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용서와 사랑의 치료법

<김명열칼럼> 용서와 사랑의 치료법

지난달 3월7일, 서울의 여의도에 위치한 어느 카운슬링(심리적인 문제나 고민이 있는 사람에게 실시하는 상담활동, 상담원이 전문적인 입장에서 조언, 지도를 하거나 공감적인 이해를 보여 심리적 상호 교류를 함으로써 상담자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심리적 성장을 도와주는 회사)센터에 어느 중년부인이 방문해 자신의 화나고 분통터지는 사정을 상담하고 하소연 하고 있었다.

사연인즉 자신의 남편이 어느 여자와 바람이 나서 외도를 하고, 몇달치의 월급도 몽땅 다 써버려서 살림을 꾸려나가기가 너무나 힘들며 자녀들의 교육비조차 마련할 길 없어 난감한 지경에 놓여있다고 털어놓았다. 남편이 죽이고 싶도록 밉고 복수를 할 방법이 없나? 해서 찾아왔다고 했다. 그녀의 말이 자기가 죽으면 죽었지, 두 년놈을 절대로 용서하지 못하고 반드시 복수를 하여 응징을 하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얼마나 속이 상하고 분하면 이러한 말을 할까, 하며 그녀의 복수심에 불타는 마음을 백퍼센트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녀의 남편과 불륜녀의 잘못은 그녀 말대로 때려죽일 년놈들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가장 귀한 선물은 무엇일까? 그것은 용서이다.

왜냐하면, 용서는 받는사람 뿐 아니라 용서하는 사람도 살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 좋은 선물을 하나님께서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행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결과는 그 누구에게도 아니고 바로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돌아간다. 물론 여기서 불륜을 저지른 남녀를 두둔하고 잘했다고 정당화 시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불륜을 저지른 당사자들은 결코 하나님께서 좌시하지 않으시고 그에 합당한 천벌이 내릴 것이다. 다만 용서를 해주는 그녀의 처신, 행동에 대해서 바라는 선처적 아량과 따듯한 마음을 기대해서 하는 말이다. 그래서 용서는 하는 사람에겐 신이 주신 선물이지만,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심판이 된다. 그러니 용서를 해야 한다. 용서해야 이 세상사는 동안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천국의 심판을 받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는 선택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에서 투쟁을 통해 이루어야 할 필수 사항이다.

용서를 못하면 사는게 너무 고통스럽다. 가슴은 썪어 들어가고 마음은 원망과 미움과 악독이 가득해진다. 자신의 행복을 앗아간 사람이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빼앗긴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자기 자신이 죽어간다. 마음만 죽어 가는게 아니다. 스트레스로 인해 건강도 악화된다. 항상 미움과 독기를 마음속에 품고 살기 때문에 얼굴에서도 인자와 은혜가 사라지고 표독스러움과 괴팍스러움이 올라온다. 같은 주름이라도 웃는 주름이 아니라 원망과 울상의 주름이 생긴다. 결국 이로 보나 저로 보나 비참하고 불행하게 죽어가는 자신밖에 남는 게 없다. 상대방과의 관계도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 미워하는 상대방의 모든 것이 꼴도 보기 싫고 상대하기조차 거북스럽다. 이렇다보니 말 한마디를 해도 고운 말이 나올 수 없고 심지어 좋은 표정을 지을 수 없다. 용서하지 못하는 한 그 미움은, 상대방이 잘못을 뉘우치든 뉘우치지 않든 상관없이 상대방과의 관계를 악화시킨다. 용서하지 않는 한 관계는 파국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은 더럽고 추악한 우리 죄인들을 그의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통해 용서하셨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그 용서와 은혜,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의 수혜자들이다. 이 세상 사는 동안 그것을 받아들이건 받아들이지 않건 자유지만, 이 세상 삶을 마치고 심판대 앞에 가서는 하나님의 그 사랑과 예수님의 그 핏 값을 받아들이지 않는 죄의 값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그 보혈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자신에게 죄를 지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야 한다. 왜냐하면 더 큰 자신의 죄를 독생자 예수님의 희생으로써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하면서,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 크지도 않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 순간 하나님께서 주신 용서도 취소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분명히 경고하셨다. “너희가 다른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다른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태복음 6:14~15절의 말씀”

이와 같이 용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지만 그것을 행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심판이 된다.

