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단테의 첫사랑 베아트리체, “첫사랑 이야기”

<김명열칼럼> 단테의 첫사랑 베아트리체, “첫사랑 이야기”

세상 사람들을 살펴보면, 대개들 누구에게나 첫사랑이 있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리고 가슴 한구석이 저미어오는, 아름답지만 아픈 기억들, 그때만큼은 그 사람이 아니면 인생이 끝날 것만 같았던 감정속의 독한 홍역을 청춘시절에 한번쯤은 겪었을 것이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징크스가 있지만, 어떤 이는 첫사랑의 기억을 마치 지울 수 없는 마음속의 문신처럼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새로운 만남으로써 훌훌 털어 날려 보내기도 한다.

이글을 읽고 계시는 당신께서는 당신의 첫사랑을 아직도 당신의 가슴속에서 여전히 아름답게 빛을 발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정말로 지독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세상에서 가장 지고지순하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첫사랑이며 짝사랑이 여기에 있다. 바로 그 유명한 ‘신곡’의 저자 단테의 첫사랑(Dante Alighieri 1265~1321)의 연인 베아트리체(Beatrice)는 고작 24년밖에 살지 못했지만, ‘신곡’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통해 7백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가장 순결하고 가장 아름다운 천상의 여인 이미지로 남아있다. 호메로스와 세익스피어, 괴테와 더불어 세계 4대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단테, 그러나 베아트리체라는 여인이 없었다면, 아니 그녀를 그토록 열열이 사모하지 않았더라면 명작 ‘신곡’은 탄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신곡’은 밀턴의 ‘실락원’이나 번역의 ‘천로역정’과 더불어 기독교문학의 최고 백미로 꼽힌다.

중세시대 당시 라틴어가 공용어처럼 쓰이던 때에 그는 과감히 라틴어를 거부하고 제 민족의 언어인 이탈리아어로 ‘신곡’을 쓴 것도 물론 획기적인 일이었지만 절대자가 아닌 인간적인 사랑을 내포한 작품을 쓴 것 또한 당시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로써 이탈리아 문학은 라틴어로부터 분리, 국민문학이 완성되어 단테는 국민문학의 창시자로 추앙받았다. 이러한 영향은 당대의 다른 국가에도 미쳐 전 유럽에 걸쳐 문예부흥과 민족주의 물결이 일어나게끔 토대를 마련했다. 단테는 르네상스의 요람이며 중세 유럽의 중심지였던 피렌체에서 귀족출신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다섯살에 어머니를 여윈 까닭에 계모 밑에서 자라 어린 시절이 그리 행복하진 못했다. 게다가 부친대에 와서는 가문이 많이 기울어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지만 장남인 단테만큼은 열성적으로 교육을 시켰다. 하지만 부친의 사랑도 잠시뿐이었다. 그의 나이 스므살이 되기도 전에 부친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단테는 좌절하지 않고 학구열에 불타는 책임감이 강한 청년으로 자랐다.

그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베아트리체는 그가 9세때 부친을 따라간 귀족들의 파티에서 만났는데, 그는 자기보다 한살 어린 베아트리체에게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그녀는 성모 마리아처럼 고결하고 우아한 이미지로 그의 가슴속에 남게 되었다. 시집 ‘신생’에서 그녀와의 첫 만남의 순간을 “그때부터 내 사랑이 내 영혼을 완전히 압도 했네” 라고 표현했을 만큼 큐피드의 화살이 제대로 그의 심장을 관통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9년후 그의 나이 18세때 운명의 짓궂은 장난처럼 그는 거리에서 우연히 어느덧 제법 성숙한 여인이 된 베아트리체를 다시 만나게 된다.

서로 눈인사만 나눴을 뿐 이지만, 이때부터 그의 마음은 온통 그녀에 대한 사랑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어머니의 사랑에 굶주렸던 그에게 베아트리체는 그 존재만으로도 자신이 사랑하는 유일한 여인이었으며, 혹은 천사, 구원자로 생각했다. 이미 그는 열두살때 부친의 명으로 젬마 도나니크라는 여인과 정혼한 몸이었지만 그에게는 일생동안 유일한 사랑은 베아트리체 뿐이었다. 그러나 끝내 그녀는 단지 먼발치에서 밖에 바라볼 수 없는,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고야 만다. 당시 명문가였던 폴코 포르티나리의 딸이었던 그녀는 집안에서 정해준 시모네 디 발디 라는 남자와 결혼했다.

몇해 동안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사랑했건만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마저도 그리 오래 허락되지 않았다. 그토록 절절히 갈구했던 단테의 첫사랑 베아트리체는 1290년 6월8일, 24세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가 그토록 간절한 마음으로 쌓아올렸던 사랑의 탑은 모래성이 되어 그렇게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손 한번 잡아보지 않았어도, 키스한번 해보지 못했어도 단테에게 있어 그녀의 죽음은 일생일대의 가장 큰 고통이었고 슬픔이었다. 단테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부친이 정혼해준 젬마와 그 다음해에 결혼, 4명의 자녀들이 생기지만 그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다. 여전히 그의 마음은 베아트리체의 것이었다. 그 후 10년동안 타락한 생활로 방황했으나 첫사랑의 상처가 얼마나 엄청나게 컸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는 서정시를 덧붙인 산문 ‘새로운 탄생’에서 그녀의 내적 아름다움에 대해 “덕으로 감싸 있어 그 누구도 감히 헐뜯지 못하고, 함께 있는 다른 여인들까지 사랑으로 덩달아 빛이 난다”고 묘사했다. 단테의 청춘은 그렇게 첫사랑의 실패와 함께 지나갔다. 그러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가 피렌체 공화국의 정치에 참여 승승장구 하며 정치에 참여한지 5년만인 1300년 35세의 나이로 도시국가 최고위인 통령에 선출되었다. 지금으로 하면 국무총리쯤 되는 위치이다.

