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각박한 세상, 양보하며 살아가세요.

<김명열칼럼>  각박한 세상, 양보하며 살아가세요.

 

양보는 아름다움이고 미덕이다. 나를 살피고 이웃을 살피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사양할 양(讓), 걸음 보(步), 즉 길이나 자리, 물건 따위를 사양하여 남에게 미루어주거나 자기의 주장을 굽혀 남의 의견을 좇음을 양보라고 한다. 오늘날 우리사회의 세태를 보면,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양보를 부끄러움으로, 힘이 없거나 상황에 밀려 빼앗김 정도로 잘못 이해되고 있는듯 하다.

이것은 섬김과 양보의 즐거움과 그 기쁨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의 왜곡된 양보에 대한 이해이고 선입주견이며 생각들이다.

양보가 가능하려면 여유와 너그러움, 그리고 상대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 아닌 상대에 대한 배려가 양보를 이끌어낸다.

양보를 역사적 배경으로 볼때, 가장 양보적 입장의 선구자가된 사람은 성경말씀 창세기 13장의 아브라함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이곳에 그때의 사정을 설명드리자면,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애굽에서 나와 네게브에 이르고 네게브에서 떠나 가나안의 벧엘과 아이 사이에서 장막을 쳤는데, 두 사람 즉 삼촌과 조카가 모두 부자가 되고, 거할 땅이 좁음으로 생긴 갈등을 집안 어른인 아브라함이 양보를 통해 조절하는 장면을 만나게 된다. 9절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네 앞에 온땅이 있지 않느냐. 나를 떠나거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 하면 나는 좌 하리라”.

약육강식이 생존의 법칙이던 고대의 그 사회에서 이러한 양보를 배경으로 하는 분리가. 이러한 너그러움, 이러한 양보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생각을 해보면 아브라함의 통 큰 양보가 현대 세상에 사는 우리들에게도 시사하는바가 크다.

예언자적 사상가인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에는 1745년 벨기에의 펀트노아에서 일어난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의 에피소드가 수록되어있다. 루이15세가 통치하던 때, 색슨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펀트노아에서 프랑스군과 대치했다. 적을 사이에 두고 50m거리의 근거리에 도착하자 영국군장교인 로드헤이가 모자를 벗고 대열에서 나와 프랑스군을 향해 after you Mr, French! “프랑스 병사들이여 먼저 쏘시지요” 라고 정중히 말했다. 그러자 프랑스군의 지휘관인 단테롯슈 백작이 나와 화답했다. “아니오 영국신사들이여 먼저 쏘십시요” 이렇게 서로 사격권을 양보한 것이다. 결국 먼저 사격을 시작한 프랑스군이 영국, 네델란드, 하노버, 오스트리아의 연합군을 격파했다.

아주 오래전 한국에서의 이야기이다. 후라이보이 곽규석씨와 막둥이 구봉서씨가 농심라면을 선전하는 광고장면이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라면 한 그릇을 놓고 서로 “형님먼저, 아우먼저”를 하며 양보했다. 서로 그릇을 밀치며 양보하던 모습이 얼마간 반복된 후에 “그럼 제가 먼저” 하고 아우 역의 곽규석씨가 라면그릇을 당겨 젓가락질을 했다. 이내 후회와 안타까운 표정으로 아우의 먹는 모습을 쳐다보던 형 역의 구봉서씨를 크로즈업 시키면서 그 광고는 끝이 난다. 양보 이면에 가려진 사람들의 본디 모습을 잘 보여주었기에 아직도 나의 머리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지나친 양보나 마음에도 없는 양보는 바람직하지 않다. 적당하고 진정성 있는 양보가 모두를 위해 좋다. 이러한 양보에는 절제가 필요하다.

아름다운사회로 가는 길은 1%의 양보정신에서 시작된다는 격언을 절실히 실감하게 된다. 한걸음 물러서서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는 마음가짐은 참으로 아름답고 귀한 마음씨라 하겠다. 처세양일보위고(處世讓一步爲高)라는 말이 있다. 길목이 좁을 때는 한걸음 멈춰 서서 남이 먼저 지나가도록 양보하고, 음식이 맛있으면 자기는 조금 덜 먹고 남들이 먹게 하는, 음식에 대한 양보하는 마음가짐이 훈훈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하지만 몹시 시장할 때 다른 사람이 먹도록 양보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가않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이러한 방법은 지극히 편안한 방법이자 세상을 편안하게 조성하는 첫걸음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설한풍이 몰아치는 추운겨울이 오기 전에 기러기들은 큰 무리를 지으며 V자로 질서정연하게 먼길을 여행한다. 항공학자나 조류학자에 의하면 기러기 한마리로는 도저히 먼길을 날 수 없다고 한다. 한마리가 앞장서서 날아가면 뒤에 따라오는 기러기들은 바람의 저항도 덜

