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무더운 여름철의 보신탕 이야기

<김명열칼럼> 무더운 여름철의 보신탕 이야기

몇십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개를 잡아서 보신탕으로 요리해 먹는 것이 일상으로 보편화된 사회 풍습이었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는 보신탕 문화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국내외에 적지 않다. 찬반의 의견을 떠나 보신탕이 전통적인 여름철의 복(伏)날 음식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옛날에는 개를 애완용으로 기르기 보다는 거의 대부분 집을 지키는 용도로 많이 길렀다. 가난한 집안에, 사실 가져갈 보물도 없었는데 그렇게 생각이 미치고 보니, 실인즉 집 지키는 용도도 아니고 그냥 어린애들이 응가를 해놓은 똥을 처리한다든지 식사하고 남은 찌꺼기들(잔반)을 청소해주는 청소견? 처럼 기르기도 했다. 그렇게 제대로 잘 얻어먹지도 못하고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아가며, 주인에게 충성을 바치고 집도 지키며 결국 마지막에는 주인의 건강을 위해 기꺼이 몸을 바치는 불쌍한 견공들에게 몰인정한 인간들은 고마움이나 미안한 마음도 없이 매년 여름철이 되면 사정없이 개를 두들겨 패 죽여서 보신탕으로 해 먹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개는 인류와 함께 해왔던 동물로서 더불어 사는 반려동물로 여겨왔지만, 아울러 많은 민족들에게 훌륭한 식 재료이기도 했다.

개고기를 먹는 민족은 한국뿐 아니라 중국이나 마야의 기록에도 남아있는 등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개고기는 조선시대의 평민들이 자주 먹던 고기였으며, 어느 푸줏간에서나 개고기를 볼 수 있었다. 조선의 왕 정조도 보신탕을 즐겼는데 영의정이었던 김상철도 이를 찬성했다고 한다.

즉 서민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던 셈이다. 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이전, 당시 외무독판 조병직이 각국 외교관을 초청해서 서양식 고기 요리와 함께 보신탕을 대접했다는 기록이 프랑스의 시사잡지 일뤼스트라시옹(Illustraation)지에 실린 적도 있다. 처음으로 보신탕이라는 요리를 서구 언론에 소개한 나라가 21세기까지 유독 보신탕문화에 대한 지적이 많이 나오는 프랑스라는 사실이 아이러니 하다.

특히 임진왜란이나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등 먹을 것이 극히 귀했을 때 많이 먹었으며, 게다가 여름처럼 더워서 체력 소모가 많은 계절에는 쉽게 구할 수 있는 훌륭한 단백질 원이 필요했는데, 소는 농사일에 필요했고 돼지는 잔칫날에나 잡는 귀한 동물이었다. 그래서 특히 서민들이 고기로 먹을 수 있는 만만한 것은 개나 닭이었다. 특히 탕으로 먹는 대표적인 것이 개였기 때문에 개장, 혹은 개장국은 곧 탕을 대신할 정도로 흔하게 쓰였다. 육개장이 소고기(육)를 넣어 끓인 개장인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보신탕은 한국의 여름철 보양음식 중 하나가 되었다. 특히 복날에는 삼계탕과 더불어 함께 가장 큰 인기를 누리는 음식이기도 하다. 실제로는 다른 여타 고기들과 영양학적으로 크게 다를 게 없으며, 딱히 ‘보신’을 위해 먹을 이유는 없다. 그저 과거엔 육류를 섭취할 길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가장 흔한’ 고기를 먹어서 몸을 보신하는 탕이라 보신탕이 된 것이다.

오늘은 과거 한국의 여름철 복중의 대중적 음식 중 인기음식 요리였던 보신탕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기로 하겠다.

예전에 나의 젊었던 청년시절의 이야기다. 나의 의지나 뜻에 전혀 관계없이, 아주 억울하고 분하고 안타깝게 우리 집에서 기르던 멍멍이(개 이름=마루)를 어이없게도 보신탕으로 잡아먹은 일이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고등학교때부터 나는 서울에 올라와 공부를 하고 있었다. 시골에서는 나의 부모님께서 힘들게 농사를 지으시며 형과 나를 서울로 유학 보내 공부를 시키고 있었다. 바로 윗 형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을 나와 모 대학교에서 조교수로 근무 중이고, 나는 대학공부를 하고 있었다. 나는 서울에서 공부를 하면서 방학이 되면 고향에 내려가 틈나는 대로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을 도와드리고 있었다.

