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무더운 여름을 잊게 해주는 재미나는 ‘황진이 이야기’

<김명열칼럼> 무더운 여름을 잊게 해주는 재미나는 ‘황진이 이야기’

 

요즘 매일 매일 90여도가 넘는 찜통 더위가 이어지고 있다. 체감온도는 100도를 넘어서 불쾌지수를 더욱 높여주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행동마져 자유롭지 못 하다보니 더욱 힘이들고 마음은 우울하다. 이런때 기분을 전환시켜주고 침체된 마음을 올려주기 위해 재미난 이야기 한편을 들려 드리도록 하겠다.

조선 성종시대에 개성에 가무와 절색이 빼어난 기생이 살았다. 예전에 기생이 명기(名妓)가 되려면 미색뿐 아니라 글과 가무(歌舞)에 아주 능해야 했는데 이 기생이 그러했다. 이 기생의 소문은 어느듯 온 나라 조선팔도에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팔도의 수많은 한량들이 이 기생을 보려고 찾아왔다. 그때마다 이 기생은 한량의 청을 들어주는 대신 문제를 내고 그 문제를 푸는 조건을 내세웠다. 그러나 희대의 문장가라는 사람도 기생이 낸 글을 풀이하지 못하고 허탈하게 돌아갔다.

기생은 자신을 사모하는 한량이나 선비를 모두 이렇게 거절하고 언젠가 자신의 글을 풀고 사랑을 나눌 님을 기다리며 평생 가무와 글을 익혔다. 대개들 생각하기를 한량이라 하면 시중의 건달 잡배쯤으로 알기 쉽지만 예전엔 한량이라면 사서삼경은 기본이고 글체가 좋고 속심(마음)이 넓으며 기백이 뛰어나고 인물 또한 출중하고 무엇보다 풍류를 알아야 했다.

하지만 내노라하는 한량들 어느 누구도 기생의 앞에서 문장과 지혜를 능가할 기량을 가진 한량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남루한 차림의 중년 선비가 기생집에 들었다. 기생집 하인들은 남루한 그를 쫓아내려고 했다. 이 소란을 목격한 기생은 선비가 비록 행색은 초라했지만 범상치 않은 기품이란 것을 알고 대청으로 모시고 큰 주안상을 봐 올린 후, 그 선비에게 집필묵을 갈아 이렇게 써 보였다. 點一二口 牛頭不出, 선비는 기생의 글귀를 보고 빙긋이 웃었다. 명주 속치마를 펼치게 한 후 단필로 이렇게 썼다. 許, 순간 기생은 그 선비에게 일어나 큰 절을 삼배 올렸다. 절 삼배는 산자에겐 한번, 죽은자에게는 두번, 세번은 첫 정절을 바치는 남자에게 하는 여인의 법도이자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하례다.

