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기획 <7> 박정희 전 대통령의 숨겨진 이야기들

김명열기획 <7> 박정희 전 대통령의 숨겨진 이야기들

#지난주에 이어서………….

1960년대 중반부터 쌀 생산량이 점점 부족해지자 정부는 쌀 소비를 낮추기 위해 혼,분식 장려에 나섰고, 1966년에는 쌀 막걸리 제조를 전면 금지시켰다. 1970년부터는 일주일에 두번 수요일과 토요일에 쌀을 먹지 않는 무미일(無米日)을 시행하면서 박대통령은 청와대 주방에도 무미일을 지키라고 지시했다. 이날은 음식점에서도 쌀밥을 판매할 수 없었고, 학교에서는 담임교사가 혼분식을 지키는지 학생들의 도시락을 검사했다.

서울 명동에서는 밀가루음식을 파는 분식점들이 늘어났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우리나라 식생활은 크게 변하였다. 분식으로 한 두끼를 해결하는 것이 일상처럼 된것이다. 그러는 사이 정부가 개발한 신 품종(통일벼)로 쌀 생산량을 대폭 늘리면서 쌀의 자급자족이 가능해지기 시작했다. 제조를 금지한지 14년만에 쌀 막걸리가 부활했고, 이는 그해 10대뉴스에 포함됐다. 하지만 사람들의 입맛이 밀가루막걸리에 길들여져 쌀 막걸리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박정희 대통령도 막걸리 맛이 옛날 같지 않다면서 맥주를 섞어 마셨다. 농민에게 막걸리를 따라주며 새마을운동을 독려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그 어떤 정치적 발전보다 경제 발전이 먼저라는 판단아래, 경제개발 계획에 박차를 가했고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한편 박정희 대통령을 내조했던 청와대 속의 유일한 야당, 육영수 여사의 이야기를 지나칠 수 없다. 육영수여사는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 313번지에서 태어나셨다.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 교동댁의 작은 아씨로 고이 자란 육영수여사가 박정희 대통령과의 결혼할 당시 이야기다. 그 시절, 개화정신이 강했던 여사의 아버지 육종관씨는 여사와 박정희 대통령의 결혼을 한사코 반대하였다. 고이고이 키운 딸을 전쟁이 한창인 시기에 어찌 군인에게 시집을 보내겠냐는 것이 반대의 이유였다.  그러나 여사는 1950년 12월12일 오후2시 대구 계산 성당에 있는 결혼식장으로 몰래 가방을 들고

집안 사람의 눈을 피해 달려갔다. 온순한 성품의 여사로서는 실로 놀라울 정도의 결단이었던 것이다. 결혼식의 주례를 맡은 허억 선생의 주례사 또한 이채로웠다. 주례는 엄숙한 소리로, “신랑 육영수군과 신부 박정희 양의 백년가약에 주례를 맡게 되어…….” 했을때 식장 안에는 폭소가 쏟아졌다. 한글로 쓴 이름을 읽다보니 정희란 이름이 신부일 텐데 잘못 쓰여진 이름으로 알아보았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이루어진 부부가 수많은 격랑을 넘고, 헤치고 넘으면서 그날 하루만의 남자, 그날 하루만의 여자인 박정희 양의 ‘하면 된다’ 라는 굳은 의지와 신념으로 헐벗고 굶주리던 나라를 부강하게 이루어 놓았고, 또 한 여자로서 신랑이었던 육영수 여사는 내조와 봉사의 길을 걸으며 사람 만나는 일과 사람 돕는 일을 천직인양 여기면서 가난하고 불우한 자의 손을 잡은 지고지순한 일생을 살다 가셨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이 결혼식장에서 여자가 되었던 까닭으로 딸(박근혜)을 대통령으로 만들었을까? 하는 묘한 생각을해 보곤 한다.

육영수 여사(1925~1974),

1974년 8월15일, 현직 대통령 부인으로 북한이 사주한 문세광의 흉탄에 49세의 짧은 생애를 마친지 올해로 48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많은이들은 아직도 그분의 고결한 생애를 기억하고 있다. 나는 젊은 시절 부터 오늘날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아직껏 육여사에 대한 비판적인 글이나 말을 어디에서도 들은 일이 없다. 육여사는 진정 어떠한 분이셨나? 나는 내가 그동안 보고 느꼈던 모든 일들을 통해 편린을 소개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려고 한다. 북한에서 월남한(탈북한) 북녘동포들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한결같이 쇠고깃국에 흰 쌀밥 한번 실컷 먹어보는 것 이라는 대답을 듣게 된다. 그들이라고 왜 고대광실에 천석꾼으로 살고 싶은 꿈이 없겠는가? 남한 또는 미국에 이민을 온 1세대 포함, 나이 60세 이상 되는 국민들은 불과 50여년전만 해도 온 가족이 쌀밥을 배불리 먹어보는게 소원인 때도 있었다. 인구는 많고 땅덩어리는 작아서, 부존자원은 한없이 부족하고, 식량은 절대량이 부족해서 심지어는 전국적으로 밤나무나 대추나무 등의 유실수 재배를 권장해 그 열매로 주린 배를 채워보려고 서글픈 안간힘을 썼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득한 지난날의 전설 같은 이야기다.

