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조선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이야기

<김명열칼럼> 조선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이야기

시안견유시 (豕眼見惟豕) 불안견유불(佛眼見惟佛)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돼지 눈으로 보면 이세상의 모든 것은 오직 돼지로 보이고, 부처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오직 부처로만 보인다. 조선이 건국되고 나서 어느날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에게 “우리 서로 군신의 예를 떠나 터놓고 농을 하세”하고 태조는 대사에게 건넨 말씀이 “대사, 제 눈에는 대사의 얼굴상이 꼭 돼지로 보입니다 그려” 하니 무학대사는 성도 내지 아니하고 “전하 제눈에는 전하의 모습이 꼭 부처님으로 보입니다” 라고 응수했다. 태조는 “돼지라 욕을 했는데 성도 나지 않는가?” 했더니 대사의 말씀이 “돼지 눈에는 모든 것이 돼지로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모든 것이 부처로만 보인다”라고 하면서 뼈있는 농담을 두 사람이 주고 받았다고 한다.

기막힌 반전(反轉)이 일순간에 태조 이성계가 돼지가 되어버린 셈이다. 이상의 내용이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말이 나온 배경이다.

이 뼈 있는 농담 한마디에 이성계는 껄껄 웃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농담이 아니고 인간의 근본 진실을 보여주고 있는 진담중의 진담이다. 아무리 임금이 스승으로 모시는 무학(왕사)이라지만 소심한 왕이라면 무학이 왕을 능멸했다고 화를 냈을 것 이고 다혈질의 왕이라면 그 자리에서 무학을 참수 했을 것이다. 그런데 태조 이성계는 한바탕 웃고 말았다. 태조 이성계가 통이 큰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무학대사는 고승답게 이성계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교에서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 눈이 가린 중생은 진리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마음을 더럽히는 것이라 하여 삼독(三毒)이라 한다. 즉 탐욕(貪慾), 진에(瞋恚), 우치(愚癡)를 말하며 이것을 줄여서 탐.진.치, 라고도 한다. 중생이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 눈이 가려지면 번뇌, 교만, 미혹에 빠진다. 그 결과 욕심을 부리고 화를 잘 내고 마음이 어두워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특히 성냄은 수행을 하는데 가장 큰 허물이 되며 다스리기도 어렵다고 한다. 삼독은 중생을 생사(生死)의 윤회 속으로 빠뜨리는 근원이 되고, 중생의 고통을 만드는 원인으로 해석되고 있다. 삼독을 없애기 위한 수행으로는 바른 견해(正見), 바른 생각(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동(正業), 바른 생활(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인식(正念), 바른 정신(正定)의 팔정도(八正道=여덟가지의 올바른 수행법)와 계(戒), 정(定), 혜(慧)의 삼학(三學)을 들고 있다. 즉 계로써 탐욕을 다스리고 정으로써 진에를 다스리며 혜로써 어리석음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돼지 눈으로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이 돼지로 보이고, 부처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부처로 보인다는 이 속담은 편협한 사고와 옹졸한 고집에 사로잡힌 사람을 경계 하려는 선입견을 비판할 때 인용되기도 한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는 편견과 오만에 대한 경구(警句)이기도 하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서 논리적으로 생각한다면 무학대사가 말한 명제는 거짓(사실이 아님)이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일리가 없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일리도 없다. 그럼 거짓된 명제로 사람을 훈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무학대사가 말한 명제가 비논리적인 명제라 하더라도 여기에는 참으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따로 숨겨져 있다. 자신의 기준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선입관을 비판하려고 한 것이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이고 뭐 눈에는 뭐 뿐이 안 보인다. 바보 눈에는 바보만 보인다. 도둑놈들에겐 도둑놈들만 보인다. 착한 눈에는 착한사람만 보인다 등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기준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이 도둑이라면 세상사람 모두가 도둑으로 보이고, 심성이 착하면 세상사람 모두가 착한사람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무학대사는 이성계에게 이 점을 말한 것이다. 모든 것은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려는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아름다운 글이나 모습도 내마음에 아름다움이 자리 잡아야 보인다.

참고의 이야기로 다음은 옛날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서울(한양) 천도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다.

