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왜? 세상은 악한(나쁜) 사람들이 잘 살까?……

<김명열칼럼> 왜? 세상은 악한(나쁜) 사람들이 잘 살까?……

인간 세상은 선(善)과 악(惡)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역사가 형성되어 왔다.

탈무드(Talmud=유대인의 율법학자에 의해 사회전반에 대한 사상(事象)에 대한 구전(口傳), 해설을 집대성한 책)가 전하는 이야기다.

아주 오랜옛날 성경말씀의 구약시대 이야기다. 노아가 방주를 짓고 모든 짐승들을 암수 한쌍씩 받아들였다. 그런데 선(善)이 혼자서 들어오는 것이었다. 노아가 선을 향해 말했다. “너는 왜 혼자 들어 오냐?” 승선을 거부당한 선은 자신과 짝이 될 만한 것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악(惡)을 데려왔다. 그제야 노아는 그들을 받아들였다. 세상에 선과 악이 공존하게 된 이유다. 세상에 존재하는 악에 대한 유대인다운 해명처럼 보인다. 세상에는 분명 선과 악이 공존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필연적으로 부닥치게 될 악의 문제는 누구든 예외가 없다. 그리고 악을 선으로 갚음으로써 짐승의 본능을 없애야 한다. 선과 악이 동시에 다가올 때는 선을 먼저 택해야 한다.

선이 없을때 악이 득세하는 것이다. 빛이 없으면 자동적으로 어둠이 존재하듯 선이 없는 것이 곧 악이다. 우리는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

‘인간의 몸 안에는 언제나 선과 악이 공존한다’ 나는 이것을 확신하며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여러 학설이 있는데, 한국의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그중 세 가지가 실려 있다. 본디 순선(純善)한 성품을 타고난다고 보는 성선설(性善說), 본성이나 감성적 욕구의 악함을 가정하는 성악설(性惡說), 선악이 인간의 고유한 속성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선택과 판단이나 환경에 달려 있다고 보는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 등이다. 이들 학설의 공통점은 선과 악의 대립 구도로 본성을 탐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선과 악의 갈등을 다룬 문학작품 또한 여럿 있는데, 그중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일종의 실험을 소재로 한다. 이 실험은 본성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며 그 둘이 분리될 수 있다는 가설에서 출발한다. 지킬은 이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갖가지 약품을 사용해 보는데, 결국 선한 자신과 악한 자신을 분리해내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분리된 선과 악의 본성으로 생존할때 어떤 결과가 나타났는지를 관찰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에서 선은 쾌활함, 근면성, 절제심,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노력 등으로 구체화 한다. 반면 인간의 치명적인 부분이라 명명한 악은 기형과 타락, 유희에의 탐닉, 오만함 등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이런 특성이 과연 완전히 독립적이며 절대적으로 정의되는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쾌활함’은 상황과 정도에 따라 유쾌함이 될 수도, 경박함이 될 수도 있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에서 가장 부지런한 말(馬)인 복서의 정직과 근면은 스퀼러의 탐욕에 희생되는 덕성이다. 지나친 절제는 경직된 삶을 이끌고,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또 다른 타인의 희생이 동반되기도 한다. 악 또한 마찬가지다. 기형은 정상과 대조되는 모양인데, 정상은 문화마다 다르게 정의되므로 기형 또한 확정할 수 없다. 타락 또한 제각기 다른 가치관에 따라 그 결정 수위가 달라질수 있다. 유희에 탐닉하는 것은 과연 어디까지 인지 모호하다.

결국 선과 악은 정도와 상황, 가치관 등에 따라 달라지는 주관적 개념이며 모든 인간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이 점을 고려하면 순수 악을 정제하고자 했던 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성공을 고백한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어두운 욕망을 분리된 다른 존재의 것으로 돌리고, 지킬의 모습으로는 여전히 위선의 세계에 머물수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하고 생각한다. 지킬과 하이드의 집은 매우 다른 모습이다. 하이드의 집은 다른 집들과 떨어져 있으며 오랫동안 더럽게 방치된 느낌을 준다. 문에는 초인종도 없고, 문을 두드리는 쇠 장식도 없다. 하이드의 집은 단절과 고립, 외면 등을 상징한다.

반면 지킬의 집은 부와 안락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저택이다. 벽난로가 온기를 뿜어내는 넓은 홀은 방문객에게도 편안한 장소다. 지킬의 집은 정돈되어 있고 청결하며 평화롭다. 지킬과 하이드의 전혀 다른 외모처럼 이들이 사는 집의 모양도 대조적이다. 그런데 지킬과 하이드는 한 사람이고, 두 집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이드는 만들어진 괴물이 아니라 지킬 스스로 냉대한 자신의 일부분이었던 것이다.

