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 기획시리즈 <1> 과거, 세상에서 가장 못 살고 가난했던 나라, 대한민국.

▲1964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부인 육영수 여사가 독일 루르 탄광지대의 함보른 광산회사 강당에서 독일에 취업한 한국 간호사와 악수하고 있다.

 

김명열 기획시리즈 <1> 과거, 세상에서 가장 못 살고 가난했던 나라, 대한민국.

 

과거 한국의 1960년대 경제상황은 글자 그대로 빵점(0점) 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이렇게 못 살고 가난한 나라와 백성을 그 굴레와 울타리에서 벗어나, 잘 살고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준 사람은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단연코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고 하고 싶다. 그 당시를 두고 항간의 사람들은 독재공화국이니, 독재정권의 박정희라느니 등등 뭐니 어쩌고 떠벌리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게 혹평하고 비판을 할 처지가 못 되었다. 하루 한 끼를 해 먹기가 힘들었던 시절, 추운 겨울에 난방은 꿈도 못 꾸고, 산에는 나무가 없어 벌거숭이 민둥산이던…….. 정말로 비참한 시절이었다. 그렇게 정말로 쓰라린 경험을 후손에게 물려주기 싫었던 그 시절의 어르신들에게나, 특히 위대한 영도자(지도자) 박정희 대통령에게 한국 국민들이라면 감사를 해야겠다.

5.16군사 정변(혹자는 혁명, 또는 군사 쿠테타라고도 하지만)이 일어난 1960년 초기, 한국의 경제상황은 참혹한 수준이었다. 북한의 남침으로 6.25전쟁을 치르며 그나마 있었던 산업시설들은 거의 다 붕괴되었고, 경제가 침체되어 경제성장의 기반을 형성할 아무것도 없었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60~70달러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독립한 125개 국가중에서도 최 하위 국가에 속했다. 전체 노동력의 60%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명목상의 직업이었을 뿐, 농업의 노동생산성이 극히 낮았던 것을 고려하면 농업종사자의 대부분이 은폐실업 상태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도시지역의 공식 실업률은 16~17%에 달했다. 도시와 농촌을 모두 고려할 경우 전체 노동력의 약 절반가량이 사실상 실업상태에 있었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당시 한국의 노동공급 상황은 (무제한적) 노동공급 상태에 있었다고 할 정도로 실업문제는 심각했다.

국토는 1960년대에 대부분 사용되어졌다. 유휴지역이 별로 없었다. 인구는 2200만명, 436만 가구, 평균 인원 5명, 수명은 60세까지 사는 사람이 드물 정도였다. 환갑이 정말로 의미 깊은 환갑이었다. 기온은 지금보다 1도 이상 추웠다. 1인당 순 소득은 79달러, 년 1만원으로, 한달에 약 900원을 벌었고, 꿀꿀이죽(재료도 뭔지 모르는)이 5원이었다. 농림과 어업이 40%로 압도적이었고 제조업이 13%이고, 건설은 몇몇 조그만 구멍가게 식의 건설업체가 몇개 있었을 정도다. 그나마 제조업의 80%가 경공업이었다. 농가인구는 1400만명으로 절반을 넘어 70%에 육박했다(광업까지 합치면). 이때 1만5천개의 제조업이 등재되어 있었다. 제조업도 매우 취약하여, 기계, 조립 관련회사가 1900개가 전부이고, 인력은 34000명이 전부였다. (전국 기준) 석유화학, 고무, 플라스틱 관련회사는 1300개, 인력은 33000명(전국 기준) 섬유는 4600개 회사 9600명으로 압도적이었다.

도시근로자의 평균소득은 6000원(평균 : 현재 기준으로 대기업 중견간부=즉 일반근로자는 월평균 3000~5000원을 보면 된다), 이중의 2000원 이상을 식품비로 사용했다. 하루 100원씩 30일이면 3천원이다. 꿀꿀이죽이 5원이며 쌀 한푸대 80Kg이 3010원 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일거리가 없었다. 그러니 짜장면 한 그릇에 20~30원은 엄청난 금액이었다.

전화 보급자수가 41000명, 국민 1000명중 2명이 전화를 가지고 있었다. 자동차는 전국 모두 합쳐서 31000대가 전부, 버스 4000대, 화물차 13000대, 학생은 한 반에 60명 이상이었다. 그야말로 콩나물 시루 같은 과밀 학급이었다. 상수도 보급율은 17%로 수도꼭지가 보기 힘들었고, 대부분 우물물이나 수동펌프를 사용했다. 외환보유고는 157백만달러, 수출 33백만달러, 수입 344백만달러, 이렇게 본다면 외환보유고가 별 의미가 없다.

