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따듯한 마음, 따듯한 사람.

<김명열칼럼> 따듯한 마음, 따듯한 사람.

 

각박하고 살기 힘든 세상이라고 하지만, 아직은 따듯한 마음과 사랑을 갖고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함께 살고 있어서 세상은 살만한 세상이다.

나는 따듯한 것을 좋아한다. 플로리다의 한 여름은 너무나 무덥고 뜨겁지만, 그래도 추운 것 보다는 훨씬 낫다. 나는 빙점 이하의 추운날씨가 몇달동안 계속되는 북쪽의 추운지방에서 살다가 그곳이 싫어서 따듯한 남쪽지방, 플로리다로 이사를 왔다.

이곳에 와서 보니 따듯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도 많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북쪽지방의 사람들이 마음이 차겁고 나쁘다는 얘기는 절대로 아니다). 사람들은 대개들 따듯한 사람을 좋아한다. 부드럽고 온화한 사람을 좋아한다. 차갑고 딱딱한 사람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누구를 만나든지 어느 정도 온도를 느낀다. 어떤 사람은 따듯하게 느껴지고, 어떤 사람은 차갑게 느껴진다. 따듯한 사람이 되려면 따듯한 마음을 가꿀 줄 알아야 한다. 우리의 몸에 온도가 있는 것처럼 마음에도 온도가 있다. 몸의 온도는 우리가 먹는 음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이 우리 몸의 온도를 조절한다. 우리가 먹는 음식의 상당한 양이 우리몸의 온도를 유지하는데 사용된다.

또한 우리가 먹는 영의 양식과 정신의 양식이 우리 마음의 온도에 영향을 준다. 우리마음을 따듯하게 만들어주는 영적인 양식이 있다. 바로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또한 좋은 책과 마음을 따듯이 적셔주는 좋은 글이 우리의 마음을 따듯하게 만들어주는 정신의 양식이 될 수 있다.

사랑을 하면 마음이 따듯해진다. 반면에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면 마음이 차거워진다. 사랑하는 마음은 궁휼히 여기는 마음이다. 다른 사람을 궁휼히 여기면 마음이 따듯해진다. 사랑하는 마음은 배려하는 마음이다. 사랑하는 마음은 이해하는 마음이다. 또한 사랑하는 마음은 품는 마음이다. 사랑하는 마음은 격려하는 마음이다. 사랑하는 마음은 용서하는 마음이다. 반면에 미워하는 마음은 차거운 마음이다. 미움이 깃들면 마음이 차거워 진다. 미움이 깃들면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판단하게 된다. 그때 마음이 차거워 진다. 완악하는 마음은 차거운 마음이다. 존중하면 마음이 따듯해진다. 서로를 존중한다는 것은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것을 의미한다.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서로를 아껴주는 마음이다. 우리가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만나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게 되면 마음이 따듯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반면에 우리가 서로 멸시하고, 만나는 사람을 함부로 대한다면 마음이 차거워 진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소중히 여겨주는 사람 곁에 머물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인정해주고, 자기를 믿어주고, 자기를 키워주는 사람 곁에 머물게 된다.

우리는 정원을 가꾸듯이 마음을 가꾸어야 한다. 정원은 가꾸지 않으면 잡초로 가득하게 된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마음을 잘 가꾸지 않으면 마음에도 잡초가 가득 차게 된다. 우리의 마음을 차겁게 만드는 잡초를 정기적으로 뽑아줘야 한다. 마음이 따듯해지면 우리의 표정이 따듯해진다. 따듯한 미소는 이 세상을 따듯하게 만들어준다. 마음이 따듯해지면 우리의 언어가 따듯해진다. 아울러 행동도 따듯해진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처럼 이세상은 너무나 차겁다. 교회는 차거운 세상을 사랑의 복음으로 따듯하게 만들어주면 좋겠다. 우리 모두가 스스로 따듯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알려주는 TV나 유튜브를 보고 있노라면,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뉴스의 색깔이 그리 밝지가 않다고 느껴진다. 지난해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나오는 코로나 확진자 수와 거기에 더불어 엎친데 덮친 격으로 불쑥 찾아온 오미크론 확산으로 인하여 그와 관련된 기사들, 방역수칙을 어긴 사례들, 어느 장소에서 누군가의 부주의로 인하여 집단 감염이 이루어졌다는 등의 소식을 계속해서 듣고 있다. 거기에 더해 항상 들어도 늘 좋은 방향의 소식이 없는 정치권에 대한 부분들과 흉악범죄들에 대한 소식들, 항상 어렵다고만 얘기하는 경제 동향까지, 늘 부정적인 뉴스들을 보고 듣고 있다 보면 처음에는 신기해하며 걱정을 하고 안타까워했지만, 이제는 반감이 생겨나고 피로감이 누적되어 눈과 귀에 들어오질 않는다.