자신을 불행하게 한 사람을 미워해서 용서하지 못하는 것인데, 그것이 결국 자신을 지옥으로 밀어 넣는 저승사자가 되는 것이다. 용서는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잊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용서는 사랑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셨기에 그렇게 용서하셨듯이 말이다. 만약 당신께서 현재 미워하고 증오하며 용서를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용서해주세요. 용서하기 위하여 자신과 투쟁을 하자. 사탄은 미움을 통해서 죽음을 부른다.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받아 누리고, 당신도 그 은혜를 베풀어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겠다. 용서는 죄와 지옥과 사탄과의 싸움이다.

폴 투르네에는 스위스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의 저서 ‘폴 투르에니의 치유’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다. 악성 빈혈과 우울증이 있는 한 여인이 무려 1년동안 병원에 다니면서 치료를 받았지만 낫지 않고 점점 더 나빠졌다. 의사는 “아무래도 안되겠소. 병원에 입원해 집중적으로 얼마동안 치료해봅시다” 라고 제안했다. 여인은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여인은 약속한 날자에 병원에 오지 않았다. 일주일 만에 나타난 여인의 얼굴빛이 환해졌고 밝으며 핏기가 돌았다. 다시 빈혈검사를 했더니 빈혈이 깨끗이 없어졌다. 아울러 우울증도 사라지고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1년동안 검진을 받고 약을 먹으며 치료해도 낫지 않았던 병이 깨끗이 나은 것이다. 의사가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여인이 대답했다. “제가 오랫동안 미워했던 저의 남편이 있었는데 며칠전에 남편을 용서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감쌌습니다” 이것은 임상기록이다. 1년동안 남편과 갈등을 빚으며 지내온 우울증과 빈혈이 미워하던 사람을 용서하고 나니 마음이 평안해지고 단번에 치료된 것이다. 이와같이 용서와 사랑은 정신건강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른다. 신앙생활은 말할 것도 없고 육체적인 건강에도 크게 도움이 된다. 궁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 그리고 용서 위에 사랑을 더하는 것이 선택받은 자의 윤리이다. 여기에 자유와 기쁨과 승리와 마음의 평안이 있다.

공자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구제해줄 수 있다면 그것은 인(仁)의 경지를 넘어선 성(聖)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평생토록 가져야할 말 한마디는 진실한 용서(적극적인 사랑)라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다. 용서 할 줄 알아야 사랑할 줄도 안다. 용서는 내면의 평화를 열어주는 열쇠다.

‘용서하는 마음은 덕을 쌓는 일이다. 친구를 용서하는 것보다 원수를 용서하는 일이 훨씬더 쉬운 일이다. 가장 나쁜사람은 용서를 모르는 사람이다 = 토마스 풀러’

