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칭찬과 감사와 비난속의 세상살이

<김명열칼럼>  칭찬과 감사와 비난속의 세상살이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군인시절, 아이젠하워 장군이 미 육군에서 소령으로 교육업무를 담당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의 아내는 늘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말을 해주었다. “여보 나는 당신이 자랑스러워요. 당신이 진급을 못해도 괜찮아요. 교육에서 만큼은 당신이 최고잖아요”. 아내의 격려와 칭찬 한 마디는 아이젠하워 장군에게 큰 힘이 되었다. 결국 아이젠하워 장군은 비록 남들보다 늦게 진급했지만 미 합중국 대통령의 자리까지 올라갔다. 남편의 마음을 헤아리는 아내의 따듯한 칭찬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던 일이다.

“여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하고,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라는 말이 있다.

배우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바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칭찬과 감사의 말 한마디이다. 마음속으로만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는 말하기를 “인간성의 가장 심오한 부분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 칭찬을 받고자 하는 갈망이다”라고 말했다. 감사하고 칭찬을 하면 인간의 본질인 진짜가 나와서 어떤 사람이든지 착하게 되고 모두에게 참(眞)으로 있는 훌륭함이 보이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 칭찬이다.

우리들 인간의 본질에는 좋고 좋은 ‘진짜만이 있다’라고 아는것, 이것이 자아발견 이고 남에게도 나와 같이 위대한 본성이 ‘진짜로 들어있다’라고 믿고 칭찬하고 감사하는 것이 자아실현이다. 감사하고 칭찬하는 것에 의해 타인의 위대성이 나타나서 착하게 되고 보기 좋고 아름답게 되는 것이다. 칭찬은 인간에게 들어있는 완전, 원만한 것을 나오게 한다. 칭찬은 모든 사람들에게 들어있는 진짜가 나오기에 모두가 착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아름다워진다. 이것이 바로 칭찬이다.

배우자 혹은 자녀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은 감사와 칭찬이다. 행복해서 감사하기보다는 감사한 마음을 품으니까 행복해진다.

탈무드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사람은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감사는 행복해지는 연습이자 모든 것을 형통케 한다. 불행해질 때도 감사하면 불행이 사라지지만 행복할 때 감사하면 행복이 오래도록 지속된다. 심리학자들은 사람들이 다른 이의 악한 행동에 대해 더 엄격히 한다는 것, 곧 칭찬보다는 비난을 더 자주 한다는데 동의한다고 했다. 즉 우리들의 뇌는 칭찬보다는 비난에 더 가깝게 맞춰져있다고 했다. 이들의 연구에 의하면 뇌가 타인의 선한 행동보다는 악한 행동에 대해 더 감정적으로 반응을 한다는 것을 보였다. 그 결과 우리는 칭찬보다 비난을 더 많이 하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비난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특히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에는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대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먼저 비판한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자신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한다는 부정적인 인상만 준다. 비난이 줄 수 있는 것은 한사람의 가슴속에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깊은 상처와, 언젠가는 똑같은 상처를 되돌려주겠다는 원망 섞인 불평뿐이다. “당신같이 나쁘고 무능한 사람은 내 평생에 처음 봤어요. 당신하고 살기 싫어요”라는 아내의 원망 섞인 불평과 비난은 비수가 되어 영원히 남편의 가슴에 꽂히는 것이다. 반대로 남편이 이와 유사한 폭언을 아내에게 했다면 역시 아내는 마음속에 큰 상처를 받게 될 것이다.

산에 올라가서 “야 이 바보야” 라고 소리를 치면 곧바로 “야 이 바보야, 바보야 바보야”하고 메아리가 다시 돌아오는 것처럼 누군가에게 비난을 하면 우리는 그 몇배의 비난을 돌려받게 된다.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고 해도 비난을 듣고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는 사람은 없다. 습관적으로 비난을 일삼는 사람은 가정에서도 똑같이 행동한다. 항상 부정적인 시각으로 남편, 혹은 아내, 아이들의 잘못된 점만을 지적하며 칭찬 없이 몰아 부친다면 결코 그 집안에서는 행복이 있을 수 없고 부부와 자식과 부모간에 화목이라는 단어는 찾을 수 없게 된다. 뭔가 잘 해보려는 의욕은 무참히 꺾이면서, 능동적으로 무엇을 하려고 나서지도 않고 불신만 조장되어 서로를 견제하고 마음속에 미움만 싹 트인다. 이런 사람은 가정에 브레이크를 채우는 것이다. 아무리 성능이 좋은 차라도 브레이크가 채워져 있다면 아무리 엑셀레이타를 힘껏 밟아도 자동차는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가정에 채워진 브레이크도 행복한 가정으로의 길을 막고 서로 미워하고 헐뜯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행복한 가정을 만들지 못하는 사람은 대부분의 경우, 능력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무엇이든지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스스로 브레이크를 채워놓은 사람이다.

비판에는 건전한 비판과 불건전한 비판이 있다. 건전한 비판은 듣는 사람을 세우기 위한 목적이 있지만, 불건전한 비판은 듣는 사람을 무너뜨리기 위한 파멸의 목적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성경말씀 마태복은 7:1~2절에서 예수님은 “비판을 받지 아니 하려거든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임이니라” 고 말씀하셨다.

이 말의 의미는 남을 무너뜨리기 위한 비판, 즉 비난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은 유대인들, 특히 바리세인들을 뭐라고 하셨는가? 회칠한 무덤, 소경을 인도하는 소경, 외식하는 자, 마귀의 자식, 독사의 자식 등의 너무나 신랄한 비판을 하셨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비판의 문제에 대하여 일관성이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예수님의 긍정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야한다. 예수님의 목적은 그들을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회개를 하여 결국은 살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러므로 위의 두 비판의 경우는 형태는 비슷하지만 성격은 너무나 다른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부간의 이야기이다. 절대로 배우자에게 비난, 비평, 불평을 하지마라. 처음에는 하고 싶은 말을 속에 담아두는데서 오는 답답함도 느끼겠지만 조금만 참고 견디면 곧 자기 자신에 대해 뿌듯하게 생각할 것이다. 우리의 생각을 말로 표현하면 그 정도가 생각으로 그칠 때 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구체적이 되는 경우가 많다. 비난이나 비평, 불평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도 그것을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비난, 비평, 불평하고 싶은 생각은 사라지게 된다. 부정적인 생각이 사라지면 자연스레 부정적인 태도도 뿌리가 뽑힌다.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아내나 남편을 칭찬해주고 기쁘게 하기위해 시간을 쓰는 사이 자기도 모르게 긍정적으로 변하게 된다. 부부간의 팀웍도 살아나고 둘만의 에너지가 창출되는 것이다.

말 한마디의 위력, 참으로 무섭고 대단하다. 말이 사람을 죽이고 살린다는게 허튼소리가 아니다. 비난은 치명적인 독과도 같다. 비난의 말이 마음에 와 닿는 순간, 일단 기분이 나빠진다. 뿐만 아니라 의기소침해지고 주눅이 들고, 자신감을 잃게 된다. 아무리 잘나고 똑똑하고 마음이 강한 사람도 비난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무너지기 마련이다. 애정이 담긴 비난은 어느 정도 용납이 되지만 오직 남을 헐뜯고 주저앉히고 상처를 주기위한 비난은 절대로 삼가 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칭찬하는 습관을 길러야겠다. 아무리 칭찬을 하려고 해도 그 사람에겐 칭찬거리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거짓이다. 자신의 마음이 닫혀있고 병들어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좋은 점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칭찬하고자 마음을 먹으면 칭찬

거리는 넘쳐난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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