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 3개주 여행 <2>  국립공원 엘로우스톤 및 주변 3개주

“몬태나, 아이다호, 와이오밍” 여행 기행문

아메리카 인디안 이야기

<지난주에 이어서>

전투가 끝나자 미군 캠프에 있던 인디언중 상당수는 빠져나왔던 인디언 주거 지역으로 다시 돌아갔다. 이제 600명 정도의 전사들만 주거지역으로 들어가지 않고 적대적 인디언으로 계속 남았다. 미군들은 인디언들과 싸워서 이긴 점령지를 순찰하며 만나게 되는 인디언들은 무조건 모두를 죽였다. 1877년 봄, 도망 다니기에 지친 인디언 부족장 시팅불은 자기 부족민을 이끌고 캐나다로 넘어갔다. 크룩 장군의 부대는 추운날씨에도 불구하고 크레이지 호스를 열심히 찾아 다니고 있었다. 행군도중에 우연히 샤이엔 마을을 발견해 수많은 인디언들을 사살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맨발로 옷가지도 걸치지 못한채 황급히 천막에서 빠져나와 크레이지 호스의 캠프로 도망쳤다. 이동 첫날밤에 노인 6명과 어린이 12명이 추위로 얼어 죽었다. 디 브라운의 명저 “내가슴을 운디드에 묻어라=Bury My Heart at Wounded Knee 에는 다음날 밤에는 어린이들을 추위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말을 죽여서 내장을 빼낸 다음 그 속에 어린이들을 재웠다”라고 적혀 있다. 특히 이곳 와이오밍이나 몬태나, 아이다호주는 위치가 북쪽 추운지방에 속해 있다 보니 겨울은 길고, 추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척 춥다. 그 엄동설한의 혹한속에서 변변히 추위를 이길 수 있는 옷을 입지도 못한 채 맨발이나 홑껍데기 얇은 천의 옷으로 몸을 두른 이들은 강추위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죽을 정도의 지독한 추위와 싸워야 했다. 이 눈물겨운 실화를 들을 때 자식과 손자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눈시울이 뜨거워지지 않을 수 없다. 몬태나주는 미국의 주들 중에서 알래스카와 텍사스, 캘리포니아 다음으로 큰 주다. 남한의 4배정도로 크다. 그런데 인구는 주 전체를 합쳐서 고작 110만명 정도(2018년 통계)가 이 주(州)에 살고 있다.

참고로 이곳에 조지 암스트롱 카스터중령(장군)의 제7기병대가 인디언 추장 크레이지 호스에게 참패를 당한 이야기를 전주에 소개해드렸었는데, 그와 더불어 이번에는 인디언들의 영웅이자 그 들의 영원한 추장인 크레이지 호스에 대해 잠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다.

전설적 원주민의 추장 크레이지 호스의 이야기다.

인디언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지도자 크레이지 호스, 라코타 인디언 부족의 추장이다. 크레이지 호스는 ‘미친 말’이라고 번역할 수 있지만, 사실 라코타 족 말의 진짜 뜻은 ‘길들이지 않은 말’ 즉 야생마 이다. 16세기 유럽인들이 본격적으로 건너오기 시작했을 때 북미주, 오늘날의 미국과 캐나다 일대에는 수십개 부족 약 100여만명의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중의 하나가 라코타 또는 오글라라 수 족이라고도 불리는 인디언이다.

크레이지 호스는 원주민의 삶의 터전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 백인들과 투쟁을 벌인 사람이다. 특히 미국역사에 전설적으로 남아있는 리틀 빅혼(Little Big Horn)전투에서 미국 기병대를 전멸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라코타 족에게 크레이지 호스는 전사이기도 하지만 성스러운 존재로까지 인식되고 있다. 라코타 족은 미국의 중부지방인 사우스다코다, 와이오밍, 네브라스카 등에서 주로 사냥을 하며 살던 사람들이었다.

