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소크라테스와 철학 이야기

<김명열칼럼> 소크라테스와 철학 이야기

철학(哲學), 오늘은 철학자 소크라테스에 대해 설명을 하기 전에 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하도록 하겠다.

우리나라(한국) 사람들이 철학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길거리에 다니다 보면 운명, 관상, 사주, 점과 관련된 것들을 짚어주고 설명해주는 집들이 운명철학관이란 간판을 달고 영업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제적 철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상당히 거리가 먼 이야기다. 그 다음으로 꼽는다는 것이 철학이란 어렵고 따분한 인생에 관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철학이란 무엇인가?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 그리스어 Phileo와 지혜를 의미하는 Sophia의 결합어(Philosophia=철학)이다. 소크라테스에서 시작된 학문으로 ‘인간이 영혼을 잘 가꾼다’. 플라톤은 ‘경이로움을 느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인간은 본성상 앎을 갈망한다’고 정의했다. 다시 함축시켜 말한다면 세계와 인간의 삶에 대한 근본 원리 즉 인간의 본질, 세계관 등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철학도 다양한 학문과 함께 쓰일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형이상학, 윤리학, 정치철학, 언어철학, 사회철학, 과학철학, 논리학, 미학 등이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의 연구대상은 자연이었다. 이것을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이라고 하는데 자연을 스스로 움직이는 대상으로 생각하였다. 기원전 5세기 후반 즉 소크라테스 시기 철학은 인간의 혼을 연구대상으로 하였으며, 특히 윤리상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 소크라테스 이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등장한다. 이들은 소크라테스 시기 철학의 대상과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 대상을 동시에 연구하여 철학체제계를 정립하였다. 한편 중세 철학에서 대상은 신이었다. 중세는 기독교사상이 주류였기에 종교상 주관을 강하게 띠어 신을 향한 고찰이 결국 중심문제였다. 근대철학에서는 인간 지식의 근원이 주요 연구대상이었으며 데카르트의 합리론과 로크의 경험론이 나오게 되었으며, 칸트는 합리론과 경험론을 종합하여 비판 철학을 완성하였다.

세상을 인식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시작된 삶에 대한 고민들이 점차 학문으로 세분화 되었고 사람과 사물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더 많은 호기심으로 사람들을 자극하고 있다. 이 모든 생각의 바탕이 바로 철학이다.

그래서 특정 분야가 철학과 궁합이 잘 맞는다고 생각할 수는 없으며 또한 철학적 관점이 필요없는 분야도 없다고 할 수 있다.

철학은 이렇게 우리가 매일 접하는 일상, 예술, 학문 등 모든 영역에 걸쳐 생각의 틀을 제공하고 조금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를 일깨워준다. 그 실예로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문학과 철학은 오래된 친구다.

문학은 인간의 삶과 세상의 진실에 대해 고민하고, 철학은 그것을 해석하고 성찰하는 힘을 제공한다. 수많은 철학적 질문과 대답속에는 삶에 대한 목적과 방법들이 녹아있다. 그것은 우리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나가는 바탕이 되고 있다. 아울러 철학은 언제나 다양한 인접분야에 적용되며 우리들이 살아 숨쉬는 생각의 도구가 되고 있다.

이제는 이어서 세계의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이어 가겠다.

소크라테스(기원전 470년경~기원전 399년 5월27일)는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기원전 469년 고대 그리스 아데네에서 태어나 일생을 철학의 제 문제에 관한 토론으로 일관한 서양 철학에서 첫번째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아주 못생긴 추남이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의 못생긴 외모는 이에 어린시절부터 장안의 화제였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이 아무리 놀려도 그는 밝고 건강하기만 하였다. 특히 그의 신체는 무척 건강한 편이어서 추위나 더위에 대단한 인내력을 발휘하였고, 밤새 술을 마셔도 끄떡없었다고 그의 제자 플라톤은 회고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조각가인 아버지와 산파(産婆)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부친이 종사하던 직업이나 가족을 등한히 한 채 후진 양성에만 전념했다. 비록 가난하여 누추한 옷차림이었으나 그의 뒤에는 항상 많은 제자들이 따르고 있었으며 그 가운데는 상류사회 출신도 많이 끼여 있었다. 그는 무보수로 이들을 가르쳤고 기껏해야 저녁 한끼로 만족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아내 크산티페가 그를 비난한 일은 하나의 전설처럼 되어있다. 그녀는 남편이 철학자라는 직업을 갖지 못하게 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썼다. 집에서는 지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남편을 못살게 굴었다. 그녀는 심지어 남편을 뒤 쫓아가 시장 한복판에서 옷을 마구 잡아당겨 찢기까지 했다. 이에 대한 친구들의 비난이 쏟아졌음에도 소크라테스는 전혀 개의치 않았으며 끈질긴 인내심으로 잘 견뎌냈다. 아닌게 아니라 그녀가 남편을 들들 볶아댐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있었으니, 아내가 못살게 굴면 굴수록 소크라테스는 불화가 끊이지 않는 집을 나와 서둘러서 그의 철학적 담화로 빠져들었다. 만일 그가 서재에만 파묻혀 지냈더라면 결코 유명한 소크라테스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어느날 한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 결혼하는 것이 좋습니까?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까?” 이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결혼하게. 온순한 아내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사나운 아내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테니…….”

