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 문필가의 행복론(幸福 論) <3>

김명열 문필가의 행복론(幸福 論) <3>

 돈과 종교의 이야기

돈은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겨 돈이면 무엇이든 할수 있다는 생각을 배금주의(拜金主義) 라고 하며, 또한 물질만능주의 라고도 한다. 왜냐하면 돈은 개개인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힘이자 살면서 접하는 거의 모든 것을 단번에 해결할수 있는 만병통치 약으로 통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먹고 자고 놀고 즐기고 매수하는 것도 돈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돈에 관한 이야기다. 이 세상에 돈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돈이 있어야 모든 삶을 유지할 수 있고, 생계수단을 위하여 오늘도 모두가 열심히 돈을 버느라고 노력하면서 부지런히 일터에서 일을 하고 있다. 돈이 이렇게 필요하다보니 어느 사람은 이 돈이 있으면 만사형통이고 안 되는 것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금전만능주의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몇년전의 이야기다. 그 당시 나는 모 한인사회 단체의 회장을 맡고 있었다. 내가 맡고 있는 단체에 소속된 어느 회원 한분이 식사자리에서 우연히 들려주었던 이야기다. 그 회원이 하는 말, “나는 매주 복권(로또)를 사는데 복권을 사면서 꼭 기도를 드리고 복권을 산다”고 했다. 그러면서 복권을 사서 만약에 1등에 당첨되면 그 상금의 10분의 1을 떼어서 십일조로 헌금을 드리고, 그리고 그 나머지 절반을 감사헌금이나 불우이웃들에게 자선금으로 기부하겠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진지하게 말을 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가 열심히 교회도 나가고 기도도 열심히 하는데 왜? 나의 기도는 안 들어 주시는지 모르겠다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곁에서 함께 식사를 하며 이 소리를 들은 좌중들은 한바탕 웃음바다를 이루었다. 복권에 당첨되어 부를 누리고 돈을 풍족하게 쓰기 위해 교회에 나간다?………. 이 사람의 종교관은 결국은 돈을 목적으로, 그것을 얻기 위해 종교를, 돈을 취할 수 있는 수단과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머릿속에서 우러나오는 쓰디쓴 웃음을 지을 수가 없었다. 신성한 종교에 돈이 개입되고 수단이 되며 일종의 거래 관계가 생성되는 것 같아서 씁쓸해 질수 밖에 없었다.

별도의 이야기는 과거 한국사회의 교회 성장의 배경 이야기다.

한국교회는 복과 사랑을 외치면서 성장했으나, 죄와 정의는 외면했기에 잠간동안 성장 후, 쇠퇴하는 국면에 접어들었다.

아직도 부, 건강, 복, 사랑의 번영 신학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한국 교회에 던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질문이 무엇일까?. 근본적 욕망인 돈에 대한 질문이다. 곧 예수님을 믿으면 복받고 건강하고 부자가 되는가?……..

한국 개신교가 한국 사회를 향해 설교한 주된 메시지는, 1950년대 까지는 ‘예수 천당’이었다. 그 시대는 정말로 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가 성장하면서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로 바뀌었다. 영적구원, 육체건강, 물질적 부라는 3박자 구원론이 유행했다. 살만 하게 된 1990년대부터는 부담스러운 예수님은 사라지고 부성의 하나님이 등장하기 시작 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구호가 압축 성장 때 불법을 저지른 중산층 교인들을 위로하자 대형교회가 등장하며 교세는 크게 확장되었다. 지난 두 세대 동안 한국교회는 복과 사랑을 외치면서 성장했으나, 죄와 정의는 외면했기에 잠깐 성장 후 쇠퇴하는 국면에 접어들었다. 아직도 부(富), 건강, 복(福), 사랑의 번영 신학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한국교회에 기본적으로 던질 질문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망인 돈에 대한 질문이다. 곧 예수 믿으면 복 받고 건강하고 부자가 되는가?. 그에 대한 답은 “아니다” 다.

종교가 인간들에게 주는 위안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도 넓다. 무신론자로 있다가 종교에 귀의하는 경우는 대개 두가지 타입이다. 첫째는 자기의 힘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사건이나 시련에 휘말렸을 때다. 자기 자신, 또는 가까운 사람이 불치의 병에 걸렸거나 사고를 당했을때 신을 찾는 경우다.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축복, 그리고 은혜라고 한다.