친구란 가까운 사람을 이야기한다. 원수란 멀리 있는 관계일수도 있고, 모르는 사람일수도 있다. 가까이 있는 이웃이나 부모형제나 부부 사이를 말할 수도 있다. 마음으로 는 용서하고 싶지만 현실에서 가까운 사이가 더 용서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참지 못하고 화를 내고 상처를 주는 경우가 있다. 용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골짜기 같은 관계에 다리를 놓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경말씀에는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태복음 5:24~25’ 라고 기록되어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만약에 미워하고 용서못 할 사람이 있다면 먼저 그를 찾아 손내 밀어 용서를 해주고 화해하며, 그 후에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주일예배에 나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라고 권해드리고 싶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당신이 진심어린 기도와 찬양, 예배를 기쁘게 받아주실 것이다.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우리의 마음도 촉촉히 적셔든다. 그리운 친구가 생각나고 멀리 떠난 사람이 보고 싶다. 이런 날이면 사람들은 은은한 수채화를 그리고 싶어 한다. 신효범의 ‘내마음에 내리는 비’나 오래된 노래지만 김범수의 ‘비처럼 음악처럼’ 의 가사가 머리곳에 떠 오른다. 따끈한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클래식음악을 들으며 비오는 날의 오후를 보낸다. 아니 이런때는 추억의 명화 한편을 보고 싶다. 그런 영화가 바로 ‘벤허’이다. 벤허는 여러번 보아서 그 내용, 스토리를 달달 외울 정도인데 볼 적마다 느끼고 얻는 것이 많다. 다시 보고 싶은 불후의 명작 ‘벤허 Ben-Hur’란 영화는 인간과 신, 지배자와 피 지배자, 사랑과 미움, 복수와 용서 등의 여러가지 대립적 갈등요소를 통해 인간의 속성과 세계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벤허의 용서와 그가 만난 예수그리스도에 대해 다시 한번 인간의 존재 의미를 생각나게 한다.

주다 벤허(Judah Ben-hur)의 옛 친구이자 대적자 멧살라(Messala), 그리고 벤허가 지극히 사랑한 어머니 미리암과 누이 티자, 연인 에스더와의 따듯한 인간애가 있다. 벤허는 노예의 신분으로 함대 사령관이며 호민관인 아리우스(Quintas Arrius)제독의 목숨을 구해준다. 그 후 벤허는 제독의 양자가 되고, 로마 자유시민이 되는 극적인 전환도 흥미를 더해준다. 벤허의 증오에 불타는 강렬한 눈빛이 무서우리만치 마음을 궤 뚫는다. 해상의 격렬한 전투장면과 전차경주의 박진감 넘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압권이다. 우리들이 일상을 살다보면 원수나 배반자를 용서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벤허가 친구 멧살라를 용서하는 것은 쉽지 않다. 차라리 원수를 용서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이다. 그러나 용서란 마음의 평화를 열어주는 열쇠다. 용서할 줄 알아야 사랑할 줄도 안다. 용서하는 사람은 진정 용기있는 자요 승리자다. 벤허는 수많은 번민과 갈등속에 많은 괴로움을 받으며 세월을 보낸다. 모든것을 잊고자 했지만 잊을 수 없는 악몽이다. 그러다가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마음의 평강을 얻는다. 한국의 손양원 목사는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주님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양아들로 삼았다. 그 사랑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다. 즉 예수님의 마음과 성령의 능력이 아니면 할수 없는 일이다.

간디(M, Gandhi)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라. 인도가 영국의 식민치하에서 막상 독립이 되자 큰 혼란이 생겼다. 가장 큰 원인은 종교싸움이었다. 한 인도인이 병석에 누워있는 간디에게 찾아가 모슬렘 교도들이 자기아들을 죽였다고 분노해서 욕을 퍼부었다. 그러자 간디는 그에게 그 모슬렘교도의 아들을 하나 데려다가 아들을 삼아 키우라고 권면했다. 간디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지만 원수까지 사랑하는 넓고 큰 마음으로 용서의 사랑을 실천한 비 폭력 무저항 인권운동가였다.

우리가 젊다고 천년만년 살 것 같아도 결코 길지 않은 짧은 인생이다. 서로 사랑하며 용서와 화해로 살아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최첨단 과학문명의 시대일지라도 전쟁과 살인, 거짖과 미움, 증오와 복수는 상존하고 있다. 우리사회가 좀더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 실천될때 평화와 행복이 있다. 사람들은 오늘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모양의 사랑과 증오의 모습을 보이며 살고 있다. 지금은 그 미움과 증오심이 가득차서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줄 믿는다. 나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은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예수님의 말씀과 기도뿐이다. 어찌보면 이 글이 그리스도 교도적인 신앙적인 글도 되겠으나,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글의 내용이다.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채찍과 훈련만이 나의 믿음과 신앙의 지조를 지키며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문학 작가 김명열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306/2022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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