지금 내가 여러분들에게 들려드리고자 하는 육영수여사의 이야기는 내가 몇년전 이미 지면을 통해 칼럼의 글로 소개하여드렸던 같은 내용이다. 몇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그 글을 기억하는 분도 계시겠고, 아니면 처음 읽게 되는 독자도 계시리라. 어쨋건 옛날에 한번 읽으신 독자들은 다시 한번 기억을 더듬으며 읽고, 처음 읽는 독자들은 모르는 비화, 사실적 이야기를 들으며 육영수여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더불어 자애스럽고 사랑이 깊으신 여사님의 품성과 그 따듯한 마음을 느끼시기를 바란다. 이 글의 내용은 육영수 여사님을 곁에서 보좌하는 어느 비서가 직접 보고 느낀 내용을 옮겨놓은 것이다.

70년대 초, 아카시아 꽃이 산과 들에 흐드러지게 핀 어느해 늦은 봄날이었다. 경기도 성남시에 살고 있는 어느 가정주부가 청와대 육영수 영부인 앞으로 한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그 편지의 사연은 다음과 같다. 그녀의 남편이 서울역 앞에서 조그만 행상을 해서 다섯 식구의 입에 겨우겨우 풀칠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데 얼마전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누워있기 때문에 온 가족이 굶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 자신과 어린자식들이 끼니를 잇지 못하는 것보다 80세가 넘은 시어머니가 아무것도 모른채 마냥 굶고 있으니 도와달라는 애절한 사연이었다. 그때만 해도 육영수여사는 이런 사연의 편지를 하루에도 몇통식 받았고, 이미 알려진 대로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나환자,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자신의 일처럼 많이 도와주었다. 그 편지를 받은 바로 그날 저녁, 비서를 불러 육여사는 은근히 남들 모르게 그 집을 찾아갈 것을 부탁하였다. 쌀 한가마와 얼마간의 돈을 들고 그 집을 찾아 나섰다. 성남은 지금은 몰라보게 달라진 최신의 도시가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서울에서 살던 집이나 움막을 철거당한 철거민들이 그곳으로 이사를 가 산등성이에 움막을 짓고 정착해가는 초기 단계였기 때문에 그 집을 찾기가 여간 어려웠고 쉽지가 않았다. 갖은 고생 끝에 겨우겨우 찾아갔을 때는 마침 온 가족이 둘러앉아 저녁상을 받아놓고 밥을 먹고 있었다. 나는 청와대에서 왔노라고 인사를 건넨 후, 어둠 컴컴한 그 집 방안으로 들어갔다. 초막같은 집에는 전깃불도 없이 희미한 촛불이 조그만 방을 겨우 밝히고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파가 누가 왔는지도 모른채 열심히 밥만 먹고 있었다. 밥상 위에는 그릇에 수북한 흰쌀밥 한 그릇과 멀건 국 한그릇이, 그리고 간장한 종지가 놓여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나는 갑자기 매우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쌀이 없어 끼니를 굶고 있다고 하더니 돈이 생겼으면 감자나 잡곡을 사서 식량을 늘려 먹을 생각은 하지 않고 흰쌀밥이 웬 말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한참을 앉아있으려니까 희미한 방안의 물체가 하나하나 나의 눈에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내가 받았던 충격과 아팠던 마음을 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노파가 열심히 먹고 있던 흰 쌀밥은 밥이 아니라 들판 야산에서 따온 흰 아카시아 꽃이었다.

그 순간 나의 가슴이 메어오르고 표현할 수 없는 설움 같은 것이 목이 아프게 밀고 올라왔다. “나에게도 저런 할머니가 계셨는데……..저 할머니에게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나는 가지고 있던 돈과 쌀을 전해주면서 육영수 여사님의 ‘희망과 용기를 잃지 말고 굳굳하게 열심히 사시라’는 위로와 안부의 말씀을 전하고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집을 나왔다. 며칠 후 나는 박정희대통령 내외분과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두부된장에 김치, 깎두기, 콩조림, 멸치조림, 고추잎 무침, 그리고 쌀톨이라고는 눈을 똑바로 뜨고 찾아봐야 눈에 띄일 정도로 보리가 섞인 잡곡밥, 고추장에 상추쌈을 곁들이는 저녁식탁을 마주하고, 일반 서민들이 먹는 밥상과 별 차이가 없는 그러한 밥상을 받으며 마주앉아서 맛있게 식사를 하는 두분께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옛날 같으면 일국의 왕인 셈인데………. 왕의 수랏상이 여염집의 부자들 밥상만도 못하게 초라 한것을 보고 가슴속에서 목구멍까지 울~컥 하며 무언가가 치솟아 올랐다.

그때 두분은 나의 사정이야기를 전해 듣고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다만 육영수여사만이 눈가에 솟아나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연신 닦아내며 한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박정희 대통령의 혼자 독백처럼 하시는 말씀이 나의 가슴과 머리에 박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나라의 가난만은 반드시 내 손으로……” 1960년대 초, 차관을 얻기 위해 서독을 방문해 우리나라 광부들과 간호사들을 만난 박대통령과 육영수여사,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과 가난한 나라에서 돈 벌기 위해 이역만리 타국에 와 있는 광부들과 간호사들, 서로가 감정에 북받쳐 말도 못하고 부둥켜안고 울기만 했던 그때, 박대통령은 귀국길에 야멸차리만큼 매서운 결심을 하지 않았을까……. ‘가난만은 반드시 내손으로………..’ 이런 결심을.

<다음 주에 마지막 회>

<문학 작가 김명열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303/2022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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