한 셈이다. 우리나라는 옛부터 이러한 아름다운 미덕이 소문없이 고을마다 존재했기에, 우리 민족은 온갖 시련속에서도 유구한 세월을 견디어 왔을 것이다. 우리의 정서 속에는 이런 인정이 흐르는 따스한 마음들이 자랑스러운 가치인 미풍양속으로 남아 있다. 세상은 독불장군이 아닌 이상 상부상조 없이 홀로 살수 없는 것이고 공동체 속에 어우러져 그 일부가 되어야 하는 것이 사회생활이 아닐까 한다.

농경문화는 대한민국 농촌 사람이 머물고 있는 곳 어디서도 토속의 향과 인정의 반석위에 진한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굵고 깊게 패인 주름의 부모님은 지게에 의지하여 농사를 짓고, 암소에 쟁기를 달아 논과 밭을 경운하던 농촌은 지금 그 어느 곳에서도 그러한 자취와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게 됐다.

마치 쓰다가 잘못 써서 싹싹 지운 지우개의 흔적만 어렴풋이 머릿속에 가물가물 남아있을 뿐이다. 농경의 문화와 농촌의 전통, 매일 보는 사람들이지만 밤새 안녕하였는지 가 궁금한 것이 오히려 이웃 가족의 풋풋한 심정으로 다가오는 것이 바로 농촌의 배려였고 사랑이었다. 우리 부모님 세대때는 마를 수 없는 이웃 간의 정을 베게 삼았고, 그 토대위에 어울림이 있었다. 그 어울림은 나눔의 모든것이 농촌을 지배하였고, 그것은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의 인생철학이었다.

6.25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15일,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인천이 수복되고, 곧 이어 9월28일에는 서울에 주둔중이던 북한군을 완전히 소탕했다. 그 결과로 서울 이남, 낙동강 전선까지 치고 내려왔던 북한 인민군은 완전히 고립되어 각자 도생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길을 찾아 그룹을 지어 북쪽으로 후퇴해 도망을 가고 있었다. 그렇게 후퇴하며 도망을 가던 인민군의 일부 무리들이, 마침 산 계곡 밭, 골짜기 밭에서 가을걷이로 한창 바쁘게 일하고 계시는 나의 부모님 곁을 멀지않은 거리에서 이동 중이었다.

그들 일행 30여명은 산자락 비탈길을 부지런히 올라가고 있었다. 그때 맨 아랫 쪽에서 힘겹게 다리를 절뚝거리며 일행들을 따라가는 한 인민군 병사가 있었다.

나무지팡이 목발을 짚고 힘겹게 오르는 병사 옆에는 일행중 한명이 그를 부축이고 있었다. 그때 그 발을 다친 병사가 ‘악!’하며 비명을 지르고 산 아래쪽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그의 곁에 부추기고 있던 병사 한명이 다급하게 외쳤다.

“혀~엉 괜찮아? 형아, 우리 인제 빨리 올라가야 돼, 국방군(국군)한테 잡히면 우린 죽어, 형 괜찮은거야? 일어날수 있어?” “진영아(동생 부르는 소리), 나 더 이상 못가겠어, 정말로 죽을 지경이야, 네 총으로 나를 죽여줘, 그리고 너 혼자 올라 가”.

그렇게 서로 부둥켜안고 울부짖는 그들의 곁으로 나의 아버지가 다가가자, 그들은 살려달라는 애원조로, 눈물이 잔뜩 고인 서글픈 얼굴로 나의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알고 보니 그들은 형제지간으로, 북한의 평안도에서 강제 징용으로 인민군 군대에 끌려온, 나이가 16세, 18세 되는 나이 어린 소년병들이었다. 그들 형제는 낙동강 전선에 투입돼 국군과 싸우다가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선이 고립되자 퇴각(후퇴) 명령을 받고 도망을 하다가, 어느 바윗돌 절벽에서 발을 헛디뎌 형 되는 사람이 굴러떨어져서 발목이 골절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한 형편으로 일행들과 함께 힘겹게 후퇴를 하던중,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도저히 아픈다리를 이끌고 북쪽으로 이동을 하기가 불가능 하자, 자기의 동생에게 총으로 쏴서 죽여 달라고 애원을 하는 중이었다.

