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전차와 옛 대중가요 ‘마포 종점’에 얽힌 이야기

<김명열칼럼> 전차와 옛 대중가요 ‘마포 종점’에 얽힌 이야기

서울의 첫 전차는 1898년 10월18일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12월25일에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 1단계가 완공되었다고 한다. 8대의 차량을 수입했는데, 40명이 앉을수있는 개방식 차량이었다. 또 황실 전용으로 고급 차량 1대도 도입되었다. 전차의 운전사들은 경험있는 일본인을 초청했고, 차장(표 받는 사람)은 한국인이 맡았다.

1894년 동양에서는 처음으로 전차를 운행한 일본에 이어 1899년 5월17일에 서울에서 전차 개통식이 열렸다. 많은 사람들이 신기한 전차의 등장에 환호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불상사도 없지 않았다. 개통 전인 1월에는 약 12m의 송전선 절도 사건이 일어나 그 범인으로 지목된 두 사람이 재판도 없이 참형되었고, 개통 1주일 뒤에는 탑골공원 앞에서 5살짜리 어린애가 치어죽자 성난 군중들이 전차 두 대를 불태운 일도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일본인 운전수들이 귀국해버리자 한동안 미국인이 운전을 하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전차 이용객은 급속히 늘어났다. 이에 따라 1900년 4월부터는 밤 10시까지 연장운행도 실시했는데, 전차가 다니면서 밤거리에도 사람들이 거닐기 시작했다. 당시의 차비는 5원 정도로 푸른색 종이표를 사서 승차하면 거리 제한 없이 청량리까지 갈수 있었다.

전차는 고종황제 시절 처음에는 동대문에서 경희궁을 거쳐 흥화문까지 개통 되었던 것이 그 후 동대문에서 서대문까지 운행되었고, 이후 청량리에서 마포까지 연장되었다. 서민들의 교통수단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다가 1968년 11월30일에 운행이 정지되었고 마포종점도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1960년대 마포는 강가에 갈대숲이 우거지고 비행장이 있는 여의도로 나룻배가 건너다니며 새우젓을 파는 등 시골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가난한 서민들이 많이 살았던 이곳은 청량리를 오고 가는 전차의 종점이 있었으나 1968년 없어졌다.

겨울밤이나 비가 내리는 저녁이면 밤늦게 전차를 타고 오는 남편과 자식 등 가족들을 마중나온 여인들이 종점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나는 5.16군사혁명(혹자는 군사정변 또는 쿠테타로 호칭하기도 함)이 일어난 다음해인 1962년 초에 내가 살던 시골 고향에서 서울의 마포종점이 있는 마포동으로 유학차 올라왔다. 시골에서 중학을 마치고 고등학교를 다니기 위해 그해 서울로 상경했다. 그 당시 마포종점 근방(도화동, 마포동, 공덕동)의 동네는 서울의 도심을 벗어난 변두리 지역으로서 전셋값이나 사글세방값이 보편적으로 도심보다는 싼 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에 전셋방을 얻고 자취를 하며 공부를 했다. 당시 나의 바로 윗 형님은 대학교에 다녔고 나는 고등하교 1학년에 입학을 한 상태다. 이렇게 우리 두 형제는 전셋방에서 자취를 하며 학교에 다녔다.

여기서 자취생활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 당시 이야기를 잠시 해보겠다. 우리 형제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계시는 부모님들의 도움을 받아 대학과 고등학교 공부를 했는데, 그 당시만 해도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식들을 서울로 유학보내어 학교를 다니게 한 집은 별로 없었다. 그만큼 나의 부모님들은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고 고생을 감수하신 분들이었다. 어머님은 일년에 서너번씩 서울로 올라오시어 농사지은 곡식과 된장, 고추장들의 장류(醬類)를 갖고 오셔서 자취하는 두 아들의 뒷바라지를 도와주셨다. 어머님이 오셨을 때는 특별히 정육점에서 고기도 사다가 구워주시고 찌게도 해 주셨다. 기본적인 밑반찬은 어머니가 준비해주셔서 부족함 없이 잘 먹었는데, 가끔씩은 가까운 신공덕시장에서 채소류와 반찬종류를 사다먹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사는 전셋집 주인 아주머니께서도 가끔씩 별식이나 반찬을 하면 나누어주기도 했고, 이웃집 아주머니들도 젊은 청년학생들이 자취하며 공부하는 것이 안스럽게 보였던지 반찬이나 별식을 만들어다 주었다. 모두가 힘들고 가난하게 사는 시절이었지만 이웃 간에 인심은 메마르지 않고 훈훈하고 넉넉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오래전의 학창시절때의 이야기지만, 나는 아직도 그 옛날의 아름답고 훈훈했던 온정속의 그 추억들을 잊지 못하고 있으며 마음속으로는 그분들 모두에게 감사를 드리며 모든 분들이 잘되시기를 빌고 있다.