이무렵 피렌체는 집권세력인 겔프당이 백당과 흑당으로 나뉘어서 당파싸움을 하고 있었다. 백파에 속하고 있던 단테는 자신의 임기가 끝나자 로마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그런데 그사이 반대파인 흑파가 정권을 잡아 백파를 추방했는데, 그는 정치적 반역죄로 기소되어 벌금과 공직 추방, 그리고 2년간 국내에 들어올 수 없다는 판결을 받았고, 출두를 요구받았다. 그러나 그는 로마에서 돌아오는 길이라 제 날짜에 맞춰서 출두하지 못했다. 이에 영구 추방이 결정되었고 그것도 부족해 시 정부의 눈에 띌 경우 가차 없이 화형에 처한다는 가혹한 조처가 내려졌다. 그는 살아생전에 고국 땅을 두번 다시 밟지 못했다. 이때부터 단테의 고독한 방황생활은 시작되었다.

‘신곡’을 쓴 은총이었는지 다행히 파란만장한 인생을 위로해 주듯 축복의 땅 라벤나가 만년의 단테를 거둬주었다. 1317년 이후로 그가 생을 마치기 직전까지 이곳에서 이방인으로 여생을 보냈다. 그러던 중 사소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 이웃나라 베네치아와 생긴 불화의 화해 교섭을 그가 맡았는데, 이 일을 무사히 끝내고 돌아오던 길에 그는 말라리아에 걸려 1321년 9월13일 밤, 마침내 파란만장한 일생을 라벤나에서 마쳤다. 단테는 죽어서 그의 현실적인 아내 젬마와 그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성모였던 베아트리체와 함께 단테의 교회라고 불리우는 성 마가레 교회에 묻혔다. 필생의 대작 ‘신곡’은 죽기 전 탈고되었다. 단테가 세상을 떠난 후 피렌체에서는 국보급 대 문호를 이유없이 박대한 것을 뉘우치면서 그의 작품을 모든 시민들에게 널리 읽히도록 했다.

많은 사람들이 첫사랑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이 첫사랑의 추억은 일생동안 사랑이란 이름으로 우리의 가슴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첫사랑은 우리의 마음을 감동하게 만든다. 이런 첫사랑의 추억을 간직한 많은 사람들은 그 첫사랑의 의미와 아름다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 사랑이 비극적이든 아니면 긍정적이든지………….사람들은 첫사랑은 헤어져야 아름답다고 말을 한다. 물론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어느 정도 나이가든 사람들의 이야기다. 지금 첫사랑에 몸부림을 치고 있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면 생뚱맞은 표정이 돌아올 것이 뻔하다.

사랑은 말로 하는 것도 아니고 행동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 바로 마음으로 하는 것이고, 가슴으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랑의 헤어짐은 마음의 상처를 남긴다.

이 마음의 상처는 삶의 자양분이 되기도 하고 더 나은 삶의 디딤돌이 되기도 하지만, 삶의 멍에가 되거나 삶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벗어나고 싶은 감정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는 사랑의 포로들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단지 마음으로만 표현될 뿐이다. 이런 고통이 아름답다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렇지만 마음의 상처가 아름다운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사랑에 대한 그의 마음의 상태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헤어짐이 만들어낸 상흔은 영광의 상처가 되도록 하는 것은 그 사랑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달려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보호와 보존의 개념이고, 좋아 한다는 것은 소유의 개념이다. 꽃을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로 꽃을 꺾지 않고 보호하며 지켜보지만, 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꽃을 꺾는 것처럼,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보존이다. 사랑을 소유하려 하면 자꾸만 멀어지는 것이 사랑이다.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하거나 행복을 쫓아가면 행복은 결국 숨어버린다. 행복을 우리의 생할속에서,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을 쫓아갈 수는 없다. 사랑을 찾아갈 수도 없다. 우연히 우리의 느낌속으로 사랑은 슬그머니 들어온다. 이런 사랑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사람이 바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첫 사랑은 몸과 마음을 성숙하게 만든다. 심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첫사랑이다. 이런 첫사랑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그 첫사랑은 영원히 가슴속에 남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랑을 찾았을 때 쉽게 잊기도 한다. 단테의 첫사랑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사랑이다. 이렇듯 첫 사랑은 사람들의 삶에 많은 영향을 준다. 이러한 첫사랑에 추함이나 지저분함은 있을 수가 없다. 단지 고소하고 애상적인 감정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첫사랑의 추억은 아름다운 것이다. 첫사랑이 가져다주는 삶의 풍요로움에 우리가 감사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연유이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1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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