어느 해 여름, 그 해도 여름방학을 맞아 나는 부모님의 일손을 도와드리며 방학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나의 시골 고향마을에는 내 나이 또래의 친구들 10여명이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가정 형편상 상급학교에 진학을 못하고 그대로 부모님의 가업을 이어받아 농사일에 종사하고 있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중 일부는 벌써 장가를 들어 가정을 꾸린 친구도 있었다. 그 친구들은 몇달에 한번씩 방학을 맞아 시골에 내려오는 나를 무척 반기며 손님처럼 특별히 잘 대해 주었다.

우리는 서로 만나면 흉허물 없이 장난치며 놀고 술 마시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한 동네에서 서로 엇비슷한 해에 같이 태어났고, 국민학교(초등학교)도 같이 다니며 불알친구로 20여년정도를 부대끼며 지내다 보니 그야말로 격이 없고 죽마고우 절친들이었다.

그해 여름도 무척 더웠다. 무더운 여름, 밤이되면 동네 친구들은 이따금씩 야음을 틈타 근처 타동네 사람이 농사지은 참외밭에 몰래 기어들어가 참외와 수박을 서리(훔쳐오는것) 해와 마을 앞 시냇가 모래벌판에 모여앉아 서리 해온 수박이나 참외를 먹으며 밤새도록 시간가는 줄 모르고 떠들며 장난치고, 한편으로는 이웃동네 처녀 꼬신 얘기 등등을 어느 친구가 개선장군처럼 신나게 자랑하면, 친구들은 헬렐레 입을 다물지 못하고 부러운 듯 듣고 있었다.

어느날 저녁에도 우리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모두가 냇가로 나와 시끌벅적 떠들며 놀고 있었다. 그때 어느 친구가 이러한 의견을 제시했다. “야, 우리말야, 오랜만에 명열이도 방학해서 내려왔는데, 날씨도 덥고 하니 보신탕이나 해 먹자” 이 말이 떨어지자 마자 모두가 “좋다 좋아, 좋은 생각이다. 그렇게 하자. 그런데 누구네 개를 잡아먹지?” 이렇게 서로의 의견이 오고 가고…… 논의 끝에 내 이웃에 사는 창배네 개가 덩치도 크고 누렁이 황구인지라 맛이 좋을 것 같아서 그 개로 보신탕을 해 먹기로 의견 일치를 보았다. 그곳에 모인 친구 모두가 개값을 분담하여 모아서 창배에게 주기로 했다.

이틀 후, 대낮부터 모인 우리는 각자가 주어진 임무 분담대로, 누구는 솥단지 짊어지고 오고, 누구는 된장사발 들고 오고, 누구는 고춧가루, 파, 마늘, 깻잎, 칼, 도마, 불태울 장작, 숟가락, 젓가락, 국그릇, 접시, 양재기 등등 벼라별 살림살이 용품들을 저마다 들고 왔다.

인범이는 자전거 타고 면소재지 양조장에 가서 막걸리와 독구리 막소주 사오고… 그리고 친구 몇명은 개 올가미 들고 창배네 집으로 가서 창배네 개 붙잡아 오려고 떠나고……. 이렇게 모두가 손발이 척척 잘 맞으며 준비에 몰두하고 있을 때, 나의 아버지 께서 시냇물 건너 논배미에 일이 있어 가시다가 우리들을 보고 “너희들 뭐 하냐?” 고 물으신다.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네 명열이 위해 개잡아서 보신탕 끓여줄라고요” 이 말을 들으신 나의 아버지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신다.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에 온 아들을 위하여 동네 친구들이 보신탕을 끓여 대접해준다니 이렇게 고맙고 기쁜일이 또 있을까? 하신 표정이다. 그런데 아버지 말씀이 나를 보시고 함께 물건너 논에 가시자고 하신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것 이라고 하시며……….

