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완견(반려견)의 상사병(相思病) <1>

애완견(반려견)의 상사병(相思病) <1>

김명열 / 칼럼니스트

탬파의 내가 살고 있는 집, 주택단지 내에는 많은 집들이 개(애완견)을 기르고 있다. 특히 주말인 토요일이나 일요일의 아침이나 저녁에 보면 개를 운동시키고 산책을 시키기 위해 기르는 애완견을 데리고 밖으로 나와 공원의 산책로라던가 한적한 숲속의 오솔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어느 날 보면 데리고 나온 개의 숫자가 사람의 숫자보다 많은 경우를 흔하게 볼 수 있다. 한 마리는 기본이고, 어느 사람은 2~3마리를 데리고 나왔으며, 심지어 최고의 경우 다섯 마리를 줄줄이 엮어 매어 끌고나온 모습을 본적도 있었다. 그들을 볼 때, 얼마나 개(애완견)을 좋아하면 귀찮을텐데도 불구하고 저렇게 개들을 힘들게 데리고(끌고) 다니겠는가 하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이해를 하며 좋게 봐주기도 한다. 이러한 장면과 모습들을 대할 때 가히 지금은 애완견(반려견) 전성시대라고 할 만큼 개들의 세상이다. 애완견을 사랑하고 좋아하여 기르고 함께하며 동거 동락하는 사람들이 유독 따듯한 지방인 플로리다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 지구촌 곳곳, 사람이 살고 있는 곳에서는 어느 곳에서든 개와 사람이 함께 공생공존하고 있다. 시골이건 도회지이건 어느 곳에든 개와 사람은 불가분의 관계 속에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만큼 개와 사람과의 관계는 밀접한 관계가 있고 가족이 아닌 가족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애완견을 키우며 함께 생활한다는 것은 개나 사람이나 모두에게 행복과 기쁨을 선물해준다.

외로운 사람들에게는 하나뿐인 대화상대로, 또는 친구나 가족이 되기도 한다. 요즘 1인 가구들이 증가하면서 외로움을 달래줄 애완견을 많이들 기르고 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집에서 느껴지는 적막함과 고요함은 하루의 일과를 끝마치고 집으로 귀가한 우리를 더 지치게 만든다. 그러나 이렇게 혼자 사는 집에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한걸음에 달려와 온몸으로 반겨주는 애완견은 우리에게 커다란 위로와 힘이 돼주는 존재이다. 동그란 눈망울로 펄쩍펄쩍 뛰며 전신으로 반겨주는 애완견의 이러한 모습은 누구든 순수한 마음과 사랑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집에서의 생활 속에 함께 동반하는 이 애완견은 어찌 보면 우리들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존재이기도하다. 이래서 애완견은 우리들과, 생활과, 일생을 함께하는 반려견이라고 부르고 싶다.

애견(愛犬)은 애완견을 줄여서 사용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애완(愛玩)은 동물이나 물품 따위를 좋아하여 가까이 두고 귀여워하거나 즐김의 뜻을 가지고 있다. 옛날에는 개, 고양이, 앵무새, 금붕어 등을 애완동물이라고 불렀지만, 요즘은 반려동물이라고 부른다. 단순히 귀여워하거나 아끼는 것을 넘어서서 반려(짝이 되는 친구)라는 말을 사용하여 평생을 함께할 좋은 친구라는 의미로 반려동물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즉 애완동물과 반려동물은 같은 말이지만, 반려동물에는 동물을 존중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한국에서도 반려동물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가족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고 한다. 30여년전만해도 한국에서는 가족처럼 함께 생활을 한 기르던 개를 보신탕용으로 팔거나 직접 잡아먹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동물보호단체로부터 지탄을 받고 세계적으로도 혐오국가로 낙인이 찍히기도 했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시대가 바뀌고 세월이 흐르다보니 이제는 그러한 동물학대나 보신탕용으로 희생되는 개(애완견)들의 숫자가 확연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아직도 일부에서는 이러한 나쁜 폐습이 암암리에 자행되고 있다고 하니 가슴 아픈 일이다.

가족의 일원처럼 한집에서 주인의 사랑을 받으며 한껏 재롱을 부리고 충성을 다하는 애완견겸 충견(忠犬)은 마땅히 그 개체를 인정받고 보호를 받아야하며, 하나의 소중한 생명체를 가진 동물로서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본다.