그때 그 당시에는 전셋집이 마포 전차종점에서 멀지않은 곳이라서 아침저녁으로 통학할 때는 전차를 이용했다.

마포에서 서대문 로타리를 지나 종로를 경유해 청량리로 가는 전차가 있고, 또 한편으로는 을지로를 경유해 왕십리까지 가는 전차도 있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전차종점 근방에 버스종점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주로 통학할때 전차를 이용했다. 그곳에서 몇 년 동안 살다보니 또한 좋은 추억들도 많이 만들었다. 전차종점에서 멀지않은 곳에는 한강이 있다. 한강변에는 원효로로 가는 커브길(커브길 왼편 산 꼭대기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별장이 있었다)에서 시작되어 당인리 화력발전소까지 길게 뚝방길이 연결되어 있어 자전거를 타거나 보행으로 걸어가며 강 주변의 경치나 강건너 밤섬에 군락을 이루고 크게 자라난 버드나무숲의 경치와 땅콩밭 풍경, 그리고 그 안쪽에는 여의도 비행장이 있고 그곳을 지나면 영등포시내가 시야에 들어온다. 한여름밤이면 강가에 깐드레 불을 켜놓고 뱀장어낚시도 재미있었고, 무더운 한낮이면 강가에서 미역을 감고 수영을 즐기는 재미도 한여름을 시원하고 즐겁게 보낼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기도 했다.

마포종점에 사는 잇점중의 하나가 매일아침 통학길에 전차종점에서 전차를 타면 첫 출발지여서 편하게 앉아서 학교를 갈 수 있었다. 첫 출발지에서 승차한 손님들은 대부분 좌석에 앉아서 갈수 있으나 전차가 도화동, 공덕동 정류장을 지나 아현동까지 가면 어느새 전차 안은 발디딜틈이 없을 정도로 승차 손님들로 콩나물시루를 이루기도 했다.

나는 그 당시 매일 아침저녁으로 통학길에 전차를 이용하다보니 매일같이 전차표를 사기가 번거롭고 돈이 더 많이들어 아예 한달 동안 쓸 수 있는 전차표 패스를 사서 무한대로 전차를 갈아타기도 하고, 일요일 같은 때는 전차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 이곳저곳을 다니기도 했다. 마포종점에서 전차가 출발할 때는 앉아서 갈수 있었지만 몇정거장 가지 않아서 이내 나는 자리를 양보해야만 했다. 그 이유는, 연세드신 어른들은 무슨 약속이라도 한듯 전차에 탑승하고 나면 손님들 틈을 비집고 들어와 교복차림의 내 앞으로 다가와 손잡이를 잡고 서있다. 이러한 상황이 되면 아무리 강심장이고 철판을 깔았어도 일어나서 자리를 양보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고서 목적지까지 간적은 몇년동안 손가락을 꼽을 정도였다. 그 당시 전차는 서울 시민들의 대표적인 교통수단이었다. 버스나 지하철이 대중화되기 전인 1950~1960년대에는 전차가 서울의 대표적인 교통수단이었다. 나는 대학에 들어가서도 종종 전차를 이용했다. 전차를 타고 종로에서 내리면 가끔씩 친구들과 어울려 그 일대 찻집(다방), 빵집(제과점)에서 다른 학교 여대생들과 만남을 갖기도 했다.