인구는 1949년에 2019만명에서 1967년에 3천만명, 1984년에 4천만명을 넘어섰으며 2007년에는 4845만 6천명으로 1949년에 비해 2.4배 증가했다. 현재는 약 5천만명 수준이다. 1인당 국민 소득(GNI)은 1953년에 67달러에서 1977년에 1천달러대, 1989년에 5천달러대, 1995년에 1만달러대를 넘었으며 2007년에는 20045달러로 드디어 2만달러대에 들어섰다. 2017년대에는 3만달러 시대가 열렸다. 참고로 과거 한국의 특징을 말 한다면, 작고 좁은 땅덩어리에 인구는 많고, 부존자원(천연자원)은 부족했다. 36년간의 일제 강점기로 인한 식민지로 국가의 모든 자원들을 수탈당하여 부강해질 수도 없었으며, 북한의 남침으로 인한 6.25전쟁으로 인하여 전 국토가 폐해를 입었다. 이러한 불리하고 부족한 자원의 상황속에서 나라 전체적으로 성장의 동력이 부족했다. 그러나 1962년 ‘5.16 군사혁명 이후’ 부터는 정부에 의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실시됐고, 1960년도 중반부터 30여년간 연평균 8%의 고도성장을 이룩했다. ‘한강의 기적이 일어나 대한민국 경제가 본격적으로 부흥, 성장됐다’

1962년부터 1997년 구제금융이 있기까지의 대한민국 경제의 초 고속 성장을 상징하는 말로 두루쓰이고 있으며, 1980년대부터는 이를 외국에서 ‘아시아의 네마리 용’으로 부르고, 세계은행은 1965~1980년대 까지 주요국들의 경제성과를 분석한 동아시아의 기적(The East Asian Miracle)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이 기간중 세계 경제권을 통 틀어 동아시아는 최대의 성과를 보였으며 한국은 동아시아 국가중에서 최대의 성과를 냈다는 결론을 내렸다. 세계의 눈은 오늘날에 와서 이제는 대한민국을 국민들이 잘 살고 부자의 나라, 선진국으로 발돋음한 부강한 나라로 보며 인식하고 있다. 이렇게 내 나라,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 오늘날처럼 잘살고 부강해진 내면에는 피,땀으로 일궈낸 인고(忍苦)와 노력과 끝없는 연구와 발전을 향한 꿈과 비젼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제 대한민국의 발전과 부국 경제를 일궈낸 산 역사의 증인들의 과거 역사 이야기와 위대한 지도자(영도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업적 및 숨겨졌던 비화(秘話) 및 통치철학과 이념, 국민들을 위한 희생과 노력, 헌신 등등을 재미있게 엮어서 독자 여러분들께 3~4회에 걸쳐 연재하여 소개를 하여 드리도록 하겠다.

 

파독, 독일 광부와 간호사 이야기

실업문제 해소와 외화획득을 위한 해외 인력수출의 일환으로 1960년~1970년 대에 박정희 정권이 한-독 근로자 채용 협정을 통해 독일(당시 서독)에 파견한 노동자로 직종은 광부와 간호사였다.

1963년 부터 1977년 까지 파견된 광부는 8395명, 1965년 부터 1976년 까지 파견된 간호사와 조무사는 10371명 이었다.

독일은 우리나라에서 광부가 가기 전에 유고슬라비아, 터키, 아프리카 등지에서 많은 광부들을 데리고 왔었다. 그러나 이들은 아주 나태(게을러서) 하여 결국엔 광산을 폐쇄할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온 광부들이 투입되면서 생산량이 엄청나게 높아지자 독일 신문들이 대대적으로 보도를 하였고, 이렇게 근면한 민족은 처음 보았다면서 한달 급여 120달러에 보너스를 더 줘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한편 왜? 간호사가 필요하였을까? 국민소득이 올라가니 3D업종이나 힘든 일을 기피하는 현상은 어느나라나 마찬가지다. 독일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야간에는 일할 간호사가 없었다. 특근수당을 많이 준다고 해도 필요 없다는 것이다. 한국의 간호사들이 그곳에 갔을때, 한국 간호사들에 대해서는, 아주 후진국에서 왔는데 일을 맡길 수 없다 하여, 일부는 죽은 사람 시체를 알코홀로 닦고, 수의를 입히는 일도 하였으며, 일부는 임종이 가까운 환자들을 돌보도록 호스피스 병동에서도 근무하였는데, 한국 간호사들은 환자가 사망하면 그 시신을 붙들고 울면서 염을 하는 것을 보고 독일 사람들이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담당 간호사가 자리를 비우든지 아니면 갑자기 간호사가 없을 경우엔 주사도 놓고 환자를 능숙히 다루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한국 간호사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하면서 의료분야를 맡기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위급한 사고 환자가 피를 흘리면서 병원에 오면 한국간호사들은 몸을 사리지 않고 그 피를 온몸에 흠뻑 적시면서도 응급환자를 치료 하는가 하면, 만약 피가 모자라 환자가 위급한 지경에 빠지면 한국간호사들은 직접 자기 몸의 피를 수혈을 하여 환자를 살리는 등, 이런 헌신적 봉사를 하는 것을 보고 “이 사람들은 간호사가 아니라 하늘이 보내준 천사다” 하면서 그때부터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사실이 서독의 신문과 테레비젼에 연일 보도되면서 서독은 물론 유럽 전체가 ‘동양에서 천사들이 왔다’고 대대적으로 보도 하였다. 우리나라 간호사들의 헌신적 노력이 뉴스화 되자, 서독의 국민들은 이런 나라가 아직도 지구상에 있다는 것이 신기한 일이라며, 이런 국민들이 사는 나라의 대통령을 한번 초청하여 감사를 표 하자는 여론이 확산되었다. 특히 도시에 진출한 간호사들의 실력이 독일간호사들 못지않다는 인정이 일고 있던 시기, 한-독협회 바그너 의장은 병원에 오면 꼭 한국간호사만 찾는데, “왜 그러냐”고 기자가 물으니 “주사를 아프지 않게 놓는 특별한 기술자” 라 하여 주변을 놀라게 하였다는 것이다.

<다음주에 재미난 이야기 계속됩니다>

<문학 작가 김명열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297/2022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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