시카고에서 혼자 살고 있는 나의 사랑하는 막내딸 아일린은 귀여운 강아지, 푸들 한마리를 가족으로 삼고 정성과 마음을 다하여 돌보며 어언 9년 가까이 기르고 있다. 프랑스의 사랑을 가득 받는 프랑스의 국견(國犬)이라하는 이 푸들, 촘촘하면서도 곱슬곱슬한 양과 같은 털을 갖고 있는 이 푸들은 털이 잘 빠지지 않아서 더욱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다. 영리하고 똑똑하기로 소문난 푸들은 훈련도 잘 따르고 사람의 말도 잘 들어서 어린아이나 노인이 있는 가정, 그리고 혼자 사는 1인가구의 외로운 사람들에게도 모두가 잘 어울린다. 혼자 있으면 외로움을 잘 타고, 사교적인성격에 매우 애교가 많아서 주인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이러한 푸들 한마리를 약 9년전에 나의 딸이 데려왔다. 우연한 기회에 어느 동물보호센터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죽음(안락사)을 기다리는, 젖을 갓 뗀 푸들 새끼강아지 한마리가 바들바들 떨며 조그만 철사 우리 안에 갇혀있었다. 그곳의 직원에게 사연을 물으니 “저 강아지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순종의 종족보존을 위하여 일부를 기르며 새끼를 낳아 분양하는 푸들“인데, 새끼들 중에 우량종은 비싼 값을 받고 판매를 하고 나머지 팔리지 않는 새끼들은 기르고 양육하기가 번거로워 가차 없이 동물보호센터로 보내어 안락사 시킨다고 한다. 지금 저 우리 속에 갇혀있는 새끼 강아지 푸들도 내일쯤에는 다른 개들과 함께 안락사 된다고 그 직원은 설명해주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어미 곁을 떠나, 태어난지도 불과 몇주밖에 안됐는데 이제 내일은 짧디 짧은 생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나야한다고 생각하니 그 어린 푸들새끼가 너무나 불쌍하고 처량하게 보였다. 아깝고 귀중한 조그만 새끼의 생명이 그렇게 아무런 의미 없이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저절로 솟아났다. 죽음의 시간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전혀 알지도 못한채 푸들새끼 한마리는 나의 딸 아일린이 곁으로 다가 가자 이내 얼굴을 쇠창살사이로 내밀며 짧은 꼬리를 흔들며 앞다리를 내밀었다. 악수라도 하듯이, 아니면 나를 구해달라고 애원을 하듯이…………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발발 떨며 앞으로 다가온 새끼 강아지 얼굴을 대하자, 불현듯 그냥 되돌아서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과 죄의식이 머릿속과 가슴속을 짓눌러왔다. 죽음을 몇시간 앞둔 불쌍하고 가련한 강아지의 운명, 내가 이대로 돌아서 집으로 간다면 저 새끼강아지는 내일이후에는 영원히 이 세상에서 볼 수가 없게 된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아일린은 관계 직원에게 조심스럽게 이렇게 물었다. “저 강아지를 내가 살수는 없는가?” 그 말을 들은 직원은 반색을 하며 “무슨 말씀을, 당장이라도 사갖고 집에 갈 수 있다” 라고 답변을 주었다.

아일린은 동물보호센터에 도네이션겸 강아지 값으로 거금(?) 6백 달러를 지불하고 그 새끼푸들 강아지 한마리를 안고 집으로 향했다. 오는 길에 가축병원(동물병원)에 들러 강아지 사육법과 일반 상식, 관리 요령 등을 교육받고 또한 Pet Shop에 들러 어린 새끼강아지의 살림도구 일체와 먹는 음식, 영양식, 밀크, 작난감 등등 모든 것들을 사들고 장만하여 집으로 왔다. 집에 와서는 보드랍고 포근한 천과 옷감들로 잠자리를 만들고 밥그릇도 예쁜 것으로 사와서 불편 없이 밥을 먹도록 해주었다. 강아지 이름도 리암(Ri Am)으로 지었다. 모든 것이 속전속결로 진행되고 이루어졌다. “엄마 아빠, 나 강아지 한마리 사왔으니 빨리 강아지 보러 와” 토요일을 맞아 늦잠을 좀 잘려고 침대에 누워있는데 새벽같이 전화가 왔다. 이게 웬 뚱딴지 같은 소린가? 궁금증과 의문점이 팽대하여 머릿속을 어지럽히며 다운타운 미시간호 인근의 딸의 집 고층콘도에 다달았을때, 딸은 주먹만큼 작은 예쁜 강아지 한마리를 안고 문 앞에서 우리부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귀엽고 자랑스러웠으면 강아지를 문밖까지 안고 나와서 엄마 아빠에게 선을 뵈이는지?……….집안으로 들어가 보니 이건 완전히 강아지 살림방이 되어버렸다. 혼자 사는 처녀집이 화장품, 분 냄새가 아닌 강아지냄새로 범벅이 되어 이상한 뉴앙스를 풍겨낸다. 강아지에게 올인을 하다시피 하는 딸 아일린을 보면서, 저 강아지가 나의 손주가 되어 눈앞에서 재롱을 부리고 이쁜짓을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마음속의 바램을 씻어낼 수가 없었다.

아침에 직장에 일찍 출근하며 행여 강아지가 어떻게 될까봐 바쁘게 일하는 제 엄마 아빠를 재촉해 낮시간에 한번은 강아지에게 찾아가 물도 주고 간식도 먹이라고 부탁(명령)을 한다. 귀찮고 힘이 들더라도 감히(?) 자식의 명을 거부할 수 없어 저의 집사람은 종종 막내딸의 집에 들러 강아지를 돌봤다.

