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한 겨울에 피어난 아름다운 꽃을 보면서….!

엄동설한, 찬바람 눈보라가 점령군처럼 진을치고, 살을 외는듯한 한파와 폭설로 몸살을 앓고 있는 북쪽지방은 아직도 봄이라는 단어조차 입 밖으로 내기가 부담스럽다. 그런데 온대지방에 속하는 나의 조국 한국의 남녘땅에는 이 추운 겨울에 벌써 노오란 색깔의 수선화가 꽃을 피워 뭇 사람들의 시선을 독차지하며 관심과 사랑을 집중시키고 있다고 한다.

우리들이 알기로는 일반적으로 가장 일찍 피는 봄꽃은 매화나 개나리 진달래 등으로 알고 있으나 이보다 더 일찍 피는 꽃이 있다. 바로 봄의 전령사로 불리는 동백과 납매(음력 섣달에 피는 매화)이다. 우리조상들은 예로부터 옥매(玉梅), 납매(臘梅), 다매(茶梅), 수선(水仙)을 설중사우(雪中四友)라고 부르며 한겨울에 즐길 수 있는 꽃으로 꼽았다. 이와 비슷한 말로 설중송백(雪中松栢)이란 말도 있는데 이 말뜻은 눈속의 소나무와 잣나무 라는 뜻으로 매우 신조가 뚜렷하며 절조 있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한 겨울철이 되면 온갖 살아있는 것들이 몸을 움추리고 지낸다.

더구나 연약한 식물들은 아예 잎을 떨구고 씨앗을 남겨 다음 해의 생(生)을 기약하거나 몸체는 그대로 두더라도 활동은 휴면상태로 보내는 것이 대부분 이다. 그런데 개중에는 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찬 눈이 내리는 때에도 꽃을 피우는 것이 있으니, 동백, 수선화, 복수초, 매화 등이 그렇다. 그러나 실은 이들도 대개는 추위가 매서운 한 겨울에는 몸을 움추리고 있다가 대부분 입춘(立春)절기가 지나 봄의 기운이 되살아나기 시작할 무렵부터야 꽃을 피우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데 이들과는 달리 요즘 같은 추운겨울철에 오히려 소한, 대한의 맹추위 속에서도 버젓이 꽃을 피우는 녀석이 있으니, 황설리화(黃雪裡花)가 그것이다. 음력으로 섣달에 꽃을 피운다고 해서 납매(臘梅)라고도 불리는데, 한국땅에는 별로 자생하지 않고 설사 있다고 해도 쉽게 눈에 띄지 않는 식물이라 그 꽃이 핀 모습도 보기가 쉽지 않다.

이 꽃은 년전에 중국에 사시는 어느 교포 독자께서 “우리집 앞산에 이 추운겨울에 이렇게 노란꽃 납매가 피어서 김 작가님께 보여드립니다. 눈속에 피어난 꽃이 너무 예쁘네요……” 라고 하면서 사진과 함께 인사 겸 독후감을 이멜로 보내주셨는데, 이번에 기억이 나서 설중사우의 글을 쓰면서 납매에 대한 설명을 드렸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곳 플로리다에서는 언제나 늘 사시사철 아름답게 피어나는 각종 꽃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으나, 겨울 삼동, 설한풍에 추위에 떨며 지내야 하는 한국이나 미국의 북쪽 지방에서는 한 겨울에 피어난 꽃의 모습을 보기가 힘들어서, 오늘은 겨울에 피어난 꽃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있다.

황설리화는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운다. 이른 것은 동지 무렵부터 피어 정월이 지나고 입춘이 한참 지난 뒤에도 꽃을 달고 있다. 크기는 엄지손톱 남짓이나 될까, 꽃잎은 여러 겹으로 노랗고 속잎은 암자색(暗紫色)으로 앙증맞다. 향기는 그리 진하지 않으나 눈에 덮이면 꽃잎이 투명하게 비칠 것 같이 맑은 것이 은은한 기품을 지녔다. 봄꽃은 대부분 그 화사한 꽃잎을 열흘이 넘도록 달고 있기가 어렵지만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곁들여 권불십년=權不十年=이 말들의 뜻은, 열흘 동안 피는 붉은 꽃이 없으며, 권력은 십년을 못 간다는 뜻이다’. 이 꽃은 한겨울 추위에도 한달을 넘게 꽃잎을 떨구지 않으니 그투지와 끈기로 동백이나 매화보다도 강하다. 중국에서 전래된 꽃이라 하여 당매(唐梅)라고도 하고 한 겨울 추위속에 피어나서 한객(寒客)이라고도 한다.

