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상관의 명령에 불 복종한 전쟁의 영웅들

<김명열칼럼> 상관의 명령에 불 복종한 전쟁의 영웅들

 

군(軍)은 명령에 복종하고 명령에 목숨을 바친다. 이 말은 엄격한 군의 질서와 규율과 법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런데 손자병법에 보면 군명유소불수(君命有所不受)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즉 군주의 명령이 있어도 받아들일 수 없는 명령이 있다는 뜻이다. 일종의 하극상(下剋上)을 뜻하는 말로 군사동일체와 상명하복을 원칙으로 하는 군대의 조직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세계적인 역사적 사례를 든다면 이러한 사건(?)이 여러번 있었다.

그중에 대표적으로 나는 세계 제2차대전 당시 독일군의 점령지 프랑스 파리에서 있었던 일과, 우리나라 6.25전쟁당시 합천 해인사에서 있었던 일들을 가지고 설명을 드리고자 한다.

나이가 지긋한 중년 이후의 연세 드신 어른들 가운데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Is Paris Burning?’ 라는 영화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태양은 가득히’ 등을 감독한 당대의 거장 르네 클레망이 1966년 만들어낸 영화의 제목, 전쟁영화의 제목이 주는 강렬함은 오랜 세월이 흘러간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있다. 지금 머릿속에 남아있는 건, 흑백영화로 다큐멘타리 필름인 것 같은 장면이 자주 나왔던 기억이… 그 장면 속에는 노트르담 대성당, 에펠탑, 루브르박물관, 콩코드광장 등, 파리시내 전체를 파괴하라는 아돌프 히틀러와 그 명령을 끝까지 거부했던 독일군 파리 주둔군 사령관의 이야기. 무엇보다 장폴 벨몽드, 알랭드롱, 커크 더글라스 등의 수많은 유명 배우들이 나왔으며 단역도 마다하지 않고 출연했다는 것 정도의 기억이다.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장면 하나, 파리 사령관의 책상위에 덩그라니 놓여있는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히틀러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명령이다. 수신자가 없는 상태에서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를 계속 외침의 물음은 허공에 맴돌다 만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연합군이 파리에 진격하기 직전, 히틀러는 모든 곳에 폭약을 설치해 파리 전체를 불태우라는 명령을 9차례나 했고, 이를 거부하고 인류문화유산을 지킨 독일 주둔군 사령관 디트리히 폰 콜티즈(Dietrich Von Choltitz)………

영화는 히틀러의 광기어린 명령과 파리유산을 사랑한 장군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만든 것이다. 그는 결국 전범으로 재판을 받았지만 2년 정도만 복역하고 풀려났으며, 프랑스 사람들로부터는 ‘파리의 구원자’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가 나치군의 전쟁범죄 행위에도 가담한 전범이었지만 파리를 지킨 행위가 그의 죄를 어느 정도 덮은 셈이다. 콜티즈의 장례식에는 프랑스의 고위 공직자들과 레지스탕스 지도자였던 사람들까지 참석했다고 한다. “히틀러를 배신할지언정 인류를 배신할 수는 없었다.” 전쟁중 파리를 불태우라는 히틀러의 명령속에 그가 겪은 인간적인 고뇌속에 남긴 명언이다.

손자병법 제8장 9변편에 이런 말이 있다. 승리를 위한 다섯가지 원칙, 즉 지금의 전쟁원칙이나 공격준칙에 해당되는 5리(五利)라는 말이 있다. (1) 도유소불유, 즉 길이 있어도 가서는 안되는 길이 있다. (2) 군유소불격, 즉 군대가 있어도 공격해서는 안 되는 적이 있다. (3) 성유소불공, 즉 성이 있어도 공격을 해서는 안되는 성이 있다. (4) 지유소불쟁, 즉 땅이 있어도 덮어놓고 쟁탈을해서는 안되는 땅이 있다. (5) 군명유소불수, 즉 군주의 명령이있어도 받아들일 수 없는 명령이 있다. 군인은 상사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손자의 말대로 따라가서는 안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러한 사례들은 전사상에 많이 나타났었다. 이때 결심을 하는 최종 지휘관으로 결단의 고민을 해야할 때가 있다. 영웅이 될 수도 있고, 역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계 제2차 대전시 유럽지역 총사령관인 아이젠하워장군이 지휘하는 연합군이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하고 파리입성이 가까울 무렵, 콜티즈는 파리 주둔 독일군 사령관이었다. 그는 대 소전(독일~소련전쟁)에 참가하여 세바스토를 전투 승리로 1942년 소장에서 중장으로 진급했다. 1944년 이탈리아 전투에서 승리하고 8월7일 대장으로 승진하면서 파리주둔 독일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패전을 눈앞에 둔 히틀러는 프랑스의 자존심인 파리를 초토화 하려고 “파리에서 후퇴할 때 도시의 모든 기념물과 주요 건물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폭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총통의 명령을 받은 콜티즈 사령관은 고뇌와 번민에 빠졌다.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고색창연한 아름다운 파리, 우리 후손들이 길이길이 지켜야 하고 볼 역사의 유산을 파괴할 것인가? 아닌가를 고민했다.

Dietrich Von Choltitz, 그는 총통의 명령을 수행하는 충직한 군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명령불복종의 반역자가 될 것인가? 고심 끝에 그는 결단을 내렸다. 비록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한 반역자가 될지언정 인류 역사에서 파리를 파괴한 괴물(?)로 기록되기를 원치 않았다. 1944년 8월23일 마지막으로 히틀러가 직접 전화를 걸어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라고 물었을 때 그는 불타고 있다고 허위 보고를 했다. 이리하여 세계적인 유산인 파리의 모습을 오늘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파리의 구원자(Savior of Paris)로 칭송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콜티즈 못지않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우리 공군의 김영환 장군이 있다. 한국전쟁동안 우리공군 조종사들은 T-6 훈련기와 F-51 머스탱 전투기로 8600여 회를 출격해 공산군을 격퇴하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때 하마터면 합천 해인사가 폭격으로 소실될 뻔했으나 김영환대령의 결단으로 이를 면했다. 그는 서울의 경기고등학교와 일본의 관서대학을 졸업하고 1948년 공군에 입대하여 공군 창설의 주역으로 활동했고, 6.25전쟁시에는 공을 많이 세워 을지 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강릉 전진기지 사령관과 제10전투비행단의 초대 단장을 역임했으나 34세를 일기로 순직했다. 김 장군은 대령으로 순직했으나 그후 준장으로 추서되었다. 김장군은 1951년 8월중순 인민군이 가야산의 해인사로 숨어들어 이동했을 때, 당시 작전권을 가진 미 공군으로부터 해인사를 폭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천년고찰 우리의 국보인 팔만대장경이 보존되어있는 해인사를 폭격할 수 없었다. 영화 ‘빨간 마후라’의 주인공이기도 한 김영환장군은 작전명령을 어기면서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김장군은 폭탄을 해인사 뒷산에 투하하고 복귀했다고 한다.

김영환 장군,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우리 국보인 팔만대장경이 보존된 것이었다. 불교계에서는 2002년 해인사에 김영환 장군 팔만대장경 수호 공적비를 세웠다.

전쟁은 인류역사와 함께 존재해왔지만, 위대한 인류문화유산은 역사의식을 가진 훌륭한 영웅들에 의해 보존되어 왔음을 교훈으로 보여준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팔만대장경과 김영환 장군의 비사(秘史) 이야기는 다음에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자세히 설명해 글을 써 올리도록 하겠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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