‘지킬박사와 하이드’는 처음 책이 출간됨과 동시에 4만부가 판매되고, 문학뿐 아니라 연극, 영화, 뮤지컬 등 수많은 장르로 리메이크 되어 오늘날 까지도 강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작품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이 살았던 19세기 후반 영국사회를 풍자하려고 했다.

그가 바라본 당시 빅토리아 여왕 시대는 산업혁명의 성과로 대영제국의 절정기를 맞았지만, 도덕적으로는 크게 타락해 위선이 가득한 시대였다. 겉으로는 근엄하게 체면을 차리면서도 속으로는 탐욕으로 가득찬 사람들,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두 모습은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이 가진 이중적인 모습과 다름없었다.

‘나는 인간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다면적이며 이율배반적인 별개의 인자들이 모여 이뤄진 구성체이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아무리 선한 인간이라도 그 안에는 악한 면이 존재해 있고, 아무리 악한 인간이라도 그 안에는 선한 면이 존재한다. 내면에 공존하는 선과 악의 이중성으로 인해 우리는 매순간 선택의 길에 놓인다. 그리고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게 된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선하게 사는 사람보다 악한 사람이 더 잘되고 잘 사는 것을 볼 때, ‘과연 하나님은 살아계신가?’ 하는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조차 ‘귀신은 저거 안잡아가고 뭐 하냐?’ 하며 속상해 하고 혀를 차기도 한다. 착한 사람이 형통하고 악한 사람은 그 죄값을 치러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 반대인 경우가 종종 있다. 양심대로 바르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더 어렵게 살고, 비 양심적인 사람들이 더 부자가 되고 명예까지 누리며 살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양심대로 살기를 포기하고, 악한자들이 걸어간 길을 뒤따라간다.

이러한 모순된 세상은 비단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수천년 전에 쓰여진 성경에서도 이러한 왜곡된 세상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 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개역 개정판 전 8:11’. 이처럼 두려움을 모르는 담대한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수 없다. 따라서 악의 문제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악의 문제는 종말의 관점에서 만 이해될수 있다. 물론 기독교의 종말은 예수님의 재림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에 모든 악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의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은 보상을 받을 것이다. 그때에 세상의 불공평과 악의 문제에 대한 모든 의문점들이 다 풀리게 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주권이 회복되며 그 분의 공평과 의로우심이 우뚝 세워지게 될 것이다.

내가 보기에 사람은 태어나면서는 모두 착하고 정직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다.(性善說). 그러나 사물을 접하면서 선한 마음은 악한 마음으로, 욕심으로 변하여 결국에는 자신의 덧에 자신이 걸리는 꼴이 되고 만다. 사람은 세월따라 환경과 교육과 습관에 따라 마음이 성숙하여 선한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분류되는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죄악은 탐욕과 어리석음에서 싹이 트는것이다. 그래서 과욕은 자아를 망친다는 말처럼 주어진 운명을 슬기롭게 받아들여 오늘보다는 내일을 보다 나은 나은 나의 발전으로 삼는다면 어떤 분쟁도, 그리고 마음의 병들도 없이 항상 편안한 마음으로 생을 마칠 것이다.

장수촌에서 장수의 비결을 물어보면 하나같이 하는 말이, 마음을 비우고 항상 긍정적인 마음으로 편안히 사는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잘못된 사람들은 그렇지도 않다.

남이 잘못되는 것을 보면 내가 잘된것 보다 더 좋아하는 아주 비열한 비 인간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수있다.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 우리가 일상 생활속에서 하는 말 속에도 선과 악이 있다고 한다. 선한 말은 내 마음과 몸을 건강하게 하고, 악한 말은 내 몸을 상하게 하고 있는데, 그것이 표면적으로 나타나지 아니 하기에 우리들은 그것을 모르고 자신에게 병이 되는 말들만 아무런 생각없이 하고 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선행은 그 성과가 인격을 빛내며 악행은 그 해독이 자신의 인격을 해치고 있다.

그러 하기에 참다운 행복이란 남으로부터 받는것이 아니라 내가 남에게 주는 것이란 말이 있다. 물결이 잔잔하면 물 위에 그림자가 비치게 되나 물결이 파도를 일면 그 물결속에서 그림자는 커녕 자신의 얼굴도 볼수 없는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마음이 조용하면 성인의 경지에 오르지만,그 마음을 조용히 하려면 남을 지배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남의 의견을 존중하고 모든 사람이 나보다는 낫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사물을 보아야 할 것이다. <문학 작가 김명열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353/2023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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