그날밤, 선비와 기생은 만리장성을 쌓았다. 그리고 보름이 지난 후 선비는 기생에게 문창호지에 시 한수를 적어놓고 홀연히 떠나 버렸다. ‘물은 고이면 강이 되지못하고, 바람이 불지 않으면 꽃은 피지 아니한다. 내가 아는 곳이 집이요, 하늘은 이불이며, 목마르면 이슬 마시고 배 고프면 초근목피가 있는데 이보다 더 좋은 세상이 어디 있느냐’. 이후 기생은 그를 잊지 못하고 뼈에 사무치도록 그리워하며 비단 가죽신발을 만들며 세월을 보냈다. 풍운아인 선비의 발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은 애틋한 사랑에 손마디가 부르트도록 가죽신발을 손수 다 지은 기생은 마침내 가산을 정리하고 그 선비를 찾아 팔도를 헤매 다녔다. 정처 없이 팔도를 떠돌며 선비의 행방을 물색하던 중 어느날 선비가 절에 머물고 있다는 풍문을 듣고 찾아가 극적으로 재회 했다. 기생은 선비와 꿈같은 재회의 하룻밤을 지내고 다시는 선비를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꿈같은 재회의 첫밤을 보낸 다음날 해가 중천에 올라도 움직일 기색이 없는 선비에게 기생이 물었다. “낭군님 해가 중천인데 기침하지 않으시온지요?”. 그러자 선비는 두눈을 감은채 “이 절간에 인심이 야박한 중놈들만 살아 오장이 뒤틀려 그런다” 고 했다. 기생은 선비의 말을 즉시 알아들었다. 급히 마을로 단 걸음에 내려가 거나한 술상을 봐 절간으로 부리나케 돌아왔는데, 하룻밤 정포(정과 회포)를 풀었던 선비의 방앞 툇마루엔 선비 대신 지난밤 고이 바쳤던 비단 가죽신만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수년을 찾아 헤맨 끝에 재회한 선비가 홀연히 떠나버린 것을 알고 기생은 망연자실 했지만 이내 선비의 고고한 심중을 깨달았다. 선비의 사랑은 소유해도 선비의 몸은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깨우친 기생은 선비의 높고 깊은 큰 사랑을 받았다는 것으로 스스로 위로하며 평생을 선비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이 기생이 그 유명한 평양기생 황진이다. 그러나 황진이는 평양기생으로 잘못 알고 있는데, 사실은 개성 기생이고 개성의 여인들은 미색이 뛰어나고 재주가 특출했다고 한다. 황진이가 그토록 사랑한 남자는 저서 화담집의 조선 성종때 철학자 서경덕이다.

황진이를 만났을때 서경덕이 푼 황진이의 끌 뜻은 點一二口는 글자대로 점일이구 이고, 이 글자를 모두 합치면 말씀 언(言)자가 되고, 牛頭不出이란 소머리에 뿔이 없다는 뜻으로 牛에서 머리를 떼어버린 午자가 되는 것이다. 즉 이 두글자를 합치면 허락할 허(許)자가 되는 것이다. 결국 황진이는 서경덕에게 자신을 바친다는 뜻을 이렇게 사행시로 전한 것이다. 이 글자를 해역할 수 있는 능력이라면 자신을 송두리째 바쳐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한 황진이의 기발한 사랑 찾기가 절묘해서 글을 썼다.

참고로 서경덕(1489년 3월18일~1546년 8월13일)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서 주기파(主氣派)의 거유(巨儒)이다. 독학으로 사서육경을 연마했으며 정치에 관심을 끊고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 일생을 마쳤다. 그는 평생을 은둔생활을 하며 학문을 즐기다가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붕당의 출현 이후 그의 제자들은 동인과 북인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사후 명종때 이준경 등의 추중 건의로 호조좌랑에 추증되었다가 거듭 추증되어 선조때 의정부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그의 어머니 한씨가 공자의 사당에 들어가는 꿈을 꾸고 잉태하여 그를 낳았다고 한다. 그는 기억력이 뛰어났고 일찍부터 말과 글을 누가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터득해서 쓰기 시작하였다. 그 뒤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한 것이 전부였고, 스승없이 스스로 학문연구와 사색에 몰두하였다.

중종때 여러번 조광조 일파나 온건파인 김안국 일파, 남곤 일파 등이 그를 여러번 초빙하려 하였지만 그는 나보다 덕망이 높은 인재들이 많은데 어찌 내가 나가느냐며 모두 거절했다. 혼란한 사회의 사회적 불안은 그를 결코 불행으로 몰고 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사회에 나가지 않고 은둔을 고집한 덕분에 학문적 업적을 쌓을 수 있었고, 학문 수행의 결과물인 ‘화담집’ 같은 저작들은 후대 조선의 성리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만년에 천하의 명기이자 시인인 황진이와 함께 자연을 향유하면서도 선비로서의 인격을 잃지 않고 고고한 학자로서 이름을 떨칠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와 황진이, 박연폭포를 일러 송도 삼절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는 조선의 많은 성리학자나 양명학, 실학등 유학자들을 통틀어 스승이 없는 몇 안 되는 특이한 인물로도 기록된다. 그는 겨우 서당에서 한문을 깨우치는 정도의 교육을 받았다. 그의 스승은 자연과 책뿐이었다. 그 때문에 서경덕은 기존의 유학자들과는 달리 아주 독특하고 진귀한 학문적 업적을 일궈 낼 수 있었다.

