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기자의 이스라엘, 요르단 성지순례 기행문11> 예루살렘

<김명열기자의 이스라엘, 요르단 성지순례 기행문11>

예루살렘

 

매주 인기리에 연재되고, 많은분들의 관심과 호기심속에 애독되고있는 나의 이스라엘과 요르단 성지순례 기행문을 읽으신 독자 여러분들께서 많은 분들이 이메일로 연락을 주시고 독후감과 아울러 자기의 소감을 전해주셨다. 소식을 주신 분들은 여러분이 계셨는데 그중에 두분의 소감을 짧게 소개하여 드리고 다음으로 예루살렘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다.

이중에 한분의 이야기는, “나 역시 3년전에 그곳 이스라엘에 성지순례를 다녀왔는데, 똑같은 장소와 똑같은 모든 것을 보았는데 작가님의 보는 눈과 나의 눈이 왜 그렇게 차이가 나느냐?”는 말을 시작으로 자기는 과거에 그곳에 갔을 때 그저 옛날에 그런 사실들이 그곳에서 있었고 그로인해 오늘날 저러한 유적들이 남아있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다만 보고 느끼는 나의 시선은 관광적 차원으로 그곳을 돌아보고 왔지만, 작가님의 그 예리한 관찰과 역사적 배경, 예수님의 이적과 헌신적인 생애, 제자들과 선지자들의 이야기 등등의 역사적 성경적 이야기들이 너무나 적나라하고 리얼하게 표현되고 설명된 것에 대해 큰 감동과 감명을 받았고 새로운 증거를 얻어 믿음생활을 새롭게 돌아보며 다짐하는 좋은 계기를 마련해주셨다고………하며 말끝을 맺었다. 또 한분은 “나는 그곳에 가보지 못했지만 실제로 나 자신이 그곳에 가서 보고 체감하는 것처럼 너무나 실감이 나며, 2년후쯤 시간을 내어 그곳에 갈 계획을 세워놨었는데 이번에 게재되는 선생님의 기행문이 저에게는 너무나 크나 큰 도움을 주었고, 이 기행문들을 빠지지 않고 모으고 있는데 잘 보관하고 있다가 그때 성지순례 여행 때 잘 활용하여 써먹겠습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끝맺음의 인사말씀을 주셨다.

이번에 우리 성지순례단 일행들이 방문할 지역은 너무나도 유명한 예루살렘 지역이다. 예루살렘은 성경상으로나 예수님의 공생애 3년간을 통하여서도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 중요한 곳이기도 하여 보다더 중점을 두어 설명을 드리고자 한다.

예루살렘에 대하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국제사회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2017년 12월6일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선언했다.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수도는 텔아비브지만, 이제부터 미국은 이스라엘이 주장하듯 예루살렘을 수도로 인정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트럼프의 이선언은 엄격히 말해 국제법 위반이다. 1947년 유엔이 분쟁지역인 예루살렘에 “특별한 국제 체제/Special International Regime”라는 그야말로 독특한 지위를 부여한 이후 이곳은 국제법상 그 어떤 나라에도 속해있지 않기 때문이다. 1981년 유네스코가 예루살렘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면서, 어느나라에 속하는지는 언급하지 않고 ‘요르단이 제안한 유적’이라고만 표현했을 정도다.

참고로 우리 순례단 일행들이 그곳을 방문했을 때 시내 곳곳에는 총을 든 무장군인들이 서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이것을 보는 순간 “아 ~하 이곳이 테러가 빈번히 발생하는 이스라엘이구나!”하는 느낌을 상기시켜주는 광경이었다. 바로 거리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무장한 이스라엘의 군인들, 벤 예후다. 거리는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기도 하지만 현대 이스라엘의 정신적 지주의 이름을 따온 탓에, 팔레스타인들의 폭탄테러가 종종 일어 난다고 한다. 그래서 거리에는 무장한 군인들을 가끔씩 만날 수 있었고, 상업시설이나 공공시설 입구에는 여지없이 수상해 보이는 사람들을 검색하기 위해 보안검색대(Check Point)가 있다. 그곳을 방문한 이방인들에게는 번거롭기만 한 검문검색이 이곳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방문객(여행객)인 우리들에게 검문검색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거리에 서있는 군인들과 대화를 나눠봤지만, 그들에게서 어떠한 공포감이나 위압감, 불친절 등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모두가 한결같이 여행객, 특히 아시아인인 우리들 일행들에게는 상냥하고 친절했다. 특히 여군의 미소속에는 평온과 안정감이 넘쳐났다. 어쨌거나 이곳이 테러우범 지역이라서 그럴까?. 유럽의 여러나라 관광도시에서 자주 마주치는 소매치기나 강도 등의 경범죄가 이곳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여행자들의 입장에서는 이만한 안전함이 또 있을까 싶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로 인식되어있는 이곳이 이토록 역설적인 편안함을 주기도 했다.

