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나 홀로의 고독

<김명열칼럼> 나 홀로의 고독

 

코로나19 바이러스 유행이 오래 지속되면서 코로나 블루(Corona Blue=코로나 우울감)를 겪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코로나 블루란 코로나19 와 우울감을 뜻하는 Blue가 합쳐진 단어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19의 세계적 유행에 따라 감염에 대한 불안과 스트레스로 생기는 우울감을 말한다.

한국에서 발행되는 한의신문 최근 조사 자료 발표에 의하면 조사대상 회원 3903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성인 남녀 절반이상, 54.7%가 코로나 發(발) 우울함과 불안감 및 고독감을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특히 이러한 고독감과 우울감은 금년 들어 크게 유행된 코로나19 바이러스 전염병으로 인하여 이러한 증상이 생겨났는데, 이러한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더욱더 그 영향은 커지고 있으며 사회적으로도 무시못할 문제로 확대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많은 사람 대다수가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집콕” 문화가 장기화되다보니 고독감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통계도 나왔다.

세상은 수시로 변하고 시간은 너무나 빠르게 흘러간다. “바쁘다 바뻐” 우리는 누구나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삶이야말로 ‘좋은 삶의 덕목’이라고 예찬하고 권장한다. 그러나 그런 삶이 정말로 좋은 삶이고 행복한 삶인가는 좀 더 여유를 갖고 생각을 해봐야겠다. 오늘도 나와 당신은 휴대폰, 노트북, 자동차 따위로 중무장 한채 어디론가 끝없이 이동하고 달려가고 있으며, 어디랄 것 없이 사회적 관계망(SNS) 서비스에 접속해 온갖 정보들의 바다에서 헤매고 있다. 심지어는 나를 위한 시간을 위해 떠난 해외 여행지에서 조차 사회적 관계망에 접속해 국내의 지인들이나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온갖 잡동사니를 다 올려놓고 쓰잘데 없는 잡담속의 이야기들을 털어놓아야 직성이 풀린다. 이러한 사정이 되고 보니 자신을 되돌아보고 성찰하며 나만의 시간을 갖고 명상에 잠기거나 앞으로의 미래를 설계해보는 건설적이고 진취적인 자아(自我) 배양의 시간은 좀처럼 갖지 못한채 그저 현실의 구속을 받는 노예 신세가 되어서 마냥 바쁘다고 덩벙대며 시간에 쫓겨 실아가고 있다.

바쁘게 사는게 마냥 좋은 것이라는 우리 안의 척도를 바꾸어야 한다. 나와 당신이 사회관계망(SNS)에 탐닉할수록 고독할 수 있는 시간을 못 견뎌하고, 머무름의 기술을 습득할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날려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안타까운 마음마저 생겨난다. 한마디로 말해 고독력이 결핍된 것이다. 사회적 관계망의 타임라인이 하나의 현재에서 또 다른 현재로 바삐 달려

가는 속도숭배의 결과이고, ‘향기없는 시간’이 넘쳐나는 정보 공간으로 간주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곳에는 세상의 온갖 정보들과 이야기 꺼리들이 범람하지만, 어느 순간 밀려오는 다른 정보들에 의해 떠 밀려가는 찰나의 순간들이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어쩌면 고독의 의미를 ‘심심한 것’으로 취급해 박멸해야 마땅한 어떤 것쯤으로 간주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나와 당신은 ‘나 홀로 고독한 시간’을 갖고 있는가? 우리는 인생을 사는 시간은 늘었지만, 시간속에 삶의 의미를 넣는 법을 잃어 버린 것은 아닐지? 의문이 생겨난다. 바쁘게 사는 삶이야말로 활동적인 삶으로 취급하는 문화에서는 시간의 향기가 있을 수 없다. 성공지향의 문화에 익숙해진 우리 사회에서 우리는 저마다 부자가 되는 삶을 위해 열심히 열심히 노력을 하지만, 좀처럼 행복한 순간을 누리며 살지 못한다. 어느 외국인이 한국인을 두고 쓴 책의 제목(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에서 말해주듯 이것은 대한민국 한국인들의 행복을 잊은 사회생활속의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우리는 너무나 지치고 지쳐 번 아웃 신드롬(Burn out Syndrom=탈진 증후군)에 빠졌다. ‘피로 사회’에서 성과사회가 낳은 탈진증후군 현상은 어쩌면 현대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독이란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검색해보면 첫번째 의미는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함” 이라고 정의하고, 두번째 의미는 “부모 없는 어린이와 자식 없는 늙은이”로 정의하고 있다. 사전적 의미만으로도 고독은 지극히 혼자인 모습이 연상된다. 세상에 오로지 자신만 존재하는 느낌이다. 어느편에도 의지 할 곳이 없는 불쌍한 사람의 모습이 그려진다.