옛 사람들은 매화, 동백, 수선과 더불어 설중사우(雪中四友)라 하여 겨울 벗으로 즐겨 찾았다. 지금 북쪽의 겨울은 살벌하고 너무나 춥다고 한다. 미네소타에 살고 있는 친구, 허 회장은 지난번 연말과 며칠전 혹독한 한파를 겪으면서 따뜻한 지방 플로리다 탬파에 살고 있는 나에게 질투(?)와 시샘어린 푸념을 늘어놓았다. 혼자서만 이 추운겨울에 따뜻한 지방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 친구를 보니 배가 몹시도 아픈 모양이다. 그런데, 그러한 그 친구가 한 겨울에도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고 벌, 나비가 꿀 찾아 훨훨 날며 춤추고 있는 이곳 플로리다에 꽃을 보러 온다는 연락이 왔다. 미네소타에서 꽃을 보려면 아직도 몇달은 더 기다려야 한다며, 님(친구)도 보고, 꽃도 보기위해 이곳에 온다고 한다. 미네소타는 5월달에도 눈이 오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아마도 세상에 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듯하다.

요즘 나의 집 정원에는 빨간 무궁화 꽃을 비롯해 난쟁이 꽃, 빨간 수선화, 노란 꽃제비 꽃 등 이 꽃 저 꽃들이 따뜻한 봄기운을 받아 기지개를 켜며 앞 다투어 피어나고 있다. 마음의 여유가 없으면 이런 꽃들의 아름다운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눈에 뵈는게 없다는 것은 그만큼 현실속 뭔가에 미쳐 돌아가는 중이란 소리기도 하다. 지긋이 여유를 품어서 보고, 따뜻한 마음으로 보고 또 봐야 작은 즐거움이 생긴다. 그렇지 못한 마음가짐과 태도를 보면 쓸데없이 분주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안쓰럽기도 하다.

언젠가는 어느 책에서 누군가 쓴 글중에 (꽃을 보는 너를 본다)라는 제목이 어렴풋이 생각 난다. 제목이 참 이쁘고 마음에 든다. 나이를 먹다보니 감성적인 마음이 사그라들고 부족함을 느낀다. 그렇다고 마음이 삭막하다고 하기에는 좀 그렇다. 세상을 산다는 것이 모두에게 같은 일이고 다른 일이다. 한송이의 꽃을 보고 ‘참 예쁜 꽃이네!’ 하고 감탄하는 사람이 있고, 그 꽃을 바라보며 지긋이 눈을 감고 감성속에 빠져드는 이도 있다. 그런데 어느 몹쓸 사람은 그 꽃을 자기혼자 보기위해 꽃을 꺾어가는 사람도 있다. 그 꽃의 입장에서 본다면 모가지를 꺾이는 일인데, 그렇지 않고 그 꽃을 그냥 두고 본다면 많은 이들이 보다 더 많은 즐거움과 평안을 얻을 것이다.

‘동지섣달 꽃 보듯이 날좀 보소’라는 노래가 있다. 우리나라의 기후조건이나 난방조건에서 옛날에 동지섣달 추운겨울에 꽃이란 상상도 못하고 꿈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노래의 귀절은 상상이 허락하는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자신을 비유하여 연인의 관심을 끌려는 안타까운 심정을 나타낸 것이다. 꽃이나 야채, 과일이 제철이 없이 판을 치는 요즈음 세상에 ‘동지섣달의 꽃’이란 조금도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꽃이 우리의 일상에서 줄 수 있는 기쁨을 감소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속에서 그 일부로 살던 인간이 문명의 발달에 따라 자연을 떠나 인공의 틀인 도시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향수는 언제나 우리를 떠나지 않으므로 도시 안에서도 될 수 있는 대로 나무나 꽃을 길러 자연을 끌어들이려는 노력을 하게 되는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개인의 주거 환경에서도 옛날의 단독주택에서는 아무리 손바닥만한 앞뜰, 뒷뜰에라도 여러가지 화초를 심어 기후가 허락하는 한 철에 따라 마당을 장식하고 방 안까지 들여 놓아 자연을 항상 신변 가까이 두고 살았다. 요즘에는 궁여지책으로 아파트의 베란다에 다가 화분을 놓고 꽃을 보아야 하는데, 마당의 꽃밭과는 달리 사철 꽃을 볼 수 있다. 잇점이 있기는 하다.