거리에는 미모로 유명한(?) 이스라엘 여군도 만날 수 있었다. 말로 듣기로는 이스라엘 여군은 미모 순으로 징집한다는 재미있는 오해가 있는데, 이스라엘의 현실은 실제로 그럴 여유가 없다. ‘현대 이스라엘’의 역사와 국방정책이 여군의 우월한 비주얼을 탄생시킨 거라 생각한다. 현대 이스라엘의 건국과정은 중동민족과의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고, 여전히 그 긴장 속에서 살고 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은 국토방위에 엄청난 노력을 쏟고 있다.

그의 일환으로 이스라엘 국민이라면 남녀 불문하고 18세가 되면 국방의무의 대상으로 징집이 된다. 남자는 3년, 여자는 2년이다. 한참 예쁜 미모를 자랑할 시기의 20세 전후 여성들이 모두 군복무를 하고 있으니, 그만큼 미인들이 많은게 사실이 아니겠는가?…………..

성지순례길에 신 시가지에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성벽이 아름답게도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슬퍼보였다. 저 성벽을 지켜내려고 애써온 성지가 허무해 보이기까지 했다. 예루살렘에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지만, 각 사람들의 마음과 신념은 공존하지 않는다. 공존이라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인정할 때 가능한 것인데 이들은 종교와 이념이 전혀 다르다보니 서로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조금도 포개지는 부분도 없이, 마치 원수와 같은 사이로 견제하며 지내고 있다. 게다가 기회만 된다면, 상대방이 사라지고 모두 내차지가 되기만을 호시탐탐 바라는 자들이다. 각자의 성지라 불리는 이 성벽 안의 유적지들이 ‘인간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성지를 탈환하기 위한 싸움은 중세 십자군 전쟁때부터 천년이 넘은 현재까지 멈추지 않고 있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예루살렘은 첨예한 종교적 갈등의 현장이다. 3대종교, 즉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지이기도 하다. 예루살렘은 사해에서 서쪽으로 약24Km, 지중해안에서 동쪽으로 약56Km 떨어진 이스라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중해 연안 평야와 요르단강에서 이어지는 그레이트 리프트 밸리(세계 최대의 지구대) 사이 해발 800m의 산악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예루살렘은 히브리어로 ‘평화의 도시’ 라는 뜻이다.

