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일을 한다는 것은 신이 내린 축복

<김명열칼럼> 일을 한다는 것은 신이 내린 축복

노동은 신성하고 신이 내려주신 축복이며 행복이다. 많은 사람들은 오늘도 직업전선에서 열심히 땀흘려가며 일하고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
지난주 나는 가깝게 지내는 친구 부부들과 매달 모이는 정기 친목 모임에 참석했다. 점심때 모여 함께 식사를 나누며 시간가는 줄 모르게 정담을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10명 모두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직업전선에서 열심히 일하며 노력과 근면을 아끼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제는 정년이 되어 은퇴를 하고 열심히 일하며 그동안 일궈온 그 보람과 결실을 맛보며 여생을 재미있게 지내는 사람들이다. 여기에는 사람들의 건강을 위하여 봉사하고 치료한 의사선생님도 있고, 물건을 팔아 돈을 모은 장사꾼도 있으며, 무역으로 재미를 본 사업가도 있다. 또한 세탁업을 하며 문학, 창작활동에 몰두한 나 같은 사람도 있다. 모두가 미국으로 이민 올 때는 갖은 돈 없이 거의가 빈손으로 이곳 미국에 와서 자수성가한 사람들이다. 오늘날의 풍요와 부의 혜택은 젊었을 때 열심히 땀 흘려 일을 한 댓가로서 그 달콤한 보람의 열매를 맛보며 노후를 재미있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탬파시내 어느 식당의 별실에서 모임을 갖고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다. 이때 우리의 식사를 돕기 위해 서비스를 해주는 도우미 여직원이 우리의 테이블 앞에 나왔는데, 뜻밖에도 그 분은 나와 가깝게 지내며 친분이 있는 집사님이시다.
그 집사님은 무척이나 반갑고 친절하게 우리 일행을 맞아주었고 따듯한 미소와 매너 있는 서비스로 분위기를 푸근하게 만들어주며 즐겁고 맛있게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정성과 마음을 다 해주었다.
내가 알기로는 그 집사님은 경제적으로도 곤란을 겪는 분이 아닌데, 당당하고 활기차게 맡은바 일에 열중하는 그 여 집사님이 참으로 훌륭하고 성실해보였으며 존경감 마저 생겨났다. 일하는 보람과 삶의 진실을 모두 통찰한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를 발견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일하는 사람, 할일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라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영국의 비평가이며 역사가인 카알라일도 이렇게 말했다. “일생의 일을 가진 사람은 행복하다. 그는 행복을 찾을 필요도 없다”. 우리들은 살아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살아있다는 것은 움직이고 활동한다는 뜻이며 이것이 산 것의 본연의 모습이다. 다시 말한다면 우리 살아있는 인간은 원래가 활동하고 일하는 것이 즐거운 것이다. 모두가 그렇다. 일이 없거나 할 사업이 없는 만큼 따분하고 처량한 것은 없다. 일을 하는 즐거움과 보람, 그러한 일이 있어서 좋은 것을 알고 일에 대해서 감사하고 주어진 일에 충실하자. 일이 없는 사람, 일을 싫어하는 사람, 일을 발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이 세상을 졸업한 사람인 것이다.
일이란 생명의 자기표현이며 생명의 활동인 까닭에 생명을 구김 없이 마음껏 활동시킬 때 우리는 거기서 즐거움을 맛본다. 일을 남에게서 주어진 것, 명령된 것, 또는 피동적으로 마지못해 하는 것, 이런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일이 괴롭다. 스스로 일에 맞붙고 적극적으로 일에 참가할 때 육체적으로는 괴로움이 있다하더라도 마음은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 인생은 바로 자기표현의 장소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으로 해서 넉넉하게 자기의 가능성을 표현하며 자기가 가지는 정신적인 내용과 그 인격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은 우리의 가치를 나타내주며 자기를 실현하는 도구가 된다. 직장이나 사업장은 모두가 우리의 가치를 실현하는 장소가 된다. 때문에 자기의 가치를 인정받고 실현시키기 위해서도 우리는 주어진 일에 열심히 충실을 기울여야한다.
일, 어느때 어느 나라에서건 일은 언제나 찬양되고 격려되어왔다. 사실 일의 내재적 가치를 부정하고 아무도 일을 하지 않는 사회는 있을 수 없다.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생산해야한다. 일은 바로 이런 생산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 일을 하지 않는 사회, ‘일’이라고 하는 생산 활동이 없는 사회에서 인간은 인간으로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일은 반드시 노력을 요구한다. 노력은 필연적으로 일종의 고통을 의미한다. 고통을 피하려는 것은 모든 생물의 근본적 이치이다. 그러므로 일이 아무리 미화되더라도 그것은 모든 인간들이 반드시 피하고자 하는 것임엔 틀림없다. 모든 사회에서 일이 도덕적, 윤리적으로 찬미되고 때로는 성화(聖化)되기 까지도 하는 근본적 이유는 일의 위와 같은 성질에 있을지도 모른다. 아닌게 아니라 20세기에 하나의 철학적 기둥으로 알려졌고 사회 문학평론가이기도한 러셀은 일을 성화 하려는 숨은 동기를 폭로하고 일의 내재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부정한다.
