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이 3월달에………………

<김명열칼럼> 이 3월달에………………

지난달 2월 4일은 입춘이었고, 음력 설인 정월 초하루(2월 16일)가 지나 2월 19일은 우수였다. 이날은 겨우내 땅위에 얼어붙었던 얼음이 녹고 봄기운이 솟아나며 대동강물도 풀린다는 24절기중의 하나인 우수였다. 그리고 보름 후에는 경칩(3월6일)이다. 경칩이 되면 땅속에서 동면을 하고 잠자던 개구리가 입이 열리고 땅밖, 지면위로 기어 나온다는 절기이다. 이때부터는 봄기운이 무르익고 산에는 할미꽃이 피어나며 울타리곁 개나리 나무는 노란꽃을 피워낸다. 춘분이지나면 본격적인 봄이 기지개를 편다.
지금이 3월 초순이니 곧이어 4월이 되고, 4월이 되면 본격적인 봄이 태동을 하고 각종 초목들이 움을 틔우고 나래를 펴서 봄동산을 이룬다. 24시간 하루가 발 빠르게 지나가듯이 기후와 절기가 톱니바퀴처럼 돌아간다. 올해는 유난히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북쪽 땅, 위도상으로 북위 40도선상 위쪽의 지방들은 아직도 겨울이 그대로 존재하며, 봄이 올듯하면서도 꽃샘추위가 길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곳은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했던가. 옛날 중국의 한나라 왕소군은 흉노족 왕에게 시집을 갔다. 16세에 시집가서 35세에 죽었다. 불행한 왕소군을 위해 지은 시에 적은 글이 춘래불사춘이다.
봄이 왔건만 봄같지 않다. 봄의 이야기 중에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서기 68년경 로마시대, 당시에는 사제(司祭)가 봄의 기한을 정하던 때였다. 로마황제 비테리우스가 사제 프라망이 살고 있는 고올 지방으로 가서 봄을 1분간 연장해달라고 하며 돈을 주고 샀다. 지금의 돈으로 2억4천만 달러를 주었다. 사제 프라망은 봄의 시작과 끝을 알리면서 1분을 연장시켰다고 한다. 이에 황제 비테리우스는 봄을 1분간 연장시킨 것을 평생 동안 자랑하였다고 한다. 그가 얼마나 봄을 좋아하였으면 이렇게 해괴한 발상을 하였을까? 봄이야말로 희망이 넘치고 만물이 소생하며 갈색과 회색으로 점철된 대지를 초록으로 물들여주니, 이를 보고 반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앞의 비테리우스 황제의 이야기를 되씹어보면 인간 규정과 자연의 섭리를 어긴 것이다.
조물주이신 하나님께서 지구를 창조하여 인간과 만물들에게 선물하신 대자연의 시각을 값을 치루고 차지하지는 못한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을 전혀 모르고 한 일이다. 한마디로 무지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톨스토이는 돋아나는 풀을 뽑고 피어나는 꽃을 꺾어버려도 오는 봄은 막을 수 없다고 하였다. 문밖에는 춘설(春雪)이 덮여도 정녕 봄은 이 땅에 와있다. 이제 농촌에서는 씨앗을 뿌리고 파종을 서두를 것이다. 씨앗을 뿌리려면 겨우내 얼었던 땅을 뒤집는다. 밭갈이를 하는 것이다. 매년 이른 봄이 되면 나의 아버지께서는 황소를 앞세우고 목에 멍에를 씌워 쟁기로 밭을 간다. 인간들이 쟁기를 사용한지가 8천년이 넘었다고 한다. 참으로 오래된 농기구이지만 한국 시골의 농촌, 산골지역에는 아직도 넉넉하지 못한 가정에서는 이러한 쟁기로 논과 밭을 간다고 한다. 쟁기와 소가 농사를 도와준다. 소가 농사일을 도운지도 꽤나 오래되었다. 농사 시작이 8천년이니 비슷한 역사를 보냈을 것이다. 지상에는 수없이 많은 동물들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소가 농사를 짓는데 길들여졌을까? 순한 탓일까? 아니면 우람한 체구이고 힘이 쎄어서일까?. 그리고 먹이가 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최고도로 문명이 발달된 현 시대에는 기계문명이 발달되고 일반화되다보니 농촌에서도 이제는 기계를 이용해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다보니 소의 이용가치가 줄어들고, 이제는 소가 농경에 쓰이는 일보다 식탁에 올라 먹거리로 더 각광을 받고 있다. 소의 가치가 떨어졌으니 서글프게 느낄 것이다. 사람은 독이 있는 나물과 독이 없는 나물을 구분 못한다. 그래서 때로는 먹지 못할 독나물을 먹고 목숨을 잃기도 한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소는 먹을 풀과 못 먹을 풀을 구별하여 뜯어먹는다. 이 세상에서 단 한번도 독이든 풀을 먹고 죽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나의 어린시절(중학생 시절) 시골에서, 학교에 갔다 오면 농사일에 바쁜 아버지를 도와 소가 먹을 풀을 베어올 때가 가끔씩 있었다. 특히 비가 오는 날은 농촌의 일손이 더욱 바쁘게 움직이는 날이다. 이럴때 어쩌다가 비오는 날 내가 베어온 풀을 소가 받아먹으면 소가 설사를 하는 경우를 보았다.
