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욕심과 욕망이라는 덫

<김명열칼럼> 욕심과 욕망이라는 덫

나에게 존재해 있는 욕심이 완전히 소멸되면 마음속에는 변하지 않는 본심으로 가득 채워진다. 본심(本心)은 모든 존재들이 다 가지고 있는 공통의 마음이고 우주에 가득한 우주의 마음이다. 욕심은 사람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갓 태어 났을 때는 욕심이 없었다. 그때는 욕심으로 살지 않았다. 그때엔 배고프면 젖 달라고 울고, 배부르면 그만 먹었으며, 피곤하면 잠자고 쉬었다. 그러한 때에 모든 움직임을 주도한 것은 욕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연이었고 우주에 충만해 있는 우주적인 생명력이었다. 우주적 생명력은 우주에 존재해 있는 모든 존재에게 똑같이 적용한다. 그 우주적 생명력으로 움직이는 갓난아기는 우주의 모습이다. 그 갓난아이는 남이 잘된다고 해서 배 아픈 일이 없었으며, 생로병사의 고통도 없었다. 그랬던 그 아이가 자라면서 차츰차츰 욕심을 가지게 된다. 욕심은 ‘나’라는 관념이 형성되어 ‘나’중심의 삶을 살게 되면서 부터 생겨난다. ‘나’ 라는 관념은 원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이 살면서 의식속에 저장된 기억의 덩어리를 ‘나’ 라고 착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은 ‘나’란 것이 없어진다. 그래서 그는 ‘내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으면서 돌아다니는 것이다.

사람에게 ‘나’라는 관념이 생겨나면 ‘너’라는 관념이 생겨나고 또한 ‘그’라는 관념도 생겨난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의 관계는 경쟁관계가 되기 때문에 저절로 경쟁심이 생겨난다. 이 경쟁심이 바로 욕심이다. 욕심이 차츰 커져서 원래 있었던 우주의 생명력인 본심(순수한 마음)을 밀어내고 주인노릇을 하게 되면, 사람은 이제 욕심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비극적인 존재가 된다. 사람이란 참 주인을 몰아내고 자신을 비극적인 존재로 만든 가짜를 참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불쌍한 존재인 것이다.

이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욕망과 욕심속에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한창 잘 나가던 유명인 인사가 어떤 잘못으로 말미암아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추락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된다. 유명인이 얼굴을 화끈거리는 짓을 해서 언론매체에 보도되고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도 한다. 얼굴과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이 한번 오명을 쓰면 좀처럼 씻어내기가 어렵다. 그 자리에 오르기 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 것인데 추락은 일순간 이다. 속된 말로 ‘한방에 훅 간다’고 하는데, 불상사의 원인 중 99%는 지나친 욕심이나 그릇된 욕망 때문이다.

사람의 심리는 참으로 묘한 것이라서 출세한 사람, 즉 유명인이나 고위 공직자의 추락을 가슴 아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쌤통’이라며 고소해 하고 즐기는 경향이 있다.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는 남의 불행을 속으로 고소해 하는 심리학 용어인데, 인간이라면 누구나 타인의 불행에 은밀한 즐거움을 느끼는 심술궂은 본성이 있다고 한다.

2500여년전 서양철학의 기틀을 마련했던 플라톤과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결핍된 대상에 대한 사랑을 욕망이라고 인식했다. 이러한 인식은 서양철학의 큰 물줄기가 되어 오늘날까지도 도도히 흐르고 있다. 욕망의 본질은 결핍이고, 결핍이 있어야 채우고 싶으며, 그것을 채워가면서 행복을 느끼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이다.

내 몸, 즉 형이하학(形而下學)의 말단으로부터 시작하여 형이상학(形而上學)으로 이끌어 가는 욕망에 대한 담론은 상당히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다. 동양의 현자들은 일찍이 인간의 욕망을 주의깊게 들여다보았다. 멈출 줄 모르는 욕망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모든 잔인하고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 이었을 것이다. 동양철학의 우뚝 솟은 양대산맥을 이룬 유가(儒家)와 도가(道家)의 경전을 보면 욕심을 경계하고 위험시 하는 내용들이 참으로 많다. 모든 죄악의 씨앗은 욕심이다. 욕망과 욕심을 가장 경계하고 죄악시 하는 것은 불교 철학이다. 탐욕은 삼독(三毒)인 탐진치(貪瞋癡)의 첫번째로 반드시 제거해야만 깨달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불교의 경전에서 욕망은 곧잘 타오르는 불에 비유된다. 욕망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면 그 당사자를 만신창이로 만들기 때문에 그 끝은 언제나 비참하다.