어두운 색깔의 뉴스들을 보고 듣다보면, 한국이나 미국이나, 또한 이 세계는 참으로 살기가 어려운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실상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

소박하고 잔잔한 감동이 있는 우리의 일상, 때로는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고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아직도 살만한 세상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많은 미디어 매체들이 밝은 색깔의 소식들도 좀 많이 전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여러모로 지쳐있는 우리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는 소식이 있다. 인정(人情)이라고는 별로 찾아보기 힘들고, 모두가 자기 살기가 바쁘게, 이기적인 사고속에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 연일 매스컴에 회자되어 뉴스를 장식하는건 각종 비리와 범죄, 사기, 강도, 폭행, 성범죄 등등, 그리고 묻지마 범죄…… 이렇게 울화통 터지고 믿겨지지 않는 사건 사고들뿐이다. 안타깝게도 요즘 주변에서 흔히 들려오는 건 서로 다투고 속이며 서로를 찌르고 상처 주는 얘기들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흉흉한 인심속에서도 우리를 훈훈하게 해주는 영웅들이 있다. 화마가 휩쓸고 있는 불난 집에 자기의 가족도 아닌 늙으신 할머니를 구하려고 화상을 마다않고 뛰어 들어가 노구의 할머니를 들쳐 엎고 뛰어나온 젊은 청년, 장마가 져서 홍수로 물이 불어나 강물이 철철 넘쳐나 세차게 흘러가는 물살 위에 힘겹게 죽을 둥 살 둥 떠내려가는 강아지를 위험을 무릎 쓰고 뛰어 들어가 건져내 목숨을 구해주는 어느 남자 아저씨, 이렇게 추운 엄동설한에 길거리에 쭈구리고 앉아 추위에 떨고 있는 노숙인에게 자기가 입고 있는 값비싼 다운 쟈켓을 선뜻 벗어서 입혀주고 주머니 지갑속에 들어있는 돈을 몽땅 털어 노숙인의 손에 쥐어주는 착한 여인………. 콩 한쪽도 이웃과 나눠먹을 정도로 정이 넘치던 옛날과 달리 요즘은 정말로 살기가 팍팍해진게 사실이다.

하지만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해 한발짝 앞서 있는 그들은 언제나 우리들 곁에 있다. 캄캄한 세상을 환하게 밝혀주는 ‘등불’같은 그들 덕에 이세상은 아직도 살만한 것 같다. ‘정말로 장하시고 고맙습니다’

별도로, 여기에 가슴속이 따듯해지고 우리의 마음을 따듯이 녹여주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몇년전 미국 마이애미 롱비치 법정에서 있었던 실화 이야기다. 남편없이 홀로 두 아들을 키우며 정성을 다해 교회를 섬기며 살아가는 중년의 어느 여성이 있었다. 어느날 동네 한 구석에서 아들 형제가 전쟁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때 그 지역의 유명한 저명인사가 말을 타고 그곳을 산책하다가 하필이면 이들 형제의 죽창 화살이 저명인사가 타고 있던 말의 눈을 찔러, 놀란 말이 펄쩍 뛰어 오르는 바람에 그만 저명인사와 말이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져서 죽게 되었다. 말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도 문제인데, 그 말의 가격도 자그만치 천만달러가 넘는 세계에서 몇마리 밖에 없는 명마의 엄청나게 비싼 말이었다. 두 아들이 재판을 받게 되었다. 판사가 형제들에게 누구의 화살이 말의 눈을 찔렀느냐고 물었다. 두 형제는 서로 자기가 쏜 화살이 말의 눈을 찔렀다고 주장을 했다. 서로가 자기가 활을 쏜 범인이라고 자청한다. 판사가 마음씨 아름답고 형제간의 우애(友愛)가 남다른 그 형제의 어머니를 재판정에 불러 세우고, “부인, 한 아들만 사형에 처하게 되는데 형제가 서로 자기의 화살에 말의 눈이 찔렸다고 주장하니 부인이 한 아들을 정하도록 하시오”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고 난후, 기도가 끝난 후 부인이 하는 말 “작은 아들을 사형에 처해 주십시요” 판사가 “왜 작은 아들입니까?” “판사님, 큰 아들은 전처(前妻)의 아들이고 작은 아들은 제가 낳은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부인, 자기 몸으로 낳은 아들이 더 귀하고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판사님, 옳으신 말씀입니다. 물론 제 몸으로 낳은 아들이 더 귀하지요. 그러나 저는 그리스도인이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회에서 배우고 익힌 나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그런데 제가 큰 아들을 죽게 한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장내가 숙연해지고 재판정이 쥐죽은 듯이 고요 속에 묻혀 있을 때, 방청객은 물론 부인의 말에 감동을 받은 판사가 힘을 주어 근엄한 음성으로 “부인, 지금까지 30년 넘게 재판하면서 오늘과 같이 감동을 받기는 처음입니다” 두 아들도, 또 그 어머니도, 미국사회를 아름답게 선도할 모범적 가족이라는 것을 판단한 판사는 힘주어 판결문을 낭독한다. “내가 판사의 권한으로 두 아들을 무죄로 석방한다”…………… 그러기에 오늘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미국이라는 나라가 많은 과오와 실수를 범하지만, 세계를 이끌어 갈 수 있는 미국의 원동력이 여기에 있다. 두 아들의 아름답고 기특한 서로를 위한 희생정신, 또 숭고한 신앙생활을 바탕으로 전처의 아들과 친 자식을 함께 키우며, 두 아들이 서로가 자기가 범인이라고 주장하게끔 한 어머니의 인성교육과 가정교육과 인간성을 바로 세우도록 교육한 어머니의 숭고한 사랑 섞인 모습이 오늘의 이 나라 미국이라는 나라를 대변하고 있는 듯 하다.

뉴스의 홍수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다. 나 개인적인 견해이기는 하지만, 좀 따듯한 소식들을 많이 들으며 살고 싶다. 이세상이 그렇게 잔인무도하거나 흉흉한 세상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살만하고 우리의 주위에는 가슴이 벅차오르고 마음속이 따듯해지는 아름다운 미담의 이야기들이 많다. 더 나아가 우리 자신이 따듯하고 마음이 착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누군가가 그러한 일들을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주인공이 되어 다른 이들의 마음을 따듯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성경말씀에도 이렇게 적혀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따듯한 세상, 살만한 세상은 다른 이들의 손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손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들 모두 다 함께 노력해보자.

<문학 작가 김명열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301/2022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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