얼마전 한국의 어느 신문에 실린 기사 이야기다. 어느 독거노인 한분이 혼자서 고독하고 외롭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아무도 그의 죽음을 몰랐고, 며칠 후 그곳을 방문한 우체부가 인기척이 전혀 없음을 깨닫고 방문을 열어보니 그 노인은 이미 숨을 멈춘지 오래된 시신의 모습이었다. 정말로 외로운 인간의 모습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상황이었다. 부모와 형제 자식 등 어느 지인도 가족도 없이 홀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 사람의 장례식이다. 이들은 국가에서 위탁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장사가 치러 진다. 단 한명의 조문객도 없이 쓸쓸하게 화장되는 것이다. 죽은자가 어떠한 사연에 의해 홀로 외로운 인생을 살았는지 는 모르지만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길에서 배웅하는 사람없이 혼자인 것 만큼 고독한 것은 없을 것이다.

고독하다는 것은 그 단어를 부르는 것 만으로도 외로움이 몰려오는 것 같다. 부정적인 느낌과 기운이 고독이란 단어에 가득 차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인간은 고독함을 본능적으로 피하려 한다. 그렇게 사회적 존재임에 충실한 원초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결과 때로는 원하지 않는 대인관계를 맺고, 하고 싶지 않은 사회활동을 하며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혼자이고 싶지 않다는, 혼자인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다는 원초적 욕구에 의해 원하지 않는 삶을 살기도 한다. 그러나 삶을 살아가면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선택적 고독은 필요하다. 쓸쓸함을 회피하기 위한 본능에만 충실하여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원치 않는 삶을 단 한순간도 살 필요가 없다. 어느 누구한테도 방해받지 않고 오로지 혼자이고 싶다면 그렇게 해야 하는것이다. 그런 시간을 스스로 만들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주변의 사람들과 기본적인 관계만 유지한채,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고독한 삶의 시간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삶의 중간 중간 선택적으로 고독한 삶을 사는 것이다.

삶의 마지막에서 오로지 혼자만 존재한다면 무척이나 슬픈 일이지만 그것도 자신의 능동적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존중되어야 한다. 아울러 삶의 과정에서 선택적으로 고독한 삶을 살수 있어야 한다. 사회적 존재라는 명목으로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들러리의 삶이 아니라 주체적 삶을 살고 싶다면 선택적 고독을 택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이 스스로 고독의 의미를 정의하며 자신의 삶을 보다 더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는 당찬 용기는 이 세상을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고독하고 고립된 삶을 사는 현대인들이 늘고 있다. 고립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혼밥, 혼술, 혼행 등이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로 나타나고 있다. 근원적 존재로부터 혼자일수 밖에 없는 운명적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마음속에는 고독함과 쓸쓸함이 자리 잡고 있다. 그렇기에 인간은 사회적이고 사교적인 동물일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기위해 다른 것과 관계 맺기를 열망한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고독에 익숙해져야 하고 지혜의 힘으로 살아가야할 시기인 중,노년기에는 고독에 익숙해지는 것이 필요하다.

시인 보를레르는 “고독은 사람에게 해롭기는 커녕 혼자 있는 것이 행복하다”고 했다. 그가 말한 고독이란 단순히 홀로 외롭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나 홀로 존재하는 시간을 만끽하는 것이다. 종종 혼자라고 느끼는 고독은 깊이 있는 명상이나 인격형성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자기 관리에 철저하면서 고독함을 즐기는 것을 옛 사람들은 신독(愼獨)이라고 했다. 나이가 들면 많은 것을 잃게 되는 ‘상실의 시대’이지만 고독만큼은 떠나지 않고 끝날때가지 같이 가게 될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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