당시의 종로2가 YMCA건너편 종로서관 옆에는 고려당과 뉴욕제과, 명동 충무로 거리에는 태극당이 있었고 좀 나중에 청계천 옆 무교동입구에 2층에는 ‘풍년’이 생겼다. 또한 빵집 외에도 덕수궁이나 덕수궁 뒷편 고전풍 돌담길이 있었는데 광화문 네거리에서 신문로를 따라 오다가 덕수궁쪽 길로 빠지면 경기여고가 있고, 붉은벽돌의 구세군 본영과 미 대사관저를 지나 정동교회 옆에 이화여고가 있어 남학생들에겐 인기있는 아베크 코스이기도 했다. 음악감상실(Music Hall)이 생겨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는데 탑골공원 파출소 골목에 있던 음악감상실 ‘르네상스’가 화신, 신신백화점을 지나 종로1가 청진동 피맛골 2층에 자리 잡았고, 명동엔 학사주점이 있고 옆 지하에는 돌채가 있었다.

60년대에는 오리지널 LP전축 판 ‘디스크’ 라든가 전축을 가진 집이 드믈었기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음악감상실을 이용할 수밖에 없던 시절이기도 하였다.

전차가 대중교통으로 각광을 받던 그 시절, 그와 더불어 그 당시 사회의 모습 일부를 재조명해 추억의 수레 위에 실어 올려보았다. 오래 묵은 사진첩 속에 차근차근 찍어서 간직해두었던 옛날 사진같이, 그때 그 당시 일들이 이제는 머리와 가슴속에 어렴풋이 안개속의 그림자처럼 자리 잡고서 오랜 시간과 세월이 흘러갔는데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이제는 아련한 추억속으로 사라진 머나먼 옛날의 젊은 시절 아름다웠던 추억들이다.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이기도 하지만 반추(反芻=되풀이하여 음미하고 생각함)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과거 어느 한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본능이 가슴 한구석에 늘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처럼 누구에게나 회귀하고 싶은 추억이나 공간이 있기 마련, 사람에 대한 추억도 아련하지만 특정 장소에 대한 추억도 그에 못지않게 마음 한쪽을 저리게 한다.

나는 가끔씩, 이따금씩 유튜브를 통해 전달해지는 한국의 옛날 흘러간 대중가요를 들을 때마다 그 노래가 떠올려 주는 옛날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유행가에 무슨 심요한 철학이, 삶과 사랑에 대한 대단한 성찰이 담겼을 리는 없다. 그것은 가장 대중적인 언어로, 가장 대중적인 주제의 삶과 사랑을 가장 대중적인 방식으로 노래할 뿐이다. 유행가가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것은 그 노래에 담긴 세월과 시간의 자취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중가요를 단순히 리듬과 멜로디로서 가 아니라 그것과 함께 했던 한 시대의 공기,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으로 복기(復記)해낸다. 노래를 통해 복기해 내는 그 시대의 공기에는 역사적, 사회적 상황보다는 개인적 삶의 굴곡이 짙게 깔려 있기 마련이다.

오늘은 우연히 유튜브 TV를 켜 보니, KBS방송에서 방영하는 가요무대 프로그램이 화면으로 떠올랐다. 이 가요무대는 1985년 11월4일에 처음으로 방송된 프로그램으로, 흘러간 노래와 트로트를 부르며, 향수와 추억을 되새기는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한 음악 프로그램이다. 김동건 아나운서가 진행을 맡고 있는데, 이날의 프로그램 진행중에 은방울 자매가 출연해 ‘마포종점’을 구성지게 부르고 있었다. 나는 이 마포종점의 대중가요를 들을 때마다 옛날 내가 처음으로 서울에 상경해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곳이 바로 마포종점의 마포동이였기에 더욱 이 노래에 애착심이 생기고, 그 노래와 더불어 옛날의 추억이 노래와 함께 되살아나 오버랩(Overlap)되어 마음속에 잔잔한 파문(波紋)을 일으켜주곤 한다. 아울러 이번에는 이 마포종점에 얽힌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곁들여서 들려드리도록 하겠다.

1960년대에 은방울 자매가 불러 대 히트를 친 가요노래 ‘마포종점’은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즐겨 부르던 애창곡이었다.

