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성인(聖人)과 군자(君子), 그리고 중용(中庸)의 이야기.

<김명열칼럼> 성인(聖人)과 군자(君子), 그리고 중용(中庸)의 이야기.

 

우리나라 말에 성인군자라는 말이 있다. 聖人과 君子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사람이다. 많은 종교와 철학은 성인과 군자를 목표로 정진한다. 그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동양의 문화에서는 성인이 되는것은 군자가 되는것보다는 훨씬 힘든 일로 생각했다.

공자도 말하기를 “성인은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군자를 만나기만 해도 좋다”라는 말을 했다.

이는 성인을 더 높은 가치로 생각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자신이 손해를 입어도 너그러이 용서하고, 기회를 놓쳐도 그냥 그저 그러려니 하고 대범하게 넘어가며 사는 사람을 옛날에는 성인군자라고 했다. 오늘날에 보면 성인은 비록 되지 못했어도 성인의 경지(聖人의 境地)에 이른 사람은 많이 있다.

성인의 경지라 함은 왕이 되는 것 보다 더 높은 성공의 경지에 올랐다는 뜻으로 쓰는 한자, 성(聖)자 이다. 음악에서 최고의 성인을 악성(樂聖), 최고의 바둑 성공인을 기성(棋聖), 시(詩)의 최고 성공인은 시성(詩聖), 인간 최고의 성공 경지에 오른 성인(聖人)등, 이렇게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성공경지 핵심에 있는 성(聖)자는 귀 이(耳)자와 입 구(口), 그리고 임금 왕(王)자, 이 세글자의 뜻을 함축한 글자이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올랐을때만 붙여주는 聖자를 쓰는 순서는 耳자를 먼저 쓰고 다음에 口자를 쓰며 마지막으로 王자를 쓴다.

귀 이(耳)자를 맨 먼저 쓰는 이유는 남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듣는 것이 최우선이기 때문이고, 귀로 다 듣고 난 후에 입을 열어야 상대가 만족하기 때문에 입 구(口)자를 나중에 쓰게 만든 것이고, 마지막에 왕 (王)자를 넣은 것은, 먼저 듣고 나중에 말한다는 것은 왕이 되는 것 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공자는 60세가 되어서야 이순(耳順)의 소리, 그리고 세상의 소리를 모두 다 조용히 경청하고 난 후에 입을 열어 말을 했다. 그런데 열심히 듣는다고 해서 다 들리는 것이 아니다. 들을 수 있는 귀를 갖추었을 때 비로써 들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순 이란 타인의 말이 귀에 거슬리지를 않는 경지이며, 어떤 말을 들어도 이해를 하는 경지요, 너그러운 마음으로 모든 걸 관용하는 경지다. 말을 배우는 것은 2년이면 족하나 경청을 배우는 것은 60년이 걸리는 어려운 일이지만….

마음을 얻기 위해, 진리를 깨닫기 위해, 지혜를 터득하기 위해, 나의 귀를 열어야 하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자기중심적인 아집과 독선이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자신이 살아온 세월만큼, 특히 성공을 한 사람들은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 너무 확고하다보니 거의 강압적으로 일처리를 하려고 들 때가 많이 있다. 성공했다는 자신감, 그리고 행복, 그렇지만 성공했다고, 지나온 힘들었던 시간을 잘 이겨냈다고, 모두 자신처럼 그렇게 해야 된다는 아집과 독선으로 끝까지 일을 처리하려고 한다면 힘든 시간동안 끊임없는 노력으로 성공을 거둔 사람이라도 결코 그 사람의 성공이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을 것 같다. 옛 부터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처럼 잘되고 성공해서 큰 위치에 있을수록 자기 중심적인 아집과 독선을 앞세워 강요하기 보다는 성공했어도 죽을 때까지 배울 것이 많은 인생이니 겸손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진정 잘되고 성공을 했다면 그다음 인생에 풀어야할 숙제는 아집과 독선으로 자신의 성공을 강요하기보다는 자신보다 못한 아랫사람 의견이라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겸손을 배워간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모든 이들에게 존경받고 사랑받을 수 있는 성인군자이며 아름다운 사람이 될 거라고 믿는다.