별도의 비유를 들어 말한다면 욕망이란 씨종자와 같은 것이다. 밭에 씨를 뿌려야 싹이 자란다. 자신이 이루고 싶은 욕망의 씨앗을 ‘마음밭’에 심으면 욕심이라는 잡초가 심술궂게 돋아난다. 잡초의 생명력은 끈질기기가 이루 말할수 없이 강인하다. 조금만 내버려 두면 삽시간에 밭은 잡초로 무성해져서 농사를 망치게 된다. 그러기에 수시로 잡초를 뽑아내면서 곡식이 잘 자라도록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옛날 학창시절 때, 철학 강의 시간에 교수님이 불쑥 욕구, 욕망, 욕심, 탐욕에 대하여 말해보라고 하였다. 학생들은 저마다 그것에 대해 설명을 했는데, 교수님은 그 답변들에 대한 점수를 좋게 주질 않았다. 오랜 세월이 흘러간 어느 날, 과거 내가 모 사회단체의 회장을 역임하고 있을 때, 교양강의 시간에 나는 회원들을 향해 위와 같이 똑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회원들 중에는 한국의 유명 일류대학을 나온 지식층, 인테리 회원들도 많았는데, 그중에 한 아름다운 모습의 여성회원 한분이 ‘회장님, 혹시 금어초를 아십니까?’ 하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 꽃을 알고 있었지만 모른다고 말했다. 대답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작은 배려였다. 그녀의 대답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꽃의 모양이 금붕어를 닮아 금어초’라고 한다. 레이스가 달린 것처럼 아름다운 꽃이 시들어 말라 가면서 해골 모양으로 변하기 때문에 ‘악마의 꽃’ 또는 해골 플라워(Skull flower)라고 부르기도 한다. 꽃말은 ‘욕망, 탐욕’이다. 건강한 욕망은 꿈이며 희망이기 때문에 피어나는 꽃처럼 아름답지만, 도가 지나쳐 탐욕의 단계로 들어서면 급속도로 무섭고 끔찍한 해골처럼 변한다는 것이다. 내가 듣기에 굉장히 재치있는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꽃과 꽃말, 피어 있을때와 시들었을 때의 모습을 빗대어 욕망과 욕심을 잘 설명한 것 같았다. 세상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많이도 배우게 된다. 통찰력과 분별력이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배울 점이 많지만, 나이 젊은 여인, 지혜로운 그 회원 여인에게서도 한수 배우게 된 점을 기쁘게 생각했다.

사람이 죽을 때 모든 사람들은 거의가 다 손바닥을 펴고 죽는다. 왜 손바닥을 보이고 죽을까?……. 인간이 탐내는 것은 그 종류를 헤아릴 수조차 없이 너무나 많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탐낸다. 좋은 집과 고급 승용차, 값비싼 보석류와 상품들을 소유하려고 한다. 재물뿐만 아니라 아름답고 매력 있는 사람까지 소유하길 원하고, 인간이 만들어놓은 권력을 차지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며 욕심을 부린다. 아흔아홉개를 가지고도 한개를 가진 사람의 것을 빼앗아 100개를 채우려고 한다. 승려로서의 길을 꿋꿋하게 걷다가 열반에 든 법정스님이 남긴 화두는 ‘무소유’이다. 산문집 ‘무소유’에 담긴 골수는 ‘맑은 가난’이다. 영혼이 깨어 있으려면 가난은 필수조건 이라고 넌지시 귀 뜀 한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불필요한 것을 가지면 그것에 얽매어 마음의 평안을 잃게 된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 空手去),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들 인생이다.

<7면으로 이어짐>

유대인의 생활 경전이라 할수 있는 (탈 무드)에 사람의 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은 주먹을 꽉 쥐고 이세상에 태어났다가 죽을때는 손바닥을 보이고 숨을 거둔다. 태어날 때는 세상의 모든 것을 붙잡으려 욕망하고 있기 때문이며, 죽을 때는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빈 손으로 떠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빈손에 대한 알렉산더 대왕의 일화는 흥미롭다.

세계의 정복자 알렉산더는 젊은 나이에 지중해와 아시아에 걸친 대 제국을 건설하고 천하에 부러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죽음의 신이 너무 일찍 그를 데리러 왔다. 32세의 나이에 정복지에서 중병에 걸렸다. 모기에 물렸다고도 하고, 그를 시기한 어느 장군이 독살했다는 설도 있다. 자기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는 신하들을 불러 모아 ‘내가 죽거든 시체를 넣은 관 밖으로 내손 하나를 내밀어 달라’고 유언했다. 참으로 황당한 유언이었다. 신하들이 놀라자 알렉산더는 ‘세상 사람들에게 천하를 호령했던 그 사람 역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고 싶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인생의 모든 부귀영화가 허무하기 짝이 없는 물거품 이라는 것을 자신의 관 밖으로 내민 손을 통해 세상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저승에 갈 때 입는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제 아무리 억만장자라 해도 저승길에는 한푼도 챙겨 갈수 없다. 그런데도 천년만년을 살 것처럼 이것저것을 움켜쥐려고 악착을 떨다가 비루하고 던적스런 인간으로 몰락한다. 기어이 뭇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를 당하고서야 가슴을 치며 후회를 한다. 끝없는 욕심 때문에 파멸한 이야기는 너무나 많고 수두룩하다.

물이 자신을 잃지 않는 임계점은 섭씨 99도라고 한다. 물은 99도의 온도에서 물로서의 본질을 지키려고 인내심을 발휘한다. 거기에서 그만 중지하면 물은 수증기가 되지 않지만, 1도만 더하여 임계점이 지나면 물은 펄펄 끓어 수증기가 된다. 우리의 인생에도 임계점이 있다. 바람직한 일의 결실을 보기 위해서는 임계점에 도달할 때 까지 열심히 노력해야 하지만, 자신의 분수를 알고 적당한 선에서 멈추는 자족(自足)의 마음이 절대로 필요하다. 욕망이라는 강렬한 에너지를 잘 조절해야 삶이 아름다워진다. 우리는 밝고 건강한 가치를 욕망해야 한다. 젊었을 때는 욕망을 채우면 서 살아야 하고, 늙어서는 부단히 욕망을 빼면서 살아야 한다. 이것이 인생 최고의 지혜이다. <문학 작가 김명열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346/20230208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