1800년대 중반, 동부에 살던 미국인들이 점차 새로운 땅을 찾아 서부로 이동해왔다. 철도가 개통되면서 이들의 이동은 더욱 빨라졌다. 거기에다 1849년에 서부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너도 나도 금을 캐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본래 이 땅에 살던 인디언들의 삶의 방식과 생각은 백인들과 크게 달랐기 때문에 서로 간에 갈등이 있었고 때로는 폭력으로 번졌다. 미국정부는 상황이 불안한 곳에 군대를 보내 백인 정착민들을 보호하고 인디언들에게는 다른 곳으로 가서 살라고 요구를 했다. 인디언들은 이를 거부하면서 백인들에 대항해 싸웠다. 1868년 미국정부는 인디언들과 포트래러미조약(Fort Laramie Treaty)이라는 걸 체결한다. 이 조약은 라코타 인디언들에게 말썽을 부리지 않으면 블랙 힐 일대를 소유지로 지정해 자유롭게 살게 해주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도 금광이 발견되고 백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미국 군대가 백인 정착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다시 라코타 인디언을 압박하는데, 라코타 족은 24살의 크레이지 호스를 대장으로 추대했다. 미국 역사상 유명한 리틀 빅혼 전투에서 크레이지 호스는 조지 커스터 대령의 기병대 병력과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둔다. 그러나 결국 미국정부가 대부분의 땅을 차지하게 되고 크레이지 호스와 그의 부족은 더 이상 싸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항복하면 자유롭게 살게 해 주겠다는 정부의 조건을 받아들여 항복을 했다. 그러나 정부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질질 시간을 끌었고, 화가 난 크레이지 호스는 1877년 군 사령관에게 항의를 하러 네브라스카 주 포트 로빈슨 기지로 찾아갔다. 그러다 경비병에게 체포되어 갇히는 신세가 됐다. 크레이지 호스는 탈출을 시도했지만 한 군인이 그를 대검으로 찔렀다. 존경받던 라코타 인디언 추장은 결국 다음날인 9월5일 숨지고 말았다.

라코타 인디언들은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 라코타 인디언들은 1939년부터 선더헤드(Thunderhead)라는 바위산의 한 면을 깎아 폭 195m 높이 172m의 거대한 크레이지 호스의 상을 조각하고 있다.

말을 타고 땅과 하늘이 맞닿는 라코타 인디언의 땅을 가리키는 모습의 석상, 인디언들은 “우리 붉은 얼굴도 흰 얼굴 못지않게 자랑스러운 영웅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참고로 이 크레이지 호스의 조각상에 대한 이야기는 4년전 내가 미네소타주 및 사우스다코다 주를 여행하면서 러시모어 대통령 조각상들과 함께 기행문으로 소개하여 드린바가 있다. 그 당시에 나는 이 크레이지 호스의 조각상에 대해 상세히 설명을 드렸었기에 이상의 소개는 생략키로 하겠다.

1803년 미국이 프랑스로부터 루지애나를 사들였을 때 몬태나 동부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의 탐험가 메리워터 루이스와 윌리엄 클라크가 태평양 해안으로 향할때 몬태나를 거쳤다. 영국과의 오리건 조약을 맺은후 몬태나의 북서부가 미국에 속하게 되었다. 1862년 금이 몬태나에서 발견되었고 2년후에 미국정부는 몬태나 군주(Territory)를 설립하였다. 1889년 미국의 41번째 주로 승격되었다.

이곳은 수많은 천연자원이 생산되고 있으며 천연 매장물, 풍부한 농업지대, 넓은 평원, 진한 숲을 이룬다. 석탄과 석유가 큰 매장량을 차지하며 금, 은, 구리, 납의 지하자원이 채굴되고 있다. 밀, 보리, 감자, 사탕무가 생산되며 소와 양, 말을 방목하는 목축업도 성행하고 있다. 주로 목재를 중심으로 가구 제지공업이 발달되었다.