유학 사상가들이 도덕과 지식의 측면에서 최고의 이상적 인간형으로 설정한 성인(聖人)은 선천적으로 신비한 능력을 타고나는 것인가?. 아니면 후천적으로 노력을 통해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논리적 정합성을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맹자 이후 유학자들의 주요 이슈였으며, 많은 사상가들은 이 문제에 대해 다양한 답변을 시도해왔다. 일반적으로 성인은 선천적으로 타고난다는 입장과 배움(學)과 지식(知)을 통해서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입장의 두가지 학설이 존재한다. 유학은 어떤 학문체계보다 인간의 배움과 지식을 중요시 한다. 사실 논어의 주요 내용에서 우리는 윤리, 도덕적 가치의 집합인 인(仁)에 관한 대화 보다 공자가 꾸준히 강조하고 제자들을 칭찬하는 용어인 배움(學)에 대한 표현이 더 많이 등장하고 있음을 확인하기도 한다. 유학 사상적인 측면에서 볼 때 배움과 지식을 통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견해는 공자 이후 맹자와 순자에 이르기까지 절대적 지지를 받는 학설로 여겨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국 한나라, 당나라 시대에 이르러 인간의 내면에 대한 세분화된 견해를 정립하는 것을 시도하게 되는데, 한우와 왕충 등의 사상가들은 성인(聖人)은 이미 선천적으로 결정된 것이지, 인간의 노력으로 도달할 수 없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리고 다시 송나라 시대 성리학 시기 정이천은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있는 논의를 제시하고, 치밀하고 자세한 설명구조를 확립하는데 즉 선진시대 사상가들의 견해를 계승하여 “배움과 지식을 통해 그리고 인간의 노력으로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사유를 제시한다. 성인에 대한 이런 이해방식은 송대 성리학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으며, 주자 이후 유학사상의 핵심 이론으로 자리매김 하게 된다.

옛날의 성인들(예수님, 석가모니, 공자 등)은 하나같이 겸손하였으며 인(仁=사랑)을 베풀고 덕을 쌓았다. 사람은 나이들 수록 더욱 현숙(賢熟)해야 하고 그 나이에 걸맞게 나이 값을 해야 한다.공자는 일찍이 논어의 위정(爲政)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살에 섰으며 마흔살에 미혹되지 않았고 쉰살에 천명을 알았으며 예순살에 귀가 순했고 일흔살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랐지만 법도에 넘지 않았다”. 이 글은 공자가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고 학문의 심화된 과정을 술회한 것이다. 공자의 이 말로부터, 15세를 지학(志學), 30세를 이립(而立), 40세를 불혹(不惑), 50세를 지천명(知天命), 60세를 이순(耳順), 70세를 종심(從心)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적어도 공자가 살던 시대에 있어 나이 마흔은 미혹됨이 없이 부동(不動)의 위상을 지키고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흔히 20세를 약관(弱冠), 60세를 환갑, 70세를 고희(古稀), 77세를 희수(希壽), 88세를 미수(未壽)라고 한다.

여기에 곁들여 여자나이 16세가 되면 과년(瓜年=혼기에 이른 여자의 나이), 20세를 방년(芳年=꽃다운 나이, 꽃이 아름답게 피었으니 꺾어가도 좋을 나이, 즉 결혼을 할 수 있는 적령기)을 뜻한다.

나이에 대한 뜻풀이를 해본다면, 30세 이립은 모든 기초를 세우는 나이로서 서른살을 이르는 말이다. 혼자 자립하여 살수 있다는 나이. 40세는 불혹이라 하며, 이 나이 때는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을 나이를 말한다. 50세는 지명 이라 한다. 이때는 천명(하늘의 뜻)을 아는 나이로서 지천명 이라고도 한다. 하늘이 무서운 줄 알고 하늘의 명에 거슬리는 나쁜 악행은 하지 않는다는, 즉 인생의 완전한 성숙함과 철이 들었다는 나이이다 .60세는 이순이라 하여 인생에 경륜이 쌓이고 사려와 판단이 성숙하여 남의 말을 경청하고 받아들이는 나이다. 70세는 종심이다. 이 나이가되면 매사를 자기의 뜻대로 행하여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나이이다. 논어의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에서 나온 말이다.

얼마전에 어느 독자께서 보내온 글의 내용이다. “저는 나이가 50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1년만 있으면 오십이 되는데, 50세의 나이를 지천명(知天命)이라고 들었습니다. 30세때는 사물의 이치를 알게 되고, 주변의 소음에 쉽게 동요하지 않을 40세를 불혹, 그리고 하늘의 명을 아는 나이인 50세는, 이리도 치우치지 말고 저리로 기울지 말라는 중용을 강조 하는데, 그렇다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 방법일까요? 선생님”하고 질문을 해왔다. 그러면서 이어서 하는 말 “극단의 세계, 모 아니면 도라는 식의 이 세상에서 저는 어느 지점에 위치해야 하는걸까요?. 중용이란 것이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중간’이라고만 봐야 할까요?. 그럼 항상 중간만 유지하고 있으면 된다는 얘기일까요?”. 이에 대한 답변, 그렇다!. 무엇이든 하나의 위치에 있겠다는 생각은 문제가 있다고본다. 물도 고이면 썪는 것처럼 세상만물 어떤 것이든 그 자리에 고정되어버리면 물리적, 정신적 부분에서 변하려고 하지 않는 타성에 젖게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이가 50인 사람만이 중용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이 세상에서 여전히 유난히 흔들리며 살아가게 되는 50대를 위한 마음의 중심잡기에 대해서 ‘중용’이 특히 필요한 부분일수도 있으나, 중용이란 모든 나이에 구애됨이 없이 때와 장소, 시간 및 분위기에 따라 필요 되는 인생살이의 조미료 같은 요소이다. 즉 그것은 행(行)을 근본에 두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중용의 덕목이라 고 볼수 있기 때문이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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