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가을의 감상에 젖어………..

<김명열칼럼> 가을의 감상에 젖어………..
[2016-09-21, 06:20:19]
선선한 가을바람에 밤새 맺혀진 이슬 한 방울이 한포기의 풀잎에게는 무거움을 안겨준다. 그 무게에 풀들은 땅으로 휘어지며 겸허해지고, 땅은 풀과 떨어지는 씨앗들을 품으며 포용의 너그러움을 그윽하게 보여준다. 태양의열기에 후끈 달아올랐던 아스팔트의 열기는 서서히 식어가고, 지구가 만든 그림자 속으로 달이 들어와 지워지듯 모습을 감춘다.
우리 곁에 다가온 가을 속으로 걸어가면 그 속에는 세상살이의 경쟁이나 욕심은 무채색이 되어 색깔이 바래져 보인다. 하늘은 파래져 높아졌고 내 마음은 태평양바다 물속처럼 깊어가고 있다. 이른 봄꽃을 피웠다 진자리마다 열매를 키워 행복함에 부풀은 나무가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며 바람을 부르고 있다. 이러한 가을이오면 왠지 슬프지 않아도 안으로 고이는 눈물은 그리움 때문인가…….. 오래전에 세상을 떠나신 어머님의 목소리가 가까이 들리고, 멀리 있는 친구가 보고 싶고, 죄 없이 눈망울이 맑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고 싶다.
찬란하게 빛나는 이 화사한 가을 속에는 햇살과 그늘이 함께 있다. 화사한 햇살을 받아 빛나는 나뭇잎과 그 아래에서 숨을 죽인 채 나뭇잎의 밝음을 받쳐주는 그늘이 함께 있어서 나는 이 밝은 가을이 너무나 좋다.
귀뚜라미가 밤늦도록 안타까이 울어대는 깊은 밤, 돌연하게 불어오는 스잔한 바람이 심술궂게 창문을 흔들고 지나간다. 어린 시절 느낀, 댓돌 밑에서 구슬프게 울어대는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캄캄한 밤의 적막을 희미하게 비추는 석유등잔불을 끄고 누웠을 때 문창호지에 고요히 흘러넘치는 푸르른 달빛, 시샘하듯 산들바람이 문풍지를 흔들 때마다 우수수 나뭇잎이 떨어지는 슬픈 소리며, 가을빛과 가을소리치고 이 모든 것들이 서글프고 애달프지 아니한 것이 없다. 가을은 흔히들 결실의 계절이니 수확의 계절이니 하지마는, 가을은 역시 서글프고 애달픈 계절이다.
깊은 밤에 귀뚜라미 소리에 놀라 잠을 깨었을 때, 그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것이 불현듯 그리워 지기도하고, 가을볕에 포근히 내려쬐는 흙먼지 나는 신작로만 바라보아도 어디로든 정처 없이 머나먼 나그네 길을 떠나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는 것도 역시 가을이 무한히 외롭고 서글픈 때문이리라……나는 이렇게 무한한 감상에 빠져들게 하는 가을을 좋아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모든 사계절이 저마다들 특색과 장-단점을 지니고 있지마는, 그러나 사람의 감정을 가장 깨끗하게 하는 것은 지금의 이 가을이 아닌가 생각된다.
봄은 사람의 기분을 방탕(放蕩)하게 하고 여름은 사람의 활동을 게으르게 하며 겨울은 사람의 마음을 음울하게 하건마는 우리 곁에 찾아온 이 가을만은 사람의 생각을 깨끗하게 해준다. 나는 가을을 외롭고 서글픈 계절이라고 표현했는데, 마음이 외롭고 서글퍼진다는 것은 그것이 곧 마음이 착해진다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감정 속에서 비애(悲哀)가 가장 순수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을날, 화사한 햇살이 따스하게 살결을 간질러 주듯이 감싸안을 때, 시원한 나무그늘에 앉아 파란하늘위로 바람에 날려 어디론가 떠나가는, 목화송이를 풀어놓은 듯한 구름을 보며 따끈한 한잔의 커피를 마시고 싶다.
봄날이나 여름날 한잔의 커피를 마심보다 초목이 빨갛게 물들어가는 가을날, 한잔의 커피와 만남의 이야기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고 긴 여운을 남길 것이다. 가을처럼 사람을 깨끗하고 순수하고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계절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을을 좋아한다. 그리고 사랑한다. 가을은 혼자 있어도 멋이 있고, 둘이 있으면 낭만이 있으며, 셋이 모이면 추억을 만든다. 그리고 시인에게는 고독 속에 사색으로 만들어진 시와 그리움이 있기 때문이다. 커피가 유독 맛있는 계절, 일부러 커피를 마시기 위해 카페나 커피점을 찾지 않고 집에서 진하게 우려낸 커피를 향내를 맡으며 마시는 것도 좋은 계절이다. 가을은 정말로 커피의 색과 닮았다. 나는 가을에 오는 감정에서 커피 향을 맡는다. 내가 가을에 커피를 자주 찾는 것은 굳이 꼭 커피를 마시고 싶어서가 아니다. 더불어 마음에 오는 계절과 사람에 대한 그리움, 어떤 따듯한 것을 즐기고 싶은 시간들이 섞여져 탁한 커피의 색을 내는 것 같아서 가을의 커피를 좋아한다.
가을이 점점 깊어지며 찬바람이 불고 날씨가 쌀쌀해지면 더욱 따듯한 커피를 찾게 된다. 나는 그 안에서 온기를 찾는 것이다. 커피 같은 보통의 온기를 즐기고, 즐기다보면 사람의 온기가 그리워지는 법이다. 유독 진득한 색의 가을을 보고 있으면 누군가가 그리운 법이고 이 진득하고 구름이 풍성한 하늘을 보여주고 싶다. 단지 여인의 향기가 그리운 것이 아니다. 가을이 되면 우리는 사색의 향기에 도취되어 감상에 사로잡히게 되고 감정을 실어 나르는 노인의 수레를 자주 찾게 되는 법이다. 나는 이런 일말의 행동들의 시발점은 가을이고, 가을은 그리움과 고독, 사색, 외로움을 불러일으키는 감정의 계절이라고 하고 싶다. <1039>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