하지만 거룩한 땅과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은 갈등과 분쟁, 테러와 전쟁이 끊임없이 발발되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 에루살렘의 역사는 3천년전 다윗의 시대로 올라간다. 기원전 약 1천년경에 이스라엘의 선조 다윗왕이 구릉에 위치한 ‘시온의 성’이라 불리던 도시를 정복한 후 유대인들은 이곳을 ‘다윗의 성’이라 불렀다. 아모스와 호세아를 제외한 모든 선지자들의 활동무대였으며 구약성서 대부분이 여기서 기록되었다. 이후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민족에 중요한 뜻을 지니게 되었다. 다윗의 이름 밑에 유대왕국과 이스라엘왕국이 합병된 후, 예루살렘은 통일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다윗이 죽은 후에 그의 아들 솔로몬 왕은 도시에 왕궁과 성전 및 성체를 새로이 건설하고 성전안에 언약궤를 보관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열왕기상6:8). 그러나 이곳은 수많은 침략자들에 의해 다스리는 자들이 바뀌고 주민들은 쫓겨나는 등, 질곡의 역사를 거쳐 왔다. 솔로몬이 세상을 떠나자(BC933년) 이스라엘은 남북조 시대로 접어들었고, 예루살렘은 남유다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기원전 587년 신 바빌로니아 느부갓네살에게 정복되어 유다 백성들은 바빌론에 포로가 되어 억류되었다.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왕 키루스 2세에게 석방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였다.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의 로마 공화정에 점령되었다. 기원전 37년 헤롯대왕이 즉위와 동시에 성전을 개축하였다. 70년, 135년의 두차례 봉기가 있은 후 로마는 전 유대인을 예루살렘에서 추방하고 ‘이방인의 도시’라고 했다. 4세기에 로마가 기독교화 됨이 따라 많은 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638년 칼리트 오말에게 점령되었고 회교의 중심지가 되어 이슬람 사원이 솔로몬의 성전 터에 세워졌다. 1099년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이슬람교도와 유대인을 무차별 학살하고 예루살렘왕국을 세웠다. 1187년 이집트 이이유브 왕조의 술탄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탈환했다. 1260년 훌라구의 몽골군이 예루살렘 근방까지 쳐들어와 있었으나 바이 바르스가 이들을 몰아냄으로서 맘루크 왕조의 성지 관할권이 확립되었다. 그후 1516년 오스만 제국의 셀림1세가 예루살렘을 접수하여 400년 내내 지배하였다.

크림전쟁중에는 러시아와 영국, 프랑스등의 성지 관리권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세계 제1차대전중인 1917년 영국에 점령되어 위임 통치령으로 확정되고, 그후 유대인들의 대대적인 이민이 이루어졌다. 드디어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예루살렘은 동 예루살렘(요르단)과 서 예루살렘(이스라엘)로 분리되었다가 1967년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전체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대립과 분쟁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거룩한 땅과 평화의 도시라고 말했지만 평화를 가졌던 때는 얼마되지 않았다. 지금도 통곡의 벽 앞에서 수많은 유대

인과 기독교인들이 순례를 하고, 무슬림은 성전 산위에 있는 바위 사원에서 알라에게 예배를 드리고 있다.

현재 예루살렘은 성서상의 예루살렘성 (Old City)과 19세기 말 이후로 새롭게 발전하고있는 신 시가지 (New City)로 구분된다. 예루살렘 성은 서쪽과 남쪽으로는 힌놈의 골짜기로 내려가며, 동쪽은 기드온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올리브산과 갈라져있다. 기드론 골짜기 상류에 왕들의 무덤이 있어 왕들의 무덤 골짜기로 불린다. 구 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는 예루살렘 성의 웅장한 성벽과 성문은 오스만 터키 제국의 슐레이만 대제가 예루살렘을 견고한 요새로 만들기 위해 1537년에서 1542년에 걸쳐 완성하였다. 북쪽은 성벽이 먼저 완성되었고 뒤이어 동쪽과 서쪽벽이 쌓아졌다. 그리고 남쪽 성벽은 시온산을 포함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완성이 늦춰졌다. 성벽 둘레의 길이는 약 4.018Km이다. 성벽을 따라 8개의 성문과 성위에 34개의 탑과 24개의 망루가 있다. 성문중 욥바문, 다메섹문, 시온문은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있다. 이 성문들은 적의 침입시 방어하기 좋도록 하기위해서 (나)자 형으로 만들어진것이 특색이다. 신 시가지는 그 주변으로 예루살렘의 100배 게속 발전하고 있다. 특히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사역, 죽음, 부활, 승천의 무대였다. 따라서 예루살렘 구도시의 경우 성서에 기록된 다양한 성지들이 자리하고 있어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구도시는 성벽 내의 도시로 유대인,기독교,회교, 아르메니아 지역으로 이루어진 지역을 지칭하며, 여기엔 성전산, 예수님 무덤교회, 다윗성채, 가야바의 집터, 최후의 만찬 기념교회, 마리아 기념교회, 다윗왕의 무덤, 베드로 통곡 기념교회, 안토니아성, 아르메니아 교회, 엘악사 회교사원, 예루살렘 역사박물관, 등이 있다.

물론 성밖에도 둘러보아야 할 곳이 많이 있다. 구시가지에서 바깥쪽으로 형성되어있는 예루살렘의 신 시가지에는 주택지구, 상가와 관청등의 여러 교육기관들도 있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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