일은 찬미되어야 할 것이다. 그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모든 사회에서 일의 미덕은 남들의 피, 땀 흘린 일의 열매만을 놀면서 즐기는 사회의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위해 고안된 속임수라는 것이다. 일은 최선의 경우 한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견디어야할 필요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러셀은 일의 미화를 소수 지배층, 특히 경제적 지배층이 피 지배층, 특히 노동력을 제공하는 근로자 대중에게 적용한 일종의 쇠뇌수단으로 보고 있다. 일의 고귀성은 고사하고 일의 내재적 가치, 즉 그자체로서 갖고있는 일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러셀의 견해가 옳은가? 아니면 일을 격려하고 일의 고귀성과 성스러움 까지를 강조하는 기존의 일에 관한 주장이 옳은지, 양립하는 두 관점가운데 어느 하나를 택하려면, 즉 위와 같은 두개의 의미를 좀더 주의 깊게 검토해야한다.
정치 철학자로 알려진 아렌트여사는 우리가 보통 ‘일’이라고 부르는 활동은 작업, Work과 고역(苦役)즉 Labor로 구분한다. 이 두 가지는 다 같이 인간의 노력, 땀과 인내를 수반하는 활동이며, 다같은 관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서 생긴다. 분명히 일은 노력과 아픔을 필요로 하고 생존을 위해 물질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풍요한 생활을 위한 도구적 기능을 담당한다. 그러나 그러한 도구성, 목적성을 떠나서 일은 인간의 본질을 구성한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일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의 세계에서 일이 생기고, 오직 인간만이 일이 범주에서 벗어나 인간의 가족으로 들어온다. 한 인간이 일을 할 줄 모를 때에 그는 인간의 테두리에서 추방되어 동물의 세계로 돌아간다. ‘일’이라고 명칭 된 활동은 ‘인간’이라는 명패와 다름없다. ‘일’이라는 활동은 인간이 자신의 계획과 계산과 의지에 준해 주어진 자연을 변형시키는 과정이요 절차다. 동물도 생존과정에서 주어진 자연을 어느 정도 변형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동물의 변형은 계획적이거나 의지적인 것이 아니다. 동물과 자연의 관계는 적응적 반응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래서 그런 반응자체는 자연의 일부로 보인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전혀 다르다. 인간은 자연에 단순히 적응하고 반응하지만은 않는다. 그는 주체로서 자연을 자신의 의지에 굴복시킨다. 그는 자연의 질서를 이용해서 자신의 유일하고 독특한 새로운 질서, 자연에 환원될 수 없는 정신적 질서를 창조한다. 그런 것을 창조하는 이유가 단지 물질적, 즉 동물적 필요성을 보다 만족스럽게 충족시키기 위해서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 원시사회를 연구한 이른바 구조주의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는 그 결론을 맺으면서 근친상간 금기라는 규범, 즉 반자연적 인간의 질서는 인간사회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이지만 특수현상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규범은 인간이 다른 동물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확인하고자하는 뜻의 구체적 표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인 ‘일’이라는 창조적 작업도 인간이라는 동물이 단순한 동물이 아니고 인간이라는 동물임을 나타내는 증명서와 같다. 우리는 일이라는 창조적 작업을 통해서만 우리가 인간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기에 땀을 흘리고 적지 않은 고통을 치러야만 하는 정말 일로서의 일, 즉 작업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언제나 엄숙하고 거룩하고 귀해 보인다. 땀을 흘리며 대리석을 깎는 조각가에서, 밤늦게까지 책상 앞에 앉아 문학. 창작에 열중하는 작가에서, 무더운 공장에서 쇠를 깎는 선반공에서, 땡볕에 지게질도 하며 쟁기로 밭을 가는 농부들에게 다 똑같이 흐뭇함과 거룩함을 발견하며, 그래서 머리가 숙여진다. 그러나 앞서 봤듯이 모든 일이 작업으로서의 일은 아니다. 어떤 일은 부정적인 뜻으로서의 ‘고역’이기도 하다. 회초리를 맞으며 노예선을 젓는 노예들의 피, 땀방울 나는 활동은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기는커녕 그들을 짓밟는 고역이다. 위생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조건하에 타당치 않게 박한 보수를 받고 무리한 노동을 팔아
야만 하는 일은 마땅히 없어져야 할 고역이다. 작업으로서의 일과 고역으로서의 일의 구별은 단순히 지적노고와 육체적 노고의 차이에 비해서 결정되지 않는다.
한 학자가 하는 지적인 일도 경우에 따라 고역의 가장 나쁜 예가 될 수 있다. 작업으로서의 일과 고역으로서의 일을 구별하는 근본적 기준은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는 것이냐, 아니면 타락시키는 것이냐에 있다.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의 자율성에 있는 것이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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