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녹색물결 춤추는 보리밭, 하늘에는 종달새 노래하고…

<김명열칼럼> 녹색물결 춤추는 보리밭, 하늘에는 종달새 노래하고…

물먹은 달빛이 내려앉은 보리밭, 낭만과 열정을 들추어내고………..

보리밭에 얽힌 사연은 향수처럼 아련하게 추억속의 한편 드라마가 되어 머리속에 떠 오른다.

양푼에 식은 보리밥 한 덩어리 놓고 동생들과 눈 흘기며 숟갈싸움을 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 그 시절 보통사람들의 사전에는 ‘점심’이란 낱말이 없었다. 가난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며 늘 허기져 속으로는 울면서 살았다. 고개 중에 가장 넘기 힘들고 어려운 고개가 보릿고개라고 한다. 허깃증에 시달려보지 않은 사람은 먹는 일의 거룩함을 알리없다. 농촌 시골의 이맘때면 겨울양식도 바닥나고, 보리에 뜨물이 엉겨 지레 풋바심이라도 해먹으려면 아직도 한참을 기다려야 할 판이니, 많은 식솔을 거느린 가장은 억장이 무너지는 듯 했을 것이다.

조악한 보리밥은 가난의 상징, 이젠 나의고향 들녘 어디를 가더라도 보리밭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의 그 자리에는 비닐하우스가 줄지어 들어섰고, 어느 곳에는 공장이 들어서서 낯 설은 기계소리만 요란하다. 보릿고개의 마지막 세대들이 지금 우리 농촌을 지키고 있는 나이들은 노년들이 주역이다. 보릿고개라면 ㅂ자도 꺼내고 싶지 않지만 지난날 보리밭에 얽힌 애환은 그들 가슴 밑바닥에 향수처럼 남아있다. 4월이 오면 보리는 어느새 훌쩍 자라있다. 동네 어귀에 들어선 하늬바람이 보리밭사이를 휑하니 내 달리면 초록빛의 장엄한 스펙트럼이 강물처럼 여울져 흐느적거리고 싱그러운 보리냄새가 온 동네를 감싸 도는 듯 했다. 불어오는 바람결에 와르르 떠밀리며 눕는 듯 하다가 다시 일어나는 보릿대의 모습은 여고 운동장에서 벌어지는 마스게임(Mass Game)을 보는 듯, 때로는 속살이 비치는 자리옷을 걸친 여인의 유혹적인 춤사위를 보는 듯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칭얼거리는 젖먹이를 등에 업고 코흘리게 꼬마를 앞세워 머리위에 들밥을 담은 함지박을 이고 보리밭 샛길로 성급히 내닫는 아낙네들의 모습에는 안팎으로 일에 쫓기는 신산스러운 삶의 고통이 진하게 배여 있었다. 그런 아낙네들은 무슨 배짱으로 아이들을 겁 없이 줄줄이 낳으셨던지, 아이 하나 더 낳는 희생쯤이야 예사로운 일로 알았던 그때의 어머니들, 오늘날 아이 하나 낳는 것도 부담스러워 하고 불임을 미덕(?)으로 아는 요즘의 세태에서 보면 성스럽기조차 하다. 속절없는 세월속에 그 아이들이 지금은 노년기에 살아가고 있다.

종달새는 온종일 보리밭 위에서 종알거렸다. 보리밭이 서식지인 종다리는 보리가 익어 주인이 낫을 대기 전에 부랴부랴 새끼를 부화해 날려야 했으니 종달샌들 오죽이나 마음이 급하고 정신이 없었을까. 철모르는 아이들은 산과 들을 쏘다니며 찔레순을 꺾어먹고, 감꽃도 주워 먹고, 심심하면 보릿대를 잘라 피리를 만들어 불었다.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아지랭이 속에……..피~ ~ㄹ ㄹ 닐니리… 삐 ~ ~ 이 ~ ~…….. 소년의 피리소리는 어느새 머리위의 종달새 소리와 어우러져 자연속의 자그마한 앙상불을 이루었다. 보리밭이 사라진 뒤, 종달새는 통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요즘 서울에서는 종달새 한쌍에 350만원 이라고 한다. 이 값이면 숫 송아지 두마리 값이란다. 화사하지도 않은 종달새가 이렇게 고가인 것은 보리밭에 얽힌 사연과 관련이 있었나보다.

훌쩍 자란 보리밭은 포근하고 호젓해서 밀어를 나누기에 적합한 곳이다. 마을에 수두룩했던 처녀 총각들, 그때인들 염문이 없었으랴 만은………. 물 먹은 달빛이 내려앉은 저녁이면 보리밭의 분위기는 낭만과 열정을 들추어내기에 충분했다. 거기서 벌어지는 일이란 허무적인 불륜과는 거리가 먼 거스를 수 없는 원초적인 그 무엇이었으리라.