비오는 날 사람들이 베어다주는 풀을 외양간에서 받아먹으면 가끔씩 설사를 한다. 소가 들에 나가 이풀 저풀 가려서 뜯어먹으면 절대로 그런 일은 안 생긴다. 소는 본능적으로 해독 구분능력을 가진 것이다. 이것을 자연의 섭리라고 말할 뿐이다. 이것을 보면 자연은 참으로 위대하다. 소에게 쇠죽을 끓여 먹이고 쇠꼴(풀)을 먹이려고 앞산 뒷산으로 다녔던 옛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진달래와 할미꽃이 지천으로 핀 봄날이다. 파라케 진초록 빛을 띄고 자라난 보리밭에는 아낙네들이 밭을 매고 있다. 소의 등 위에 올라타서 고삐를 흔들며 앞, 뒷산과 시냇가를 누비든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소는 말을 하지 못해서 그렇지 무척이나 충직하고 정이 많은 동물이다. 소도 제 주인을 알아보고 자기보다 덩치가 몇배나 작은 어린소년이라도 주인인 어린소년을 깔보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소의 등위에 올라타기 위해 커다란 나무곁으로 가서 나무를 타고 소등 위에 올라타도 전혀 불편해하거나 거부의사를 내비치지 않는다. 등을 툭툭 두드리면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어서 등위로 올라타라고 하듯이 몸을 숙여준다. 옛말에 소를 보고 배우라는 말이 있다. 조선 명종때 영의정 상진공이 15년동안 자리를 지킨 것도 소와 인연이 깊다. 농부가 밭갈이하는 것을 보고 두소중에 누가 더 일을 잘하나 물었더니 농부는 귀에다 대고 소근거렸다. 그는 귓속말로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잘못한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 나빠할 것”이라고 하였다. 맹사성은 소를 타고 아산 고향으로 갔었다는 유명한 이야기도 생각난다. 우리의 삶의 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세상을 떠나가니 올바르게 살아야 된다. 소처럼 착하고 순하고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소에게 배울 일이다.
3월은 봄이 태동하는 시작 절이다. 그래서 이 3월은 기대반 설렘 반으로 맞이하는 달이다. 해가 바뀌는 정초가 희망으로 마음을 다지는 때였다면 3월은 봄의 시작과 함께 계획을 실현하기위해 본격적으로 행동하는 시기이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움추러든 마음들이 풀리고 새롭게 펼쳐지는 계절의 조화에 만물이 깨어난다. 원래 3월은 로마의 전쟁 신, Mars에서 유래됐다고 하는데 대부분의 전쟁이 즉 봄에 많이 일어났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영어의 3월 March는 행진의 의미를 담고 있다. 행진은 앞으로 나아감을 뜻하며 진보하고 발전하는 의미를 갖는다. 특히 3월은 생동감을 새롭게 얻어 생명이 있고 움직이는 것들은 일제히 기지개를 편다. 그래서 시인들은 새로운 시작과 생명을 찬미하는 시를 많이 지어냈다. 이처럼 많은 것이 바뀌는 3월은 전환의 계절이다. 전환은 끊임없이 흐르는 물줄기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만물에게 활력소와 같다.
우리도 이제 이 생동감 넘치는 전환기를 맞아 나의 생활환경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삶의 생동감 넘치는 희망의 싹을 틔워 부정이 긍정이 되고, 갈등이 화해로 변하며, 못하고 안했던 일들에 도전을 하여 언 땅이 풀리듯 모든 일들이 훈훈하게 풀리기를 기대해보자.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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