우리가 도착한 Bozeman 시를 벗어나 우리가족 일행은 서남쪽을 향해 달렸다. 차를타고 가면서 주위의 산등성이를 둘러볼 때 금방이라도 활과 창을 멘 인디언 원주민들이 나타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달려가는 도로의 주변에는 방목된 소와 말, 양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가히 목가적이고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들이 수시로 시야에 들어왔다 사라지며, 여행에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하고 풀어주는 듯 했다. 밖의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평화로운 풍경을 감상하며 보즈먼 공항을 떠나온지 거의 2시간여만에 우리는 우리가족이 8박9일 동안 묵을 거처인 Airbnb에 도착했다. 이곳은 아이다호 주의 북단, 몬태나주와 10여마일 사이를 둔 Henry Lake 변의 높은산 아랫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아담하고 아름다운 통나무 캐빈 형의 단독 주택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앞에는 커다란 헨리 호수가 있어 앞이 탁 트이고 경관 또한 아름다웠다. 뒤에는 높은 산이 우뚝 솟아 있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차에 싣고 온 가방과 그로서리 용품들을 모두 집안의 주방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갖고 온 짐 가방들을 각자의 방(베드룸이 셋)에 풀어서 정리를 해놓았다. 대충 정리를 하고나니 어느덧 저녁 6시반이 되었다. 이곳과 플로리다 탬파와의 시간차는 2시간 차이다. 이곳이 지금 저녁 6시30분이니 탬파는 저녁 8시30분이다. 사방은 띄엄띄엄 방가로 스타일의 통나무집들이 10여채 산재해 있고 주변에는 인적 없는 들과 산뿐이다. 이곳에서는 일용품이나 그로서리용품을 살려면 적어도 20여마일 밖에 있는 West Yellow stone 동네에 가야만 실용품들을 살수 있다고 한다. 때문에 이러한 지리적 외진 곳을 대비하여 미리 Bozeman에서 그로서리를 봐 온것이 천만 다행이다.

모든 주방기구들이 불편없게 잘 준비되어서, 우리는 사온 소고기를 굽고 쌀을 씻어 앉혀서 저녁식사 준비를 했다. 얼마 후 준비된 저녁식단은 김치, 밑반찬 일부, 스테이크 등 이렇게 단촐 했으나, 이렇게 멀리 와서 한식으로 식사를 하는 것이 여간 다행이고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루종일 커피와 햄버거 등의 먹거리를 대하다가 이렇게 저녁에 김치와 밥을 먹으니 기운이 돋고 살만 하다. 식사후 잠시 나가서 집 주위를 산책 겸 둘러보니 이곳은 고산지대(해발 6900피트 약2100여m)여서 그런지 자작나무의 잎사귀들이 이미 노랗게 단풍져 물들어 있다. 공기는 참으로 맑은데 시야는 꼭 엷은 안개가 끼인 듯 뿌옇게 가려서 호수 건너편 산이 희 뿌옇게 잘 보이지가 않는다. 투명하지가 않다. 그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집안에 들어와 보니 나의 딸이 엄마 아빠를 위해 TV를 셋팅하여 유튜부 방송이나 한국방송을 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컨트롤 스위치를 켜니 원하는 채널을 선택해 한국뉴스나 유튜브 방송을 볼수 있었다. 꼭 우리집 안방에서 보는 프로그램과 똑같이 모든 방송을 시청할 수 있어서 너무나 편리하고 기분이 좋았다. 한국 뉴스를 보니 여전히 사건 사고가 빈발하고, 정치 무대는 물고 뜯고 싸우는 요지경 판이다. 국민들이 뽑은 선량들이 국민들의 혈세로 지출되는 비싼 월급을 받으며 싸움박질 하느라고 볼일도 제대로 못보고 있다. 그꼴 저꼴 보기 싫어서 텔레비전을 끄고 내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밤 10시(탬파시간 자정12시)가 넘었는데 잠은 오지 않고 이리뒤척 저리뒤척 하다가 벌떡 일어났다. 잠자리가 바뀌면 언제나 제대로 잠을 못 이루는 못된? 잠버릇 때문에 오늘도 고생깨나 한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뿌연 밤 안개속에 별빛조차 흐리게 보인다. 서늘한 산악의 밤공기가 창문을 타고 넘어와 얼굴을 스친다. 서늘한 밤의 찬 공기가 울컥 폐 속으로 들어온다. 어디선가 이러한 찬 공기속에서도 이름 모를 풀벌레들이 합창을 부르고 있다. 잠옷 속으로 파고드는 찬 냉기의 바람을 차단하며 나도 모르게 창문을 닫는다.