보리는 추운 겨울을 이겨내는 생명력이 강한 작물이다. 황량한 겨울 들녘을 푸르름으로 가득 채워주던 그 보리를 지켜보면서 그들은 배고픔도 이겼고, 감성도 키우며 사랑과 배반도 체험했다.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는 이 계절에, 우리 곁에서 사라진 것이 어찌 보리밭과 종달새뿐이랴……. “제비 앞장세우고 봄이와요….”하며 부르던 동요속의 제비도, 노란 장다리꽃밭 위를 눈오듯이 날아들던 나비떼들도, 겨울잠을 깬 개구리도, 송사리도, 땅강아지도, 지독한 농약 때문에 결국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지금은 보리밭 하면 낭만적인 향수가 깃들인 푸른 초원을 연상하지만, 그 옛날 그당시에는 보리가 목숨의 연명줄이었고 삶의 전부였다.

한편 이 보리밭에 얽힌 재미있었던 비화(秘話)의 이야기들을 참고로 들려드리도록 하겠다.

한국의 연로한 분들중에 많은 분들은 현대의 창업자 고(故) 정주영회장이 보리싹을 가지고 잔디처럼 캄푸라지(Camouflage)한 에피소드를 알고 있을 것이다. 1952년 12월, 한국전쟁(6.25전쟁)중에 있었던 일이다. 당시 34대 미국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국전쟁에 참전중인 미군들을 위로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겠다는 통보가 주한 미8군사령부에 떨어졌고, 주한 미8군사령부는 비상이 걸렸다. 전쟁중이라 호텔 같은 시설도 없고 대통령이 묵을 숙소가 없었다. 미8군사령부는 한국정부와 상의해서 옛날에 왕이 살았던 운현궁을 대통령숙소로 사용하기로 했으나 운현궁에는 현대식 화장실, 보일러 난방시설, 샤워실 등 아무것도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고 한다.

아이젠하워대통령 방한일자는 15일밖에 남지 않았었다. 정부에서는 급히 현대건설 정주영사장에게 공사를 요청했다. 일주일 이내에 공사를 완료하라고 했는데, 정주영사장은 현장에서 24시간 감독을 하며 4일만에 공사를 멋지게 끝마쳤다. 이것을 본 미군관계자가 “현다이 넘버원”이라고 극찬을 했다고 한다.

아이젠하워 방문일정 중에는 유엔군묘지 참배가 들어있었다.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참전용사들의 묘가 있는 부산 유엔군묘지는 전쟁중에 조성되어 풀 한포기 없는 맨땅에 팻말만 꽂아놓아 황량하고 초라하기가 그지없었다. 주한 유엔군사령부에서도 묘지를 꾸밀 시간적 여유가 없었지만, 특히 겨울철이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젠하워대통령이 유엔군묘지를 가보겠다니, 또 비상이 걸렸다. 황량한 묘지에 대통령을 모시고 갈수 없었던 사령부는 한국 정부측에 푸른 잔디를 덮을 방법이 없겠느냐고 문의해왔다. 하지만 겨울철에 푸른 잔디를 입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당시는 아직 인조 잔디 같은 것은 개발되지도 않았던 때다. 한국의 여러 건설업체에 문의했지만 모두가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단 그중에 한 업체에서만 할 수 있다는 답변이 왔다. 바로 현대건설의 정주영사장이다. 정주영은 사령부관계자를 만나 공사내용을 상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겨울철에 파란잔디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니 대통령이 다녀가시는 동안 파랗게 풀이 덮인 묘역을 만들기만 하면 되지요?’ “예, 대통령이 유엔묘지에 왔을 때만 모역이 파란 풀로 덮여있으면 됩니다. 공사비를 3배나 더 드릴테니 꼭 해주세요”

정주영사장은 그날 바로 낙동강 하구 지역으로 내려갔다. 남쪽 바닷가의 많은 보리밭에는 늦가을에 심은 보리싹이 5~6Cm쯤 자라고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파랗게 잘 자란 보리밭 주인을 만나 보리밭 전체를 통채로 사버렸다. 정주영은 바로 대형 트럭 30대를 동원해서 삽으로 보리싹을 흙채로 떠서 유엔묘지로 실어 날랐다. 다음날 유엔묘지는 파란 보리싹으로 덮였다. 흙먼지가 날리던 유엔묘지가 ‘푸른 공원’으로 바뀐 것이다. 미 사령부 관계자들이 보고 깜짝놀라며 “원더풀, 브라보”를 계속 외쳤다고 하며, 그 후부터 미군부대 공사는 현대가 독차지 했었다고 한다.

지구의 저쪽 건너편 중동지방은 보리재배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어서 성경에도 보면 보리에 관한 구절이 많이 나온다. 오병이어(五餠二魚)의 오병은 보리떡을 말한다. 보리는 영어로 Barley라고 하는 것을 보면 동,서양이 공통적인 곡식으로 출발한 것 같다. 보리에 관한 언급이 성경에 자주 등장하듯이 성경시대나 지금이나 팔레스타인 지방의 중요한 농산물이다. 어쨋거나 이렇게 보리는 인류역사상 인간들에게 아주 중요한 곡식이었다. 옛날 나의고향의 지금 이맘때쯤이면 보리이삭들이 영글어서 누렇게 익어가고 있을 때이다. 과거의 아련한 추억들을 더듬으며 오늘은 보리밭과 종달새에 얽힌 이야기들을 향수에 젖어 펜 가는대로 적어보았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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