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기획 <6> 박정희 대통령과 고속도로 이야기

김명열기획 <6> 박정희 대통령과 고속도로 이야기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발전 신화에서 최 선봉으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경부고속도로 이다. 이 경부고속도로의 건설로 인해 한국의 물류동력이 탄력을 받아 고속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첫 단추가 잘 끼워졌고, 더불어서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발판이 된 것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이었다. 오늘은 이 경부고속도로에 관한 이야기와 그 내면 속 뒤의 장막속에 가리워졌던 세상 이야기를 곁들여 들려 드리겠다.

1960년대 후반은 외국회사와의 기술제휴를 통한 CKD 조립생산으로 자동차 산업의 기반이 마련된 시기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을 통해 흔히 국가경제의 대 동맥으로 불리는 고속도로망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때이기도 했다.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에는 무엇보다도 박정희 대통령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그는 1964년 12월 서독 방문에서 독일 부흥의 상징인 본과 퀼른 사이의 아우토반(Autobahn)을 시찰하는 기회를 가졌는데, 이때 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최초의 구상을 했던것으로 보인다.

서독에서 돌아온 그는 고속도로에 관한 자료수집과 연구를 계속하였고, 대통령 선거유세가 진행중이던 1967년 4월에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을 처음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에 대해 당시 전문가들이나 야당, 시중의 여론은 그리 좋지 않았다.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의 조사관들이 1966년에 작성한 보고서에는 한국의 도로 사정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긴 했지만, 대규모 고속도로 건설이 필요하다는 언급은 하지 않았다. 반대자들은 당시 경제 사정이나 차량 대수를 고려할 때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시급한 과제가 아니며, 재정적으로도 현명한 결정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1966년 시점에서 우리나라의 차량대수는 6만대에 불과했으며 1969년까지 도로 포장율은 8%밖에 못되는 열악한 상황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 대다수는 고속도로라는 말조차 들어본 적도 없었다. 또한 우리나라는 토목공학 같은 기술적 능력에서도 대규모 고속도로를 건설할만한 여건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러한 반대를 무릎쓰고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을 강행했다. 그는 남북한이 군사적으로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던 당시 상황을 이용해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을 북한과의 경쟁과 남북통일에 연결시켰다. 이에 따라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은 단순히 조국근대화의 중요한 사업으로뿐 아니라, 북한과의 체제 경쟁 측면에서도 중요한 과업으로 받아들여졌다. 실제 공사는 1968년 2월에 착공되었는데 IBRD가 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차관제공을 거부했기 때문에 경부고속도로는 순수한 우리의 기술과 우리의 자금으로 건설이 이루어져야만 했다. 총 연장 428Km인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에는 2년5개월의 시간과 인력동원 900만명, 중장비 165만대, 철근 5만톤 등, 430억원의 공사비가 소요되었는데, 이는 외국의 사례와 비교했을 때에도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고 저렴한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노선 선정과 설계, 토지매입, 공사일정 관리, 자금 조달, 인력동원 등 건설과정의 전 단계에 직접 관여했으며, 1970년 7월에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된 이후 많은 관계자가 이를 두고 ‘박정희 대통령의 걸작품’ 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리 정해진 일정을 맞추기 위해 군대가 적을 향하여 돌격하는 방식으로 진행한 돌관공사(突貫工事)는 숱한 문제점을 낳기도 했다. 군에서 차출된 공사현장 감독들은 잦은 초과 작업과 철야근무로 인부들을 압박했고, 무리한 공사 진행은 잇단 사고를 불러 77명의 생명을 앗아가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예산 제약으로 인해 도로의 너비, 포장두께가 불충분하게 설계되어 개통 직후부터 노면 파손, 노반이나 축대붕괴가 끊이지 않고 일어났고, 이에 대한 보수공사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했다.

이 때문에 1980년대가 되어 경부고속도로는 불과 10년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설계 건설된 누더기 고속도로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은 1970년대 이후 속속 건설된 대규모 고속도로들이 모방하고 개선시킬 수 있는 하나의 전례를 제공했고, 우리나라의 교통체계와 수송 분담율이 철도 위주에서 도로교통 중심으로 옮겨가게 하는데 결정적이 계기가 되었다. 개통 초기에 매일 2만대에도 못 미치던 교통차량은 1977년 3만대를 넘어선 이후, 국내 자동차 보유대수 증가와 함께 빠른 속도로 증가 했다. 또한 1971년 말까지는 자가용 승용차의 숫자가 화물차보다 많아서 ‘관광 도로’라는 비아냥 거림을 듣기도 했으나, 이후 고속도로 망이 확충되고 트럭 화물의 비중이 커지면서 명실상부한 국가경제의 대 동맥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다음은 고속도로 건설공사와 더불어 그 공사현장의 주변 마을에 살았던 어느 사람의 개인적 추억담을 여담으로 적어보았다. 그가 개인적으로 보고 느낀 숨겨져 있었던 그 당시 상황의 이야기이다.

