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위대한 지도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야기

<김명열칼럼> 위대한 지도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야기

김문수 전 경기지사는 대한민국 건국을 이끈 이승만 전 대통령과 한강의 기적을 통해 현재(경제 강국) 대한민국의 초석을 닦은 박정희 전 대통령께 감사를 표하며,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이승만, 박정희를 욕하면서 김정은을 칭송하는 세상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개탄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믿었던 심복의 총탄에 의해 서거한지가 벌써 40여년이 흘러갔다. 세월이 지나 정권이 바뀌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현 문재인 정권에 들어서 박정희대통령은 전두환 대통령 다음으로 아주 나쁜 독재자로 낙인이 찍혔다. 이미 고인이 된 박정희라는 거인(巨人)을 한마디로 평가할 수는 없다.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대한민국 현대사에 대한 평가나 마찬가지로 매우 민감하다. 현실은 복잡한데 주장은 단순하고 여론도 양분화 돼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역사를 믿을 수가 없다. 정권의 힘에 의해 사실이 왜곡되는 것 같아서다.

지금 우리가 필요한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하 호칭은 박정희로 하겠다)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보는 눈(眼)이 필요하다.

우선 개념부터 이야기를 해보겠다. 흔히들 사람들은 5.16을 군사 쿠테타라고 한다. 특정세력(주로 군부)이 무력으로 합법적인 정부를 무너뜨리는 것이 쿠테타다. 그런데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5.16이 쿠테타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중요한 것은 쿠테타가 과연 불가피한 선택이었나? 하는 것이다.

5.16의 불가피성은 역사적으로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5.16은 쿠테타가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살리기 위한 어쩔 수 없이 일어난 군사혁명이라고 하고 싶다. 그것도 무혈(無血)혁명이라고……… 당시 집권당인 민주당의 실정(失政)으로 경제는 물론 안보 위기를 느낄 정도로 사회는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자칫 공산화가 될 수도 있는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당시 박정희소장을 중심으로 군사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지난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이후 적잖은 나라들이 개발독재를 택했다. 박정희는 개인적 탐욕이 없는 애국 독재자였다. 그 독재는 성공했고, 세계 최 빈국중의 하나인 대한민국은 부강해졌다. 흔히들 박정희가 경제발전은 이뤘지만 인권은 탄압했다고 비난한다. 일부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달콤한 독재는 없다. 독재는 모두 추하고 가혹하다. 당시 현실에 맞는 그러한 독재 없이는 경제발전과 안보, 국방이 어려웠는데, 왜 독재를 했느냐고 묻는다는 것은 끼니를 못 잇고 밥을 굶고 있는 사람에게 왜 빵이라도 사먹지 그러느냐는 것과 다름없다.

박정희의 산업화 성과는 지금도 우리가 인정해야 하는 대목이다. 박정희의 조국근대화는 곧 산업화다. 그럼에도 민주화 분야에선 혹평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두 마리의 토끼를 쫓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산업화에 매진하기 위해서는 민주화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현 세대에 와서는 집권당이 박정희를 쿠테타라며 정통 친일파로 매도하고 국민들에게 아주 나쁜 지도자로 인식시켰다. 그리고 저들은 이뿐 아니라 친미파 이승만이 건국을 이루고 박정희는 새마을운동을 통해 경제발전을 해 낸걸 폄하하고 부정하려든다. 좌우 구분 없이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임시정부수립을 건국일로 고집한다. 이는 좌파세력, 공산주의자들을 합법화해 독립운동 유공자로 만들려는 의도가 다분히 담겨있다.