서울하면 유난히 무학대사의 이름이 얽힌 지명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의 터는 무학대사가 처음으로 잡았기 때문이다. 고려를 멸망시킨 이성계는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을 빨리 떠나고 싶었다. 왜냐면 개성은 자기 손에 피를 묻히며 멸망시킨 한 나라의 수도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고려왕가의 망령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새 세상을 열고, 흩어진 민심을 도모하는데 있어 새 도읍지가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성계는 새 도읍을 찾는 적합한 인물로 무학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미 자신이 왕이 될 것임을 예언을 한 당대의 고승이었고, 처음 치세를 여는 입장에서 그동안 정신적 지주로 군림해온 불교를 섣불리 배격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성계의 부름을 받은 무학대사는 새로운 도읍지를 찾아 먼저 충청도 공주에 있는 계룡산을 찾았다. 예부터 신령스러운 산으로 알려진 계룡산은 십승지의 하나로 명산중의 명산이었다. 산세와 지세를 자세히 살펴본 무학대사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북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분명 계룡산은 한 나라의 도읍 터며 명당이라고 풍수대가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었지만 무학대사의 눈에는 새 도읍지로서 적당치가 않았던 모양이었다. 잠실 봉은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아침 배를 타고 뚝섬나루에 도착한 무학대사는 눈앞에 펼쳐진 넓은 들판에 서서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강을 끼고 웅자하게 펼쳐진 들판은 새 왕조가 들어서 치세를 하기에는 아주 적합한 터였다. 무학대사가 흐뭇한 마음으로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이 놈의 소는 미련하기가 꼭 무학같구나. 왜 바른 길로 가지 않고 굳이 굽은 길로 들어서느냐” 그 소리에 귀가 번쩍 뜨인 무학대사가 고개를 들고 돌아보니 길 저쪽으로 소를 몰고 가는 한 노인이 채찍으로 소를 때리며 꾸짖고 있었다. 무학대사는 얼른 노인 앞으로 달려가며 물었다. “노인장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미련하기가 꼭 무학 같다고 했소” “그건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까?” “아마 요즘 무학이가 새 도읍터를 찾아다니는 모양인데 좋은 곳은 다 놔두고 엉뚱한 곳만 찾아다니니 어찌 미련하고 한심한 일이 아니겠소” 범상한 노인이 아니라고 생각한 무학대사는 공손히 합장배례 하며 물었다. “소승이 바로 그 미련한 무학입니다. 소승의 소견으로는 이곳이 좋은 도읍지라고 보았는데 노인장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이 나라 천년 사직을 위하여 더 좋은 도읍지가 있으면 가르쳐주십시요” “여기서부터 십리를 더 들어가 주변 지형을 잘 살펴보도록 하시오” 노인은 채찍을 들어 서북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무학대사가 고맙다며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는 순간 노인과 소는 온데 간데없이 사라졌다. 무학대사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노인이 가리켜준대로 서북쪽을 향해 십리쯤 걸었다. 지금의 경복궁 근처였다. 삼각산, 인왕산, 남산 등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터를 보는 순간 무학대사는 감탄을 토해냈다. “과연 명당중의 명당이구나!” 만면에 기쁜 웃음을 머금은 무학대사는 그 길로 이성계를 만났다. 무학대사의 설명을 들은 이성계는 한양을 새 도읍지로 정하고 궁궐을 짓기로 하였다. 마음이 급한 이성계는 빨리 궁궐을 옮기고 싶었다. “스님 도성 성곽은 어디쯤 경계로 하면 좋겠습니까?” “북쪽으로는 삼각산 중바위(인수봉) 밖으로 성곽을 쌓으십시요. 삼각산 중바위는 노승이 오백나한에게 예배하는 형국임으로 성을 중바위 밖으로 쌓으면 나라가 평안하고 흥성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무학이 찾아낸 한양으로 천도를 결정하였으나, 도성을 쌓는데 태조의 왕사인 무학대사는 인왕, 무악, 남산을 연결시키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도전은 인왕에서 남산으로 바로 이어져야 한다고 뻣뻣이 맞선다. 그뿐만 아니라 궁궐을 어떻게 배치 할 것인가를 두고 무학과 정도전이 충돌하게 되었다.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진산(鎭山)으로 하고 북한산과 남산을 좌청룡 우백호로 삼아 정동향(正東向)인 유좌묘향(酉座卯向)을 주장했다. 그런데 정도전은 무학의 주장에 대해 “고래(古來)로 군주는 모두가 남쪽을 바라보며 정사를 보았고 동쪽을 바라본 예는 아직까지 없다” 면서 불가 하다고 했다. 이리하여 정도전의 건의에 따라 자리 잡은 터가 북악산 밑 경복궁 자리였다. 본래 무학이 잡은 자리는 종로의 필운동 근처였다.

이성계는 입장이 난처했다.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줄 처지가 아니었다. 생각해낸 것이 하늘에 제를 올려 결정하기로 했다. 날을 잡아 천제를 지낸 그 이튿날이었다. 밤새 내린 눈이 봄볕에 다 녹아내리는데 축성의 시비가 일고 있는 인수봉 인근에는 마치 선을 그어 놓은 듯이 눈이 녹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정도전 등 대신들은 이 사실을 즉시 이성계에게 고하고, 이는 하늘의 뜻이므로 도성을 인수봉 안으로 쌓아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이성계는 하는 수없이 그들의 주장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억불의 기운이 감도니 이제 불교도 그 기운이 다해가는구나” 이 소식을 들은 무학대사는 홀로 탄식했다. 성이 완성되자 눈이 울타리를 만들었다하여 설(雪)자와 빙 둘러 싼다는 울타리의 울(컴퓨터엔 울타리 울 한자가 없음)자를 써서 설울이란 말이 생겼고 이후 점차 발음이 변하여 오늘날의 ‘서울’로 불려 졌다는 설이 있다.

참고로 모든 말과 행위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업보(業報)가 그렇다. 업(業)은 사람이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이다. 보(報)는 이러한 행위에 따른 고락(苦樂)과 인과(因果)다. 선업(善業)에는 즐거운 보(報)가 따르고 악업(惡業)에는 괴로운 보(報)가 따르는 것이다. 사람이 짓는 행위에 따라 그 갚음을 받는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는 여기서 비롯됐다. 뿌린대로 거둔다거나 사필귀정(事必歸正), 죄와 벌 등도 같은 범주에 속 할 것이다. 인과응보는 불교 교리의 기본이 되는 사상이지만 세상 이치에서도 큰 가르침이 되고 있다.

이제 끝으로 우리 모두에게 교훈이 되는 말 한마디를 하겠다.

바깥 세상을 보려면 창문이 필요하고, 자신을 보려면 거울이 필요하다. 누구나 창문을 통해야만 세상의 밝음을 알 수 있고, 거울을 통해야만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창문이나 거울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각자의 마음의 눈이다. 마음의 눈이 밝으면 온 세상을 곧게 비출수 있고, 자신의 모습도 올바르게 비출수 있기 때문이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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