그러나 그 마포종점의 노래가 시중에서 대중들에게 즐겨 부르게 된 그 내면의 뒷면에는 가난한 어느 젊은 여인의 슬픈 사랑이야기가 곁들여 숨어있다. 대중가요 ‘마포종점’을 쓸 당시 작사가 정두수씨는 연속으로 히트곡을 내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던 박춘석 작곡가와 밤을 새워가며 작품을 썼다. 그들은 밤샘 작업 후 마포종점 인근에 있는 영화녹음실의 성우, 배우, 스태프 등이 새벽마다 모이는 유명한 설렁탕집에서 식사를 하곤 했다. 어느날 그 집에서 식사를 하는데 설렁탕집 주인으로부터 어느 가난한 젊은 여인의 슬픈 사랑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젊은 부부가 방세가 싼 마포종점 부근의 허름한 집에 사글세로 살고 있었다. 대학강사로 재직하고 있는 남편과 살고 있던 여인은 가난한 살림에도 악착같이 남편을 뒷바라지 하였다. 겨울이면 따듯한 아랫목 이불에 밥을 묻어두고 남편을 기다리던 그녀였다. 남편이 일찍 귀가하면 마포종점에서 손을 잡고 인근 당인리로 이어지는 긴 강둑길을 따라 걸으면서 정담을 나누면서 사랑을 키웠다. 그러다가 더 큰 도약을 위해 남편은 미국 유학을 떠났는데 너무 과로하여 뇌졸증으로 쓰러져 졸지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런 비극적 소식을 접한 여인은 밀려오는 충격을 견딜 수 없어 마침내 실성을 하게 되었다. 정신착란 상태인 그녀는 이미 돌아간 남편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궂은비 내리는 마포종점을 매일같이 배회하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종적을 감추었는데,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1966년 이런 비극적 이야기를 설렁탕집 주인으로부터 듣고 작사가 정두수 선생은 밤잠을 설쳤다. 가난속에서도 서로 뜨겁게 사랑하며 성실하게 살았으나 불행한 결말에 이른 젊은 부부의 서러운 삶을 그리는 작사를 하였다. 박춘석 작곡가는 이런 비극적 요소가 담긴 가요 시의 뜻을 살린 애절한 곡을 만들었다. 깨끗하고 독특한 화음을 구사하는 은방울 자매의 입사 기념으로 1967년 지구레코드사에서 발매 하였는데 크게 히트하였다. 현재 마포 어린이 공원에는 이 노래를 기념하여 노래비가 서 있다.

다음은 ‘마포종점’의 노래 가사이다. 1) 밤 깊은 마포종점, 갈곳없는 밤 전차 / 비에젖어 너도 섰고 갈곳없는 나도 섰다 / 강 건너 영등포에 불빛만 아련한데 / 돌아오지 않는 사람 기다린들 무엇하나 / 첫 사랑 떠나간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2) 저 멀리 당인리에 발전소도 잠든밤 / 하나둘씩 불을 끄고 깊어가는 마포종점 / 여의도 비행장엔 불빛만 쓸쓸한데 / 돌아오지 않는 사람 생각한들 무엇하나 / 궂은비 내리는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1967년도에 이 곡이 히트하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생겼는데, 그것은 실제로 마포종점 일대 상가가 활성화 된 것이다. 전차뿐만 아니라 서강쪽으로 꺾어져 들어가면 버스종점이 있는데, 이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종점을 구경하기 위해 마포를 찾아오기도 했다. 이러한 풍경은 좀체로 보기 힘든 현상 중 하나여서 당시 사회적으로 쟁점이 되었는데 아마도 넘치는 뽕짝 분위기에 섬세하고 세련미 넘치는 여성듀엣 은방울 자매의 화음이 당시 대중들에게 신선한 매력으로 등장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들은 서민들의 인생과 사랑, 그리고 삶 그 자체를 담아 진실한 감정으로 노래했다. 지금은 그곳이 옛날의 흔적들은 찾아볼 수 없이 모든 것이 변했을 것이지만, 그래도 그 옛날 그 시절 전차종점의 그 아련한 추억은 지금도 나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어 옛날의 추억을 기억하며 마포종점에 대한 이야기를 써 보았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1272>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