둘째로 스스로 자기 고민을 해결하기 어렵다고 자각하고, 절대자에게 의존을 선택한 경우다. 자기 삶에 대한 본질적 질문이나 존재론적 자각의 해답을 신에게 구하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교만을 포기하고 겸손을 선택한 것이다. 평생을 작가와 평론가 교수로 활동해온 무신론자였던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이 몇 년전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돼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가 기독교인이 된 계기는 위의 두가지 경우를 다 포함하고 있다. 사랑하는 딸의 지병과, 20대 때부터 느낀 근원적 고독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저서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통해 자신이 무신론자에서 기독교신자로 변화된 과정을 그렇게 밝혔다. 세상을 살아가며 인생의 후반기에 접어들수록 종교는 유의미 하게 다가온다. 생(生)과 사(死), 살아온 인생의 의미, 사후 세계, 절대자등 생의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인생의 중압감 내지 지나온 삶에 대한 회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할 때 우리는 종교를 생각하게 된다. 이를 통해 절대자와 대화를 나누고 깨달음을 얻어 마음의 평화와 구원 및 행복을 갈망한다.

종교가 인간의 삶, 특히 노년층의 삶의 질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국내외적으로 많은 연구가 이뤄졌다. 대부분의 연구결과가 종교를 갖고 있는 노인이 그렇지 않은 노인에 비해 총체적 삶의 질의 수준, 삶의 만족도, 행복 도가 모두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내세를 강조하는 종교적 가치관을 통해서 죽음을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노년기 인간관계 망을 형성하는 등 노후 생활을 잘 하고 있으며 사망률, 유병률, 소외감 측면에서도 무신론자보다 훨씬 나은 것으로 파악됐다. 노인의 삶의 질에 미치는 영향연구 결과에 따르면 종교는 대개 건강,소속감,사고방식,위기극복,긍정적인 삶의 유지, 행복감 등등의 측면에서 아주 좋게 작용 한다고 했다.

종교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죽음 앞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호스피스 자원봉사자들에 의하면 믿음이 깊은 신자들은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반면, 무신론자 중에는 죽는 순간이 불행한 이들이 너무나 많았다. 어느 불치병 환자가 죽음을 몇 시간 앞둔 시점에, 그것을 안타까이 여긴 의사 선생님과 간호원, 호스피스 자원 봉사자들이 그 환자를 위로하며 눈물을 보이자 오히려 그 말기 암 환자는 의료진과 자원봉사자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나는 이제 영원한 안식처, 하나님을 만나러 조금 후에 이 세상을 떠난다. 나의 죽음이 오히려 영생을 얻고 고통과 괴로움이 없는 하늘나라로 가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쁘다”며 입속으로 찬송가를 부르며, 편안하고 환한 미소 속에 작별인사를 고하고, 가벼운 여행을 떠나듯 스르르 눈을 감았다.(이 이야기는 몇년전 삼성 서울병원에서 실제적으로 있었던 어느 교회의 여자 권사님의 실화다).

무신론자였던 프랑스의 사상가 볼테르나 영국의 시인 바이런,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도 임종과 말년을 비참하게 맞은 것으로 유명하다. ‘신은 죽었다’의 니체는 생의 마지막 10여년간 정신병원에 들어가 끊임없는 우울증, 죄책감, 발작, 기괴한 행동 등을 보이며 고통을 받다가 세상을 하직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철저한 신앙생활을 했던 그가 반(反) 종교, 반 도덕의 선봉에 서게 된 이유는 기존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당시 전통적인 도덕규범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혁신에서 나왔다. 하지만 그를 평생 지배해온 죄책감과 말년의 정신착란증은 그의 불신앙과 관련이 없을 수 없다.

니체와 반대의 삶을 산 사람이 세계적인 대 문호 빅토르 위고다. 그는 초년시절 화려한 문학계 명성과 함께 주색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의 나이 41세때 딸 레오폴딘이 아버지의 타락을 통렬히 비판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적힌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자, 완전히 사람이 바뀌었다. “나의 타락한 삶이 내 사랑하는 딸을 죽였다. 이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이제 하나님의 품에 거하리라”. 그 이후 위고는 헌신적인 사람으로 바뀌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으며 말년에는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됐다. 독실한 신앙생활속에 그의 문학도 깊어가 ‘레미제라불’ 같은 대작을 잇달아 탄생시켰다. 1885년 그가 죽자 국민적인 대 시인으로 추앙되어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장구한 것이 바로 종교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에게 종교는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닌다. 인간의 이성을 대표하는 근대성과 현대과학의 빛나는 발전속에서도, 종교는 아직까지 다양한 기능을 맡아오고 있다. 하지만 시대와 과학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종교의 비 과학적인 특성은 점점 더 종교의 필요성에 의해 많은 사람들의 의구심을 불러오고 있다. 인간의 이성은 문명과 사회를 이룩했고, 이러한 가치를 통해서 인간은 더욱 진보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운명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보이지않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은 여전히 인간에게 종교를 희구하게 한다.

과학문명이 끝없이 발전하는 현대사회에서 과연 인간에게 종교는 꼭 필요한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과 답변은 다음 주에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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