앞서도 잠간 언급했듯이 송도삼절(松都三絶)은 서경덕과 황진이, 박연폭포를 말한다. 박연폭포는 천연기념물 388호로 금강산 구룡포와 설악산의 대승폭포와 함께 우리나라(한국)의 3대 명품 폭포이기도 하다. 황진이는 1506년에 조선 경기도 개성부에서 태어났으며, 또 다른 이름으로는 진랑이고 기생 이름은 명월로도 알려져 있다. 중종때 개성의 황씨 성을 가진 진사의 서녀(庶女)로 태어났으며 생부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녀는 성리학적 학문적 지식이 해박하였으며 시를 잘 짓고 그림에도 능하였다.

많은 선비들과 이런 저런 인연과 관계를 맺으면서 전국을 유람하기도 하고, 그 가운데 많은 시와 그림을 작품으로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인해 대부분 없어졌고, 그녀가 음란함의 대명사로 몰리면서 저 평가되고 제대로 보존되지 않아 대부분 인멸되었다. 당시 생불이라 불리던 지족선사를 10년동안의 면벽 수도에서 파계시키는가 하면, 호기로 이름을 떨치던 벽계수라는 왕족의 콧대를 꺾어놓기도 하고, 당대 최고의 은둔학자와 로맨스를 즐기기도 했다.

그녀의 대표작으로 ‘만월대 회고시’, ‘박연폭포 시’ 등이 있다. 조선시대 내내 음란함의 상징으로 여겨져 언급이 금기시 되었으나 구전과 민담의 소재가 되어왔다.

이상의 열거한 황진이나 서경덕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전해져 오는 야담의 이야기 일부이다. 다른 한편으로의 이야기는, 황진이와 서경덕(지족선사)는 어느 야사에서도 서경덕이 황진이와 놀아났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둘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오직 흠모 혹은 존경이라는 단어뿐이다. 서경덕이 아무리 도학자이고 사상가라고는 하지만 당시의 신분으로 보면 양반이요, 그도 역시 사내다. 그러니 당연히 결혼을 했고 첩까지 두었다. 그리고 여자를 모를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진이와의 관계는 왜 그렇게 아름답고 순수했을까?. 이는 황진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묘한 것은 성거산에 은거하며 살던 서경덕이 가끔은 황진이를 그리워 했던 모양이다. 그가 남긴 시조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마음이 어린後 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萬重雲山=만중운산에 어느 님이 오리요 마는, 지나는 님, 부는 바람에 행여 올까 하노라’ 이 시를 대충 해석해 보면 ‘마음이 어리석고 보니, 하는 일이다 어리석다. 만겹으로 구름으로 둘러 쌓인 성거산에 어느 누가 나를 찾아오겠는가. 그런데도 불어오는 바람결에 떨어지는 낙엽소리를 듣고 혹시 그녀가 왔나 하고 방문을 열어본다’. 이 시는 그대로 황진이게게 전해졌다. 그녀 역시 서경덕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지마는 끔찍이도 그를 사모했던 모양이다. 황진이는 서경덕이 부른 시조에 곧바로 회답을 한다.

‘내 언제 無信=무신 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대, 月沈三更=월심삼경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난 닢 소래야 낸달 어이 하리오. 뜻풀이 = 내가 언제 신의도 없이 임을 속였겠는가. 절대 그런 일 없다. 그런데 달밝은 깊은 밤에 무기력하게 무엇을 해야겠다는 마음도 없다. 즉 허전하다. 가을바람에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까지 내가 어쩌겠는가.’ 이런 서화담(書話談)이 황진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마치 부녀지간과도 같은 많은 나이차 때문이라고 전한다(31살 차이라고 전해진다). 다시 말해 명예를 생명으로 아는 대쪽 같은 선비로서 요즈음 원조교제 같은 것을 감히 꿈도 꿀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후 황진이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도와 명상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세상 사람이 알아보지 못하는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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