그렇게 1년반 정도가 지나자 리암은 트레이너의 교육에 힘입어 똥, 오줌을 지정된 장소, 패드위에 정확히 배변하고, 어느 때는 하루 종일 용변을 참고 있다가 제 주인(언니)가 퇴근하여 집에 돌아오면 함께 산책을 나가 공원의 잔디위에 누기도 했다. 리암은 점점 커가면서 예쁜 짓은 도맡아 했다. 재롱도 수준급이고, 영어를 사용하는 제 언니의 말은 거의 다 알아듣고, 한국말을 사용하는 우리 부부의 말도 정확히 분석하여 행동을 취했다. 말을 잘 듣고 따르는 리암이 집안의 웃음을 너무나 많이 선물해주었고, 반색을 하며 따르는 리암의 재롱과 행동에 시간가는 줄을 잊었다. 행복과 즐거움, 기쁨을 선사해주는 리암에게 우리 가족은 정말로 고마워했고, 리암은 그것을 아는지 더욱 우리에게 부침성 있게 대해왔다.

비록 낮시간(아일린이 출근하고 집에 없는시간)에는 혼자서 집을 지키며 외롭게 하루 종일 주인(언니)를 기다려야했지만, 언니가 일단 집에 귀가하여 돌아오면 리암은 온갖 반가움을 몸 전체로 표현하며 어쩔줄 몰라 한다. 다리에 와서 엉기고, 비비고, 멍멍 짖어대고, 기어오르고, 핥고, 빨고, 물고, 기대고, 딩굴르는 등 온갖 애교와 재롱을 있는 대로 다 부리며, 하루 종일 직장에서 업무에 시달린 언니의 누적된 피로와 스트레스를 한 순간에 날려 보내 줘 버린다. 그 이후 아침 출근시간까지는 완전히 리암이 자기의 언니를 독차지해버린다. 응석을 부리고 책상위에서 컴퓨터로 밀린 일을 진행하는 언니의 무릎아래서 조용히 일을 끝내기를 기다려주기도 한다. 의젓하고 점잖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이제는 완전한 가족의 일원으로서 일상의 소중한 부분을 함께하고 있다. 이로 인해 아일린 역시 리암으로 인하여 기분이 좋아지고 삶의 에너지인 엔돌핀이 끝없이 솟아난다. 세상을 사는 재미를 리암에게서 느낄 때가 너무나 많이 있다. 회사의 일로 출장을 떠날때는 특별히 리암을 잘 돌봐주는 이웃의 같은 또래 나이의 백인처녀 친구에게 맡기고 떠난다. 리암을 맡길 때는 리암이 좋아하는 올개닉 간식이나 과자, 영양식을 잔뜩 챙겨서 갖다 주고 떠난다. 강아지를 맡기고 돌봐주는데도 역시 돈이 필요하다. 강아지를 하루 봐주는데 50달러를 지불한다. 출장이 여러날 걸리면 강아지 보아준 대가의 돈 지불금이 몇백 달러를 훌쩍 넘긴다.

그렇다고 회사에서는 강아지 봐주는 값을 별도로 지불해주지는 않는다. 이것은 순전히 개인적 사정이고 회사의 몫이 아니다. 그래도 돈이 얼마가 들던간에 귀엽고 사랑스런 리암을 생각하면 아깝지 않다. 리암을 위해서라면 뭣이든지 다 해주고 싶다. 리암 역시 오직 자기의 주인인 언니만을 따르고 생각한다. 어느 때는 리암이 아파서 고생할 때는 자기의 혈육이 아파서 고생하는 것처럼 옆에서 돌보고, 동물병원에 데려가 치료를 받고, 극진한 병간호로 정성과 마음을 쏟는다.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고 위하고, 사랑하며, 이렇게 개와 사람, 인간과 동물간의 교감어린 무언중의 생활 속에서 서로는 눈빛, 몸짓, 동작하나를 보더라도 상대방의 의중을 훤히 읽어낼 수 있고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를 서로가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렇게 9년 동안을 함께 생활하며 살다보니 이제는 서로가 뗄레야 뗄수 없는 돈독한 관계가 되었다. 한 가족이 되다보니 리암의 이름 앞에 이제는 성씨(性氏)가 붙게 되었다. 즉 김 리암이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족은 리암을 부를때 김 리암, 하고 부른다 그러면 김 리암은 즉각 알아듣고 재빨리 언니 곁으로 달려온다. Ri Am, Kim, 김리암, 리암은 나의 딸 아일린의 절친한 친구이자 말벗이고 막내로 태어난 아일린의 동생이기도하다. 이러한 분신(分身)과도 같은 리암에게 큰 일이 벌어졌다. 호사다마라는 옛 속담이 있듯이 좋은 일 뒤에는 대개가 좋지 않은 일이 따르게 마련이라는 얘기다. 김 리암, 이 귀엽고 사랑스런 예쁜 강아지에게 무서운 병인 당뇨와 갑상선, 간기능 악화 등의 나쁜 질병이 찾아온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1064/20170329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