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

<김명열칼럼>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

나 자신의 행복 수준을 측정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하지만 인간관계와 관련해서 지금 내가 행복한가를 판단하는 데에는 굳이 복잡한 척도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지금 현재 나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샤텐프로이트(Schadenfreude)인가의 여부만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샤텐프로이트란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느끼는 행복감을 말한다. 불행까지는 아니더라도 남이 고통 받거나 골탕을 먹는 모습을 보고 은밀하게 즐거워하는 것 역시 샤텐프로이트이다.

샤텐프로이트란 말은 원래는 독일어이지만 영어에서도 자주 쓰이는 말이다. 영어의 입장에서 본다면 일종의 외래어인 셈이다. 사실 우리의 심성 가운데 샤텐프로이트만큼 고약한 것도 없다. 남의 불행을 보면 함께 슬퍼해주는것이 사람의 도리인데, 오히려 행복감을 느낀다니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좋지 않은 심리는 누구에게나 다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하긴 사이가 좋지 않은 누군가가 곤란해 하는 것을 보고 고소하게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할지도 모르겠다. 평소 유감이 많았던 직장의 동료가 직장의 상사에게 깨지는 모습을 보고 속으로 깨소금의 웃음을 짓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이 고통을 받는 모습을 보고 은밀히 웃음 짓는 것이 바로 샤텐프로이트이다. 쇼펜하우어는 샤텐프로이트를 느끼는 것 자체가 명백한 악의 징조라고 보았다. 여간 못된 사람이 아니고서는 샤텐프로이트를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샤텐프로이트를 심성이 고약한 사람의 전유물로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 샤텐프로이트는 안타깝게도 악한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느낄 수 있는 보편적인 정서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누구에게나 이러한 심리가 있다는 이야기다.

별도의 얘기로는 몇년전 한국과 일본의 아시안 올림픽 출전 축구경기가 있었을 때의 이야기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국제전 스포츠가 열릴 때 보면, 그 게임이 다른 나라에 지면 그러려니 하고 덤덤하게 그 승패를 겸허히 받아들이는데, 오직 숙적으로 여기는 일본과의 경기만은 반드시 이겨야 하고 만약에 지게 되면 이를 갈며 통분해 한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 한국팀이 이기고 승리를 거두어 그라운드에서 펄쩍펄쩍 뛰며 관객들과 환호에 젖어 춤을 출 때, 한편 경기에 진 일본 선수들은 그라운드에 주저앉아 닭똥 같은 눈물을 쏟아내고 있다. 우리나라 선수와 관객들은 괴성을 지르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으며 길길이 뛰어오르고, 태극기와 독도는 우리 땅이란 깃발을 높이 쳐들고 운동장의 잔디밭 위로 내 달린다. 우리는 패배한 일본의 아픔과 불행을 딛고 희열감과 행복감을 만끽한다. 일본선수와 관객들이 풀이 죽어서 벌레 씹은 얼굴로 땅만 바라보며 퇴장하는 모습이 왜 그렇게도 기쁘고 즐거운지………… 묵은 체증이 뚫리듯이 시원하고 통쾌하기만 하다. 이렇게 일본과의 모든 스포츠경기는 일본이 지고 불행해야 만이 한국인들이 즐거워지고 행복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즉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인 것이다.

‘인류의 마지막 문명의 질서’라고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내가 살려면 남을 희생해야 한다는 명제가 극대화하고 있고, 이러한 사회구조가 합리적이고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사회는 이처럼 경쟁속에 남을 뜯어먹고 먹히는 사회구조이다. 지금 존재하는 세상의 모든 직업에는 자기가 먹고살기 위해서 타인의 불행이 전제되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것이 알고보면 내가 가진 능력으로 남의돈을 내 통장으로 옮기도록 하는 합법 내지는 불법적인 상행위가 이루어지는 제도이다.