지도자와 국가에 대해서는 ‘줄기와 가지’ 논리로 판단해야 한다. 가지가 썪거나 부러져도 줄기가 싱싱하고 곧으면 그 나무는 훌륭한 나무가 될 수 있다. 박정희에게 친일과 쿠테타를 가지라고 한다면, 국민을 가난에서 구하고 현대국가의 기틀을 완성한 업적은 줄기라고 할 수 있다. 누가 뭐라 해도 박정희는 애국적이었으며 한강의 기적을 이룬 위대한 지도자다. 박정희가 없었다면 과연 우리나라가 오늘날같이 경제부강국으로 될수 있었을까? 상상도 하기 싫지만 공산화가 돼서 자유를 잃은 삶을 살수도 있었을 것이다. 박정희가 없었다면 김대중 정권도 없었을 것이고, 문재인정권도 없다. 또 귀태(歸胎)를 말하던 민주당의 홍익표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박정희에게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현대사에서 정적(政敵)으로 지목하며 박정희를 들어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를 들어내려고 한다면 현대사 전체가 헝클어진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하 박대통령)이 이룩한 경제적 업적은 이제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조차 박대통령의 경제발전은 인정하지만…..이라는 전제를 깔고 그를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박정희 대통령은 집권 18년동안 연평균 9.2%의 고도성장을 이룩했다. 이에 따라 1962년 82달러이던 1인당 국민소득은 그가 세상을 떠나던 1979년에는 1747달러로 뛰어올랐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박대통령이 자신이 죽은 뒤에도 한 세대 이상 국민들이 먹고 살 거리를 만들어놓았다. 그 예로 전두환정권이 들어섰을 때 한국의 경제가 가장 좋았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대통령이 힘들여 정성껏 차려놓은 밥상위에 전두환은 숟가락만 올려놓고 자기가 상차림을 잘했다고 하는 격이다. 조선, 철강, 석유화학, 자동차, 전자산업, 건설업 등등이 그런 것이다. 사실적인 이야기로, 1980년대 중반까지도 박정희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박했다. 심지어는 독재자 박정희라는 불명예스러운 수식어까지 따라다녔다. 하지만 1980년대 중,후반 이후 3저 호황 등에 힘입어 한국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그 기반을 마련한 박대통령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997년 김영삼정부시절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사태 이후에는 경제를 살리는 강력한 리더십에 대한 갈망과 함께 박대통령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졌다. 최근 들어 다소 하락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역대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물을 때 마다 박대통령은 언제나 수위를 차지하곤 했다.

박정희대통령이 처음부터 경제전문가는 아니었다. 초기의 박대통령은 기성체제의 부조리에 분노하고, 농민들의 빈곤에 가슴 아파하며, 자립경제를 희구하는 제3세계형 민족주의 군인이었다. 5.16혁명이후 군사정권이 추진했던 부정축재자 구속, 농어촌 고리채 정리, 화페개혁, 등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런데 1963년부터 의도치 않게 섬유, 합판, 철강등 경공업 제품의 수출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962년 5480만달러였던 수출액이 1963년에는 8680만달러로 급증했다. 특히 공산품 수출이 계획치보다 4.4배나 많은 2810만달러를 기록했다. 일본 등의 선진국들의 산업구조가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변화하면서 한국에 기회의 문이 열린 것이다.

이는 이승만정권 시절에 이들 분야에 대한 투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박대통령은 기존의 경제정책이나 자신의 생각에 교조적으로 얽매이지 않았다. 변화의 흐름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박대통령은 경제정책의 중심을 수출 제1주의로 전환하고, 1965년의 수출목표를 1억달러로 제시했다. 기왕에 추진하던 한일국교 정상화를 서두른 것도 그러한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대한민국 제5~9대 대통령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 평가 36%보다 긍정적 평가 64%가 나타내듯이 국민들의 반응은 대체적으로 좋은 편이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최초로 국가유공자에 대한 보상을 실시했고, 일제 강점기시절 독립유공자들에 대한 복권과 훈장, 6.25전쟁 유공자에 대한 훈장수여 등 국가적인 포상을 처음 실시했다. 두번째로 무형 문화재 지정 등 문화재보호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황폐화했던 산림을 민-관-군을 총 동원해 벌거벗은 산들을 녹화사업으로 회복시킨 것도 큰 업적이었다. 아울러 도시에 편중된 사회 인프라를 전국적으로 확대했다. 주민등록번호의 도입으로 행정관리가 굉장히 간편해졌으며 1978년에는 대용량 자료를 처리하는 통계와 작업을 위해 컴퓨터를 도입했다.