철학자들 가운데는 현모양처의 이름에 걸맞는 이내를 가진 경우도 있고, 소크라테스처럼 악처의 대명사로 통하는 아내를 둔 경우도 있다. 부유한 철학자도 있고 가난한 철학자도 있다. 좋은 집안 출신도 있고 비천한 가정출신도 있다. 공자나 토정 이지함, 마르크스 야스퍼스 처럼 외모가 좋은 경우도 있는가 하면 소크라테스와 키르케고르, 칸트(160Cm도 되지 않는 키에 왜소한 체격, 기형적인 가슴의 허약한 체질였음)와 사르트르(사팔뜨기)등과 같은 경우도 있었다. 물론 신언서판(身言書判=몸과 외모, 말씨,글씨체, 판단력 등)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을 볼 때 먼저 외모를 보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사람의 가치는 결코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니다. 부자나 가난하냐도 아니고 미인의 아내를 두었느냐 추녀인 아내와 함께 사느냐 하는 것도 별반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 출세했느냐 못했느냐 하는 것도 사실 가치척도가 되지는 못한다. 이제 소크라테스에 대하여 좀더 사실적인 자세한 이야기를 해보겠다.

작년 추석때, 한국에서 나훈아의 신곡 ‘테스 형’으로 인해 장안에서 소크라테스가 다시금 부각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세계 4대 성인중 한사람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세계 4대성인은 예수님,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로 꼽는다. 여기에 그들을 소개한다면 공자(BC 479~552)는 중국의 노나라 사람이고, 석가모니(BC 563~483)는 고대 인도, 지금의 네팔 사람이며, 예수(BC 4경 ~ AD30)는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Bc470~ 399)는 서양철학의 원조라 할 수 있다. 이들 4대 성인을 두고 사람들은 세상의 빛이라고 표현한다. 공자가 냉정하게 빛나는 객관적인 빛이라면 석가모니는 마력적인 추상의 빛이며, 예수는 마법처럼 변용된 빛이고, 소크라테스는 실제적인 빛이라고들 말하고 있다.

공자는 교육을 통해 인간의 삶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고, 석가모니는 명상을 통한 깨달음의 길을 제시했으며 예수는 이 세상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라고 가르치셨다. 반면 소크라테스는 사고(思考)를 통해 진리를 깨닫게 했다. 세상의 악에 대응하는 방법도 네 분의 성인이 거의 비슷하지만 약간의 차이는 있다. 공자는 선(善)을 선으로 갚고 악(惡)은 정의로 갚으라고 권면하는데, 석가모니는 어떤 악에도 저항하지 않는 보편적 사랑, 모든 생명체에 대한 자비심을 역설하고 있다.

예수님은 잘 알려져 있듯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소크라테스는 악을 갚기 위해 불의가 재발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네명의 성인 모두가 책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도 공통점의 하나이다. 이는 훗날 제자들에 의해 이들 성인의 삶과 가르침이 보강되면서 철학적 깊이가 더욱 빛나게 되었다. 우리는 이 네분 성인들을 통해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지표로 삼아야겠다. 성인들처럼 하늘의 뜻을 깨달아 중생을 일깨우고 옳은 길을 가도록 지도하기는 어려울지라도 성인들의 사상을 삶의 나침판으로 삼는 지혜를 지녀야겠다. 그래서 위대함은 훌륭함을 뛰어 넘는다고 했다.

그러데 소크라테스 하면 두 명언이 떠오른다. ‘악법도 법이다’ 자신에게 반역을 선동했다 하여 사형을 선고한데 대하여 도망갈 수도 있었지만 “악법도 법이다”라면서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 그리고 또한 ‘너 자신을 알라’ 이다. 소크라테스는 서양철학의 원조이다. 그는 제자들을 참 잘 두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글을 쓴 게 없다. 다만 그의 글을 제자들이 모여 기록하였다. 공자의 말을 제자들이 옮겨 적은 것이 ‘논어’이듯이, 소크라테스도 그의 제자들이 그의 말을 옮겨 기록하였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중 대표적인 사람이 플라톤이다. 또 플라톤의 유명한 제자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의 개인교사 였다. 세계에서 가장 머리 좋고 덕성이 높고 가장 용감한 사람이 바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알렉산더대왕 이라고 할 수 있다. 알렉산더 대왕은 30대 초반부터 죽을 때까지 10여년 동안 그 당시의 문명세계를 정복하여 대 제국을 만들었다. 그러나 죽고 나서 4나라로 갈라지고 헬레니즘(Hellenism) 시대를 열었다. 그리스 문명이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에 걸쳐서 퍼져나가 황금기를 만드는데, 이때 만든 조각품이 세계 최고의 걸작품들이다.

인류가 만든 최고의 건축물, 조각품, 미술품 등이 바로 알렉산더 대왕 헬레니즘 시대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모든 문제들을 평생 동안 토론을 통해 풀었다. 욕심없이 진리만 쫓으며 열성과 지혜를 쏟는 그의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래서 아데네 시인들은 그를 “참 지혜와 진리로 이끌어주는 스승” 이라고 칭송했다. 당시 고대 그리스에서는 델포이의 신전에서 신의 뜻을 물어 응답을 받은 신탁이 이루어졌다. 이 델포이 신탁이 “이 세상에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사람은 없다”라고 응답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가난과 세속적 평가에 전혀 구애받지 않았고, 세번 보병으로 참전한 아군이 세가 불리해 후퇴할 때도 동료들을 추수려 가장 늦게 물러난 담대한 인간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어떤 사람인지는 그의 재판과 죽음의 풍경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군중에게 영합하지 않았으며 ‘악법도 악법이다’라며 독배를 마심으로써 지행일치(知行一治) 라는 자신의 신념을 지킨 사람이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1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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