그들 형제의 안타깝고 불쌍한 장면을 목격한 나의 부모님은 가을걷이 하는 바쁜 일손을 멈추고 그들을 우리 집으로 인도했다. 다친 형을 나의 아버지는 업어서 데려와 사랑채에 눕히고, 미움을 쑤고 고구마도 찌고 따뜻한 쌀밥도 지어 먹이며 극진히 간호를 해 주었다. 그들 나이와 비슷한 누나와 형이 우리 집에는 있었다. 자식과 같은 연민의 정, 측은지심이 생겨나 그들을 자식처럼 보살펴 주었다. 북쪽에 있는 그의 부모님이 자기 자식들이 이렇게 다쳐서 고생하는 것을 안다면 얼마나 슬프고 마음이 아프겠는가? 를 생각하며 정말로 열심히 그들 형제를 치료하고 건강을 돌봐 주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일주일 정도를 휴식을 취하며 잘 먹고 치료(한방 약)를 받은 결과 그들은 몰라보게 건강을 회복했고, 그렇게 되니 어느날 저녁 그들은 야음을 틈타 북쪽으로 떠나가겠다고 이별을 고했다. 그러면서 나의 부모님에게 “이렇게 베풀어 주신 인정과 은혜는 평생 잊지않겠습니다”를 연발하며 그들은 떠났다.

이들이 우리집에 머무는 동안 우리들 5남매 에게는 함구령이 내려졌다. ‘우리집에 인민군 병사가 와 있다는 것을 절대로 누구에게도 얘기해서는 안된다’고….. 만약에 그랬다가는 집에서 쫓겨날 줄 알아라, 하시며……. 우리 형제자매들은 서로가 입단속을 시키며, 특히 막내인 나에게는 종주먹을 대고 친구들에게 절대로 얘기하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다.

그런 와중에 일주일을 우리집에서 잘 지내다가, 그들 인민군 병사 형제는 우리 부모님이 싸 주시는 식량(고구마, 밥, 감, 밤 등의 과일)들을 그들의 배낭에 잔뜩 싸 짊어지고 북쪽으로 올라갔다. 눈에는 뜨거운 눈물을 멈추지 못한 채…….. 국군들에게 잡히지 말고 집에까지 잘 가거라… 하는 우리 가족들의 이별 인사를 받으며 그들 형제는 북쪽을 향해 어둠속으로 사라져 갔다.

엄격히 따진다면 우리 엄마 아버지는 적군을 도와준 이적행위자 이다. 이적행위(利敵行爲)란 적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 나의 부모님은 진짜로 이적행위자 이고, 처벌을 받을 수 있다. 범법 행위를 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나의 부모님은 이적행위나 범법행위 같은 것을 모르신다. 다만 사상이나 국적, 이념을 초월하여 며칠 동안을 먹지 못하고 굶주려 고생하는 그들, 그리고 다리조차 다쳐서 기진맥진 탈진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쓰러진 부상병을 그대로 못 본 척 방관한다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닌 것이다. 때문에 우리 부모님께서는 인도주의적 입장에, 사람의 기본 도리인 인정을 베풀어 그들을 돕고 살려준 것이다. 누가 이러한 나의 부모님에게 적군을 도왔다고 징벌 할 것인가? 나는 나의 부모님께서 불쌍한 이들을 위하여 사랑이 담긴 인정을 베푸셨다고, 칭찬을 해 드리고 싶다. 인도주의란, 모든 인간은 평등한 인격과 존엄성을 지닌 동등한 인간이라는 입장에서, 인류에게 있어 바람직한 일들, 인종, 민족, 국적, 사상, 체제, 종교 여하를 초월하여 타인에게 실천하는 일, 즉 인정을 베푸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러한 일이 있고 난후, 얼마 후 우리 부모님께서 북한군 병사를 돌보아 주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나의 부모님은 경찰서에 잡혀가셔서 모진 고문을 당하셨고, 몽둥이로 사정없이 두들겨 맞았으며, 어머님은 어깨뼈가 골절되기도 했다. 먼 후일에는 어깨를 잘 못 쓰셔서 농사일을 하시는데 평생을 고생속에 지내셨다. 그리고 3~4일을 밥도 안주고 굶기며, 뜨거운 물고문도 당하셨다고 한다. 이러한 무섭고 혹독한 고문과 폭행 속에 한달 여를 유치장 속에서 고생하시다가, 몸이 너무 지치고 매를 맞아서 폐인이 되다시피 하니, 유치장에서 죽을까봐 풀어주었다.

그렇게 매일같이 똑같은 질문과 고문 속에서도, 나의 부모님께서는 끝까지 굽히지 않고 “똑같은 일이 되풀이 돼도 우리는 그렇게 죽어가는 사람을 그냥 두지는 않겠다”면서,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잘못했다고 싹싹 빌면서 용서를 빌었다면 좀더 일찍 석방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 부모님께서 지은 죄는 이적죄(利敵罪)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의 엄마 아버지는 이적죄가 아니라 “인정을 베푼 사랑의 죄” 라고………..! <문학 작가 김명열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377/2023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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