세번째로 큰 업적은 국가경제의 대 동맥인 경부고속도로를 개통시켰다. 이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으로 한국의 경제는 보다 빠르게 발전되었고 이로 인해 한강의 기적의 상징물로 종종 꼽히게 되었다.

네번째로 복지법을 제정했다. 산재보험, 국민건강보험 등이 도입된 때도 제4공화국 박정희정권 시절이었다.

이외 국민복지연금법, 의료보호법, 아동 노인 장애우에 관한 여러 복지법도 제정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때 기틀이 생긴 덕분에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보험과 그로인한 낮은 비용덕분에 병원기피 현상은 낮아지고 가벼운 질병이라도 병원가서 치료받으면 그만 이라는 고정관념이 생긴 국가가 되었을 정도다.

다섯번째, 그린벨트를 지정하여 무분별한 산림녹지 개발을 막기 위해서 그린벨트 지정을 실시했다. 여섯번째, 국제관광지를 조성하여 외국인들의 국내여행을 장려했고, 경주나 제주, 기타 유명 명승지와 사찰 등을 관광종합개발지구로 지정해 지역의 경제를 살리고 일자리를 늘려주었다.

일곱번째, 공무원채용 학력제한을 철폐했다. 1973년 사법시험, 행정고시를 비롯한 모든 공무원 임용시험에 학력제한을 없엤다. 아울러 국영기업체에서도 학력차등제를 없애고 일반 사기업에도 학력철폐를 권장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 외에도 국방력을 강화시키고 무기를 국산화 하였다. 이것을 기반으로 현재 한국에서는 자체적으로 성능이 우수한 전투기를 생산해 내고 있으며 타국으로 수출까지 하고 있다. 외교적으로 국익을 지키기 위해 미국과의 동맹을 굳건하게 만들었으며 베트남에 국군을 파병하여 수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그것을 계기로 한국의 군수물자와 전쟁에 필요한 무기들을 한층 더 현대화 시켰다. 베트남전쟁 기간 동안 이루어진 미국의 지원을 ‘월남특수’ 라고 한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기간에 파병 국군장병이 해외근무수당으로 벌어들인 수입은 총 2억3556만달러로 이중 82.8%에 달하는 1억9511만달러가 국내로 송금되었고, 경부고속도로 등에 투입되었다.

전쟁에 조달할 군수물자 납품과 용역사업 투입으로 국내기업들은 호황을 누렸으며 파병 댓가로 들어온 미국 외화 송금에 힘입어 당시 내수산업과 수출이 성장하여 1970년대 한국경제는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전투병 파병직전인 1964년 한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는 103달러에서 한국군 철수가 끝난 1974년에는 5배가 넘는 541달러로 올라갔다. 이때까지 한국이 받은 원조액은 같은 시점까지 아프리카의 모든 국가가 받은 원조액보다도 훨씬 많았다. 다만 여기서 짚고 넘어갈 슬픈 이야기로는 월남파병 장병중에는 수많은 전사자(한국군 약 5천여명, 부상자 1만1천여명, 적 사살 약 4만1천여명)와 부상병이 있었다.

그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 한국이 이렇게 잘 사는 나라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으며 잊어서는 안된다. 전사자 모든 분들께 명복을 빈다.

이제 끝으로 경제적 평가는, 어느 누가 뭐라고 해도 세계 최대 빈국중의 하나였던 대한민국을 부강하고 잘 사는 나라(세계에서 12번째로 잘 사는나라)로 만든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겠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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