내 고향 마을 앞에는 낙동강과 나란히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간다. 기차도 없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던 궁벽한 시골마을은 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마을 앞으로 몰려든 건설 중장비의 소음으로 화들짝 깨어났다. 그 공사는 내가 국민학교 6학년때 시작되어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끝이났다. 공사가 시작되면서 마을은 각종 건설 중장비를 부리는 기사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집마다 노는 방을 세 놓았고 이들의 식사를 위해 마을 안 주막이 밥집으로 바뀌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들이 쓰는 돈은 시골마을에 아연 활기를 불어넣었다. 대신 시골마을의 완고한 윤리공동체도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 외지에서 온 ‘노가다’ 들은 거칠기도 했지만 닳고 닳은 사람들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객지에 흘러 들어온 혈기왕성한 사내들이었다. 이들은 늘 여자를 원했지만, 마을의 술집에서 그런 수요를 맞추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여자에 대한 이들의 욕망이 마을주민들에게도 옮겨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3년후 이들이 떠날때 마을에선 서너명의 처녀들이 그들을 따라갔다. 더러는 혼인을 해서, 더러는 혼인보다 살림을 먼저 차린 상태로……… 시골에서 더 좋은 신랑감을 찾기 어려웠던 처녀들에게 그들은 맞춤형 신랑감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연애만으로 끝난 관계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몇몇 처녀는 애비없는 아이를 낳아놓고 울고 있는 처녀가 몇명정도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들 가운데 총각이라고 속인 유부남이 적지 않았는데 이들은 순진한 시골 처녀를 데리고 놀기만 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고속도로만 난게 아니라 처녀들 몸에도 길이 났다’고 빈정거리는 근거다. 내 고향 마을이 그랬을진대, 400Km가 넘는 경부고속도로 주변 마을 상황들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온전히 그것에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지만 경부고속도로는 그 연도 주변에 있는 시골마을의 윤리공동체를 허물어뜨린 실마리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다음은 시선을 안으로 돌려, 박정희 대통령의 식탁 이야기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막걸리는 술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오후 5시, 보좌관 사무실의 전화벨이 울렸다. 대통령이었다. “보좌관들 다 있어? 이리와서 식사나 같이 해” 한 시간 뒤 식당에 들어서던 보좌관들은 막걸리 통을 발견하고 낮은 한숨을 토했다. 시중에서는 양주나 맥주가 일반적으로 좀 잘산다고 하는 중산층들 이상에서는 늘 상 별반 부담 없이 마시고 있는 실정이었는데,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기관, 통수권자가 살고 있는 청와대에서 늘상 고작 내놓는 술이 막걸리뿐인지라 오늘도 그것을 본 보좌진들은 약간은 실망스러운 눈초리로 식당안으로 들어왔다. “역시 오늘도 막걸리구나” 박정희 대통령은 직원들과 저녁을 할 때면 항상 막걸리를 반주로 삼았다. 술의 종류가 바뀌는 날은 거의 없었다. 직원들은 막걸리에 질릴 지경이었지만, 대통령의 막걸리 사랑은 변치 않았다.

하루는 외부 행사를 마치고 취재기자들이 모여 맥주를 마시자 “한국 사람들은 풋고추에 된장을 찍어 막걸리를 마셔야 한국인의 체취와 멋을 느낄 수 있을것” 이라고 하면서 막걸리를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씨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막걸리는 술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농촌에서 자란 박대통령은 막걸리가 허기를 달래주는 음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라고 말했다. 하지만 예외는 있었다. 과거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지인들을 청와대로 부를 때는 불고기에 항상 소주나 정종을 곁들이며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눴다. 박대통령은 “입맛은 소박하고 털털했지만, 식사량은 많지 않았다. 대통령의 메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소박할 정도로………”

박대통령은 술자리에 앉으면 버릇처럼 앞에 놓인 젓가락, 술잔, 재떨이 등을 반듯하고 가지런하게 다시 놓았다. 입맛은 소박하고 털털했지만 식사량은 많지 않았다. 식탁은 일국의 대통령 식탁이라고는 너무나 소박할 정도로 소박하게 차렸는데, 육영수여사 역시 호화로운 식탁은 절대로 차리지 말 것을 주문했으며 “국민들. 백성들은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는데 삼시세끼 밥을 먹는 것 조차도 국민들에게 죄를 짓는 것 같다” 며 점심에는 칼국수, 아침과 저녁에는 된장찌개, 풋고추, 멸치조림이 단골 메뉴였고, 잡곡밥 (보리 70% 쌀 30%가 기본)에 해물된장 찌개를 특히 좋아한 박대통령은 두부를 반드시 넣을 것을 주문했다. 당시의 청와대 요리사 손성실씨는 “박정희 대통령은 짜고 칼칼한 음식을 좋아하셨어요. 된장과 고추장을 섞어 비빈 비름나물에 고소한 생선전, 소시지 반찬도 즐기셨어요” 라고 전한다.

새마을운동 현장 시찰때는 막걸리와 새참 상을 따로 준비했다. <문학 작가 김명열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302/2022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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