다시 침대속으로 들어와 숫자를 센다. 하나 둘 셋, 백, 이백, 천, 이천, 사천…….온 신경을 모아 잠을 부르며 숫자를 센다. 사천 얼마를 센것 같은데…… 그 이후는 나도 모른다. 꿈나라 속을 헤매고 있는데 ‘카톡’ 하는 셀폰의 울림소리가 고요한 방안의 정적을 깬다. 정신이 번쩍들어 시계를 보니 새벽 4시24분이다. 내가 적을 둔 교회에서 아침 6시30분에 시작되는 새벽기도 예배시간을 몇분전에 미리 알려주는 전령의 멧시지 소리다.

잠을 충분히 못잔 탓인지 골치가 너무나 아프다. 어지럽기도 하다. 온 라인으로 전달되는 목사님의 설교말씀이 참으로 먼 곳에서 전하는 듯 너무나 멀리 느껴지며 귓가에 맴돈다. 머리속으로 숙지가 안된다. 엉거주춤 일어나서 불을 켜고 준비해온 약중에서 두통에 잘 듣는 타이레놀을 두알 꺼내 입 안으로 물과 함께 털어 넣는다. 몸의 컨디션이 너무 안 좋다보니 이를 벗어나기 위해 맨손체조로 몸을 푼다. 평소에도 아침에 일어나서 규칙적으로 하는 맨손 체조이지만 오늘따라 공기 없는 화성에서 하는 것처럼 겉으로 맴돈다. 옷을 갈아입고 주방으로 나와 커피의 물을 끓인다. 잠시 후 진한 커피 향을 코끝으로 음미하며 커피를 마신다. 시간이 벌써 5시가 넘었다.

몸이 조금 풀렸다. 어둠이 아직도 짙게 깔린 밖으로 나와보니 섬뜩하도록 추위가 엄습해온다. 밖의 온도계를 보니 화씨48도다. 탬파에서 매일 90여도가 넘는 뜨거운 온도속에서 살다가 이렇게 갑자기 차거운 공기속으로 들어와 보니 피부도 놀란 듯 움추러 든다 . 잠시 머물다 이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쇼파에 걸터앉아 두손을 모아 기도를 드린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즐겁고 복된 하루, 건강한 하루가 되기를 빌고, 내 가족, 내가 섬기는 교회, 내가 아는 지인 및 친구들, 코로나로 신음하는 인류를 위해, 내 나라 조국을 위해, 미국과 세계 평화를 위해, 모든 이들을 위하여 기도를 마치고 샤워를 하고 나니 몸이 개운하고 살맛이 난다. 오늘 새벽 엄청나게 아팠던 두통의 원인을 나중에 알고 보니 고산병(산소부족)으로 인한 두통과 어지럼증 이란다. 처음에는 멋도 모르고 어제 장시간 비행기 타고 여행을 하고 이곳에 와서 여독이 풀리지않아 생겨난 병인줄 알았는데, 똑 소리 나는 나의 딸이 어리벙벙한 아빠에게 한 수를 가르쳐주셨다. 알고 보니 집사람도, 나의 딸도 유사한 두통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간단한 아침식사에 과일 쥬스를 마시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몸이 가뿐하고 날아갈 것 같다.

내가 머물고 있는 이곳은 아이다호주 북쪽 지역인데, 이곳에서 와이오밍도 20여마일 거리에 있고 몬태나 주도 10여마일 거리에 있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엘로스톤은 이곳에서 20여마일 떨어져 있다. 여러가지 지리적 편리함 때문에 이곳을 예약했다. 우리 가족은 이렇게 이곳에 머물면서 아이다호, 와이오밍, 몬태나, 3개주를 두루 두루 여행을 할 예정이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1281>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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