아버지를 따라 건너편 논에 갔더니, 아버지는 건너동네 어르신이 새참을 드시며, 와서 ‘약주한잔 함께 하자’고 아버지를 부르신다. ‘잠간 다녀오마’고 하시며 아버지는 떠나셨다. 나는 이곳저곳 논배미의 물꼬를 터주면서 물을 대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시간이 꽤나 흘러갔다. 얼굴이 벌개지셔서 술기운이 돋은 얼굴로 돌아오신 아버지는 “오래 됐구나” 하시며 가자고 하신다. 시냇물을 건너 돌아와 보니 친구들은 모든 것을 끝마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개는 가죽을 불에 그슬려 없애고, 보신탕으로 끓여 나온 개장국은 구수한 냄새와 더불어 입맛을 자극했다. 특별히 나와 우리아버지 에게는 개고기를 듬뿍 더 얹어서 주었다. 막걸리와 소주를 곁들여 먹으며, 주위에서 일하는 친구 아버지들도 모두 와서 보신탕 잔치가 벌어졌다. 막걸리 두말이 금방 동이 났다. 소주도 조금 남았고.. 모두가 얼굴이 시뻘게 져서 ‘콩팔이 새삼육’을 읊으며 개똥철학들을 설파? 하고, 분위기는 한껏 고조되었다.

동네잔치가 된 보신탕 파티는 해가 뉘엇뉘엇 해서 끝났다. 땅거미가 어둑어둑 해져서 집에 돌아오니, 꼬리치며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는 마루(우리집 개 이름)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 나와 아버지는 술에 대 취한 상태라, 나는 그대로 마당 한편에 놓인 평상에 그대로 누워버렸다. 잠에서 깼을 땐 이튿날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늦은 아침이었다.

어머니께서 차려주신 밥상을 앞에 놓고 숟가락으로 해장국을 떠먹으려고 하는데, 대문을 열고 친구 몇명이 들어온다. 아니 애들이 아침부터 웬일이지? 하고 생각을 하는데, 나의 말은 대꾸도 하지 않고, 친구들 4명이 다짜고짜 나의 어머니 앞으로 다가와 어느 녀석은 무릎을 꿇고, 어느 녀석은 90도 각도로 허리를 굽혀서 하는 말 “어머니 죄송합니다. 저희들이 죽을죄를 졌습니다. 어제 낮에 보신탕 해먹을려고 옆집에 있는 창배네 개를 잡으러 왔는데 창배네 개는 창배엄마 따라서 멀리 골밭에 가고, 아무리 기다려도 그 개는 오지 않아서 할 수 없이 곁에 있는 명열네 개, 마루를 잡아먹었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아니? 저애들이 지금 뭐라고 하는거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나도 모르게 “이 개같은 새끼들아, 왜 하필이면 우리집 개야? 이 나쁜 놈들아…. 아이고 정말 미치고 팔짝 뛰겠네…. 아이고 아이고 어떻게 우리 마루 불쌍해 어떻게 해….엉 엉 엉 눈물이 바가지…….”

그날 이후 나와 아버지는 본의 아니게 우리집 개 마루를 잡아먹은 공범이 되었다.

곧바로 어머니의 무시무시한 압박이 가해졌다. 아버지가 논밭에 나가셔서 일하시는데, 일절 새참도 없고, 밥도 혼자서 차려 잡수셔야 했다. 술도 일체 입에도 못 대시고…..

그리고 나는, 어머님의 보이지 않는 심한 정신적 가해로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이튿날 곧바로 보따리 싸 들고 서울로 줄행랑을 놓았다. 방학이 끝나려면 열흘은 더 있어야 되는데………

지금도 보신탕 이야기가 나오면 잊을 수 없는 그 ‘악몽 같은 추억의 보신탕’이 생각난다.

이후부터 나는 두번 다시 보신탕을 먹지도 않았고 보신탕을 파는 식당 근처에는 얼씬

도하지 않았다. 아무리 날씨가 무더운 여름이라 해도 보신탕 이야기가 나오면 으스스하며 소름이 돋아난다. <문학 작가 김명열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370/2023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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