그러한 상행위 중에 가의가 남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만드는 것을 전제로 하고있다. 그래서 나의 행복을 보장받고 있는 것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남의 불행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나의 행복을 확인할 때가 있다. 가난한 나라의 기아와 헐벗음을 보면서 전쟁과 테러로 인해 인명이 살상되고 건물이 부숴지고 홍수로 집이 떠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그래도 나는 저러한 상황은 아니다.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고 있으니 나는 저사람들보다는 행복하지 않은가 하는 위안이 들때가 많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찬찬히 그것을 생각해본다면 그것이 얼마나 섬찟하고 못된 발상임을 알수가 있다. 즉 그 발상의 틀이 타인들이 불행할수록 내가 행복해진다는,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보면 심뽀가 나쁜 사람은 남이 못되고 안되고 불행해지는 것을 즐기고, 노골적으로 타인의 불행을 통해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도 많다. 남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아파 골치를 앓는 전형적인 놀부 스타일의 마음을 가진 못돼먹은 사람들이 세상에는 참으로 많이 있다.

우리나라 말에 놀부 심뽀라는 말이 있다. 남이 잘되는 것을 절대로 그대로 볼 수 없는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서 이런 식으로 빗대어 표현을 하곤 한다. 단지 놀부와 흥부의 흑백논리가 아닌 내가 아니면 너도 안돼, 라는 식의 놀부 심뽀는 여러 사람들에게 많은 억압과 조건, 그리고 규제를 자연스레 지정을 한다. 대체적으로 놀부 심뽀를 가진 사람들은 상대방과 공감적 사실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많은 어려움을 담고 있다. 이는 타인과 공감하기 어려운 싸이코패스 와도 일맥상통하며 타인의 슬픔에 대해 절대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들이 보이며, 다양한 방식의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한 일종의 정신질환(?)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놀부심뽀’, 부린 만큼 똑같이 거두게 된다. 여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거나 심뽀를 부린 만큼 나에게 돌아오기 때문에 항상 모든 행동이나 말에 대해서 조심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남과 비교하기를 좋아한다. 비교란 행복해지기 가장 쉬운 방법이면서도 행복의 가장 큰 적이다. 이제부터는 남의 불행에 기대지 말고 그냥 순수한 나의 행복을 만들어가는 것은 어떨까?. 예를 들어 남들보다 더 가진 내모습보다, 어제보다 더 나은 성장한 나의모습에 행복을 느끼는 거다. 어제는 이만큼 일을 완성했는데 오늘은 이것을 추가로 다 마치었네. 어제는 미용실에 가서 머리의 모양을 바꿨더니 아주 마음에 드네. 그래서 자신감이 생겨나네 등등 모든 것을 긍정과 자신감으로 추진하고 만족감을 갖는다면 남을 의식할 필요도 없고 비교 평가할 것도 아니다. 내 자신에 집중하고 자신감을 가지고 나를 사랑하는 연습을 하면 굳이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가 없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 다른 사람과 비교할 까닭이 없다. 혹시 당신은 아직도 누군가와 비교하며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가?. 그럴 때는 어제의 내 모습과 오늘의 내 모습을 비교하면서 점점 나아지는 나를 찾아보자. 자신이 없고 불행한 나는 사라지고 자신감과 행복으로 가득 찬 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남들의 행복은 나에게도 행복이고, 남의 불행은 나에게도 불행이 되는 마음을 가져보자.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236>

<지난 10년 동안 본보에 ‘김명열칼럼’을 기고해 많은 동포들의 사랑을 받아온 김명열 칼럼니스트께서 몸이 불편하여 잠시 칼럼을 쓸 수 없다는 이메일을 보내 왔다.

편지 내용은 “그동안 많은 찬사와 함께 격려와 축복을 빌어 준 동포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두통과 어지럼증으로 치료를 받고 있으며, 다시 몸의 건강상태가 좋아지고 컨디션이 개선되면 다시 펜을 들어 독자들과 함께 하겠습니다. 또 마지막으로 모든 동포들이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보내왔다.>

김명열 칼럼니스트의 건강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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