꽃이란 인간의 애틋한 마음을 전하는 데에는 가장 적절한 매체이다. 인간 생활의 경조사에는 물론이지만 개인적으로도 꽃을 주고 받는 마음은 깨끗하고 순수하다. 특정 용도가 있는 선물을 받을 때는 주는 사람의 의도가 선물에 포함되지만 꽃이야말로 아름다운 그 자체와 그것에서 오는 기쁨 자체를 주고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못마땅한 사람이라도 한 다발의 꽃을 건네주는 손만은 고맙지 않을 수 없고, 또 내가 내 자신을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 꽃을 사거나 키우는 일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꽃의 아름다움은 그 생명에서 오는 것이다. 꽃은 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결실로 연결되는 생명의 단계이다. 이는 생물의 속성 중 가장 강한 종족보존 본능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렇게도 온 정성을 다 들여서 피는 것이고 그 정성의 힘이 모든 꽃들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다.

작년 11월달에는 나의 집사람이 몸이 불편하여 고생을 했다. 이로 인해 많은분들이 위로와 문안차 꽃 선물을 주셨다. 장미꽃을 비롯해 수선화, 들꽃, Orchid, Ranunculus, Ornithogalum 등등, 꽃다발과 화병 꽃 장식을 받았을 때 집사람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꽃이란 아름답기로 되어 있는 것이니까 아름다울수록 화려할수록 좋은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런데 나는 언제부터인가 화려하고 이름 있는 꽃들보다는 그냥 순수하게 야생에서 피어난 들꽃이나, 너무나 수수해서 자칫 밟혀버릴 잡초 꽃, 어느 구석에 쳐 박혀서 숨어 피는 듯 한 정교한 야생화의 순진한 아름다움이 절실하게 내 가슴에 와 닿기 시작했다. 꽃의 표면적인 외양이나 향기에 끌리기보다 는 꽃의 의미, 즉 각자의 생명에 대한 소임을 다 하려는 노력을 들여다보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그러고 보니 꽃봉오리의 솟아오르는 힘이나 또 단계적으로 피어나는 꽃이 가진 성장의 아름다움과 화려한 클라이막스, 제 할일을 다 한 쇠잔한 꽃의 피곤한 가련미가 다른 아름다움으로 보이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들 사회는 좀처럼 ‘꽃처럼 아름다운 세상’으로의 진입이 쉽지 않아 보인다. 경제도 어렵고 국제정세도 혼란스럽다. 그렇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도 물질만능의 물신주의에 우리의 정신주의를 내준 것이 한몫 한 것 같다. 현대인들은 저마다 상처난 영혼들을 가슴에 품고 산다.

설령 상대적으로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덜 민감하게 여겨지는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들일지라도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현실이 나의 과거이자 미래일수 있다는 진술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로든 누군가의 현재가 나의 미래와 무관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해주고, 영혼과 평안의 위로와 안식처가 되고, 타인의 슬픔에 공명하고 나라가 이상적인 사회를 찾고자 하는 것으로 꽃만큼 강력한 매체는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원초적으로 자아와 존재에 대한 성찰과 사회적 관계를 규명하며 살아가는 운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아 존재에 대한 성찰, 즉 나를 찾아가는 물음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방법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삶의 여정을 제시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현재 우리가 실존하는 현실은 부조리와 불합리가 온전히 삶의 영위를 방해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운 시대일수록 인간은 더 아름다운 세계를 그리워 하고, 혼란스러운 현재에 대한 절망과 아픔이 깊을수록 새로움에 대한 동경은 점점 더 격렬해진다는 네덜란드의 역사학자이자 문화학자인 호이징가의 말이 어느 때보다도 많이 회자되기도 한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영혼이 우리 자신에 대해 읽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책의 다음 장에는 무슨 내용이 있는지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좋은 결론은 책의 후반부에 적혀있다는 것 외에는 앞부분의 내용이 어둡다고 이야기가 끝난 것은 아니다. 자신이 걸어가는 길에 있는 것들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목적지에 도달해서도 행복하지 못하다. 우리는 때때로 삶의 밀림을 통과해야 하며, 맹수 사냥꾼이 되기도 해야 한다. 그러나 삶의 향기는 언제 목적지에 도착하는가의 여부와 관계없이, 우리가 걸어가는 길 중간 중간에 피어있는 들꽃 같은 얼굴들과 매 순간의 경험에서 우러나온다. 앞만 보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들녘에 피어난 아름다운 꽃을 보는 마음의 여유와 관심, 그곳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쉬어감이 그 여정을 풍요롭게 만든다. 우리 모두에게 꽃같이 아름다운 삶을 이어가시길 빈다. <문학 작가 김명열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345/2023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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