받고 같은 공동체로 수월하게 날 수 있다고 한다. 얼마 지나면 선두자리를 바꿔가며 같은 목적지에 무사히 당도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나는 짐승들의 질서의식과 양보정신을 보면서 우리도 다시 한번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란 뜻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기러기들의 생존법칙은 앞서는 것도 중요하지만 뒤에서 바람의 저항을 피해가며 피곤함을 추스리는 공동체의 리듬이 더 중요함을 역설한다. 앞서가다가도 때가되면 뒤를 돌아볼 줄 아는 법칙이란 무슨 말일까?. 모두가 Leader요 모두가 하나 되어 공동체의 조화를 이루는데서 상생의 원리가 조성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들 인간사회는 왜 이렇게 하나가 되기가 어렵고 복잡할까?. 하늘을 나는 ‘기러기의 생존리듬’, 인간들은 이와 같은 질서와 양보 의식을 지키지 못한데서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들의 원만한 가정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도 기러기의 생존법칙을 염두에 둔다면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끼리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고 관용하며 사랑하는 정신으로 성숙된 가정을 이룰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철저한 자율정신과 타율정신의 완벽한 조화가 이루어져야만 비로써 순수하고도 성숙된 인간의 화목을 창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후진국일수록 경제제일 지상주의로 삶을 영위하는 계층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통계를 보았다. 많이 가진 사람들이 빈곤한 사람들과 나누며 살겠다는 비중이 많을수록 그 사회와 국가는 융성한 복지국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인이 되신 법정스님은 “많이 가진 것이 참 부자가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을 얼마만큼 많이 나누어주느냐”가 진정한 부자의 척도라고 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빈곤한사람들에게 군림하는 자세가 아닌 베풀며 봉사하는 정신자세로 임할 때 선진대국으로 비약할 수 있다는 것을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세상의 수많은 문제는 결국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 모두가 양보하고 양해하는 미덕을 가정교훈으로 삼고 나 자신을 깊이 되돌아 보아야 할 것이다. 이기는 것만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많은 적을 만나게 된다는 호승자필우적(好勝者必遇敵)이라는 선현들의 충언을 우리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나 자신부터 양보의 미덕을 교훈으로 삼고 솔선수범하며 극기복례의 최선을 다 할것을 다짐해본다.

오늘날 우리영혼의 삶이 도덕적 가치의 상실과 물질만을 탐닉하는 어리석음으로 투명성을 잃은채 방황하고 있는 것도 삶의 기본원리와 생명의 참된 정당성을 자각하지 못한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인격과 사회의 올바른 발전을 위해 지속적인 인격연마에 최선을 다해야겠다.

유교에서는 군자가 세상에 나아가 갖추어야할 덕목으로 다섯을 꼽았다. 온(溫)은 마음이 부드럽고 따듯한 자세다. 량(良)은 불의를 멀리하고 정의를 가까이하는 어질고 양심적인 자세다. 공(恭)은 겸손한 자세다. 검(儉)은 검소한 생활이다. 양(讓)은 양보하고 희생하는 자세다.

여기서 보면 양보심을 미덕중의 미덕으로 보았다. 양보(讓步)는 말 그대로 한두 걸음 혹은 두세 걸음 뒤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상은 날이 갈수록 각박해져 가고 있다. 살벌함이 곳곳에 넘쳐나고 이해관계속에 자신의 이익과 편리를 위해 무한경쟁의 환경에서 사람들은 쉽게 양보를 하려 들지 않는다. 우리들의 양보심은 메말라 가고 있다. 거목이 쓰러지면 말라죽은 고목(枯木)이 된다. 고목에서 자라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푸른 이끼다. 이 세대에서 사라져가는 양보심을 되살리고 싶다.

양보는 퇴보가 아니라 전진의 밑천이다. 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채근담은 양보를 단순히 퇴보가 아닌 전진을 위한 밑천이라 했다. “세상을 살아갈 때 한걸음 양보하는 것을 훌륭하다”고 말한다. 이는 물러서는 것이 곧 앞으로 나아갈 밑천이 되기 때문이다” 하루에 딱 한번씩만 양보해보자. 이것은 나의 공덕을 쌓는 일이며 내 평판을 좋게 만드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올바르게 사는 사람의 처세가 아니겠는가.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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