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부모님께 효도

<칼럼리스트 / 탬파거주>
지난 주말 저녁, 오랜만에 직장생활을 하며 혼자지내는 딸의 집을 방문했다. 막내딸은 먼 곳에서 자기 집을 방문한 아버지를 위하여 시내 모처의 고급 레소토랑에 데려가서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이것저것 주문해서 맛있게 먹게 해주었다. 아버지의 접시위에 음식들을 올려
주며 많이 먹을 것을 권했다. 이 딸이 어렸을 때 식사할 때는 나의 무릎에 앉아서 내가 밥숟가락에 얹어주는 가시 바른 생선이랑 연한 고기들을 맛있게 받아먹더니 이제는 내가 나이가 들으니 거꾸로 아버지의 수저위에 맛있는 음식을 얹어주며 그걸 맛있게 먹는 아버지의 얼굴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며 기뻐하고 있다. 딸과 마주하며 식사하는 그 시간은 행복과 기쁨, 보람의 열매를 맛보는 인생의 참된 삶의 결정체였다.
오조사정(烏鳥私情)이란 말이 있다. 까마귀가 자라면 그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주며 어미의 은혜를 갚는다는 말이다. 말 못하는 미물(짐승)도 제 어미에게 효도를 다하는 아름다운 미풍의 글이다. 효(孝)는 알다시피 자식이 늙은 아비를 업은 모양의 글자로, 부모를 섬기는 것을 뜻하며 제(悌)는 동기간의 우애를 뜻한다. 이 효가 충(忠)으로 발전하고 제가 웃어른을 모시는 공경으로 발전하는 것으로, 집안에서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사람은 군주(공자가 살았던 시대에는 전제시대라 군주는 곧 국가를 의미했다)에 반기를 드는 법이 없고, 집안에서 동기간에 우애 있게 지내는 사람은 나가서 웃어른을 불손하게 대하는 법이 없다고 했다. 아울러 공자는 어버이를 모시는데 있어 단지 공양에 그치지 말고 항상 어버이를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강조했다. 인륜의 도(道)를 말하고 타인을 사랑하라는 인(仁)을 내용으로하는 공자의사상도 사실 효도에서 출발한 것이다.
해마다 5월이 되면 한국에서는 어버이달이라고 해서 장한 어머니상과 효자, 효부에 대한 상을 시상해주는 행사가 열리곤 한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면 우리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어머님들치고 장한 어머니가 아닌 어머님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한 어머니에게 우리 자식들은 모두가 효자와 효부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얼마나 어머니은혜를 몰라주면 상이란 제도를 만들어 그 은혜를 일깨워주려고 애쓰는가. 얼마나 불효자식들이 많으면 굳이 효자 상을 만들어 본받게 하려고 했겠는가.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금의 세상을 보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용돈을 많이 드리고 좋은 음식 배불리 잡숫게 해드리는 것을 효도의 전부인 것처럼 착가하고 사는 자식들이 많이 있다. 자주 찾아뵙고 진심으로 마음과 사랑으로써 부모를 섬기고 효도하는 마음이 없다면 음식과 물질로써 땜질하는 효행은 효도라고 볼 수 없다. 모든 부모님들은 물질적인 것보다 자식들의 따듯한 사랑과 관심을 더 바라고 원한다. 견마지양(犬馬之養)이라고 공자가 말했듯이 음식으로써(재물포함) 부모를 모시기만하고 효도하는 사랑과 섬김의 마음이 없다면, 개나 말뿐 아니라 앞에서 말한 까마귀처럼 다른 짐승들도 이와 같은 행동의 섬김은 할 수 있다.
또한 공자의 말씀에 부모가 계시거늘 멀리 가서 놀지 아니하며 (父母在어시든 不遠遊하며), 놀되 반드시 있는 곳을 밝혀야 할 것이다. (遊必有方이니라). 공자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어버이의 마음을 편안케 해드리라는 의도에서 한말이다. 자식을 늘 생각하는 부모는 자식이 멀리 떨어져있으면 혹여 자식이 어떻게 되지나 않을까 언제나 걱정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곳에 가든지, 어디서 살고 있든지 간에 부모님에게 있는 곳을 알려드리고 안부를 올리며 부모님의 걱정을 덜어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님의 마음과 걱정을 편하게 해드리는 것도 효도인데, 걱정을 드리고 편하게 못해드린다면 그것을 어찌 효도를 한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반의지희(斑衣之戱)라는 말이 있다. 늙은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해드리기 위하여 색동저고리를 입고 기어가 보인다 함이니, 늙어서까지 끊임없이 부모님에게 효도한다는 뜻이다. 왜 색동저고리를 입고 기어가는가? 자식이 어린아이처럼 보여 부모가 나이들은 것을 애석해하거나, 수명이 줄어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공자는 이렇게 말했는지 모른다. 부모의 연세는 반드시 알아야한다. 오래사시니 한편으로 기쁘고 늙어 가시니 한편으로 두려운 것이다. 얼마 전에, 눈이 펑펑 쏟아지는 어느 추운날, 한국의 모 TV 방송국에서 끼니를 굶으며 공원, 놀이터에서 소일하고 있는 노인들에게 어느 중년의부부가 음식대접을 하고 있는 선행 담을 방영했던 적이 있었다. 그 부부는 조그마한 가게를 운영하며 넉넉지 못한 살림을 꾸려가고 있는데도, 그러한 선행을 꾸준히 해왔다고 한다. 물론 자신들의 처지가 여유 있고 넉넉지 못한 편이다보니 음식이라야 변변치 않은 빵이나 과자와 같은 간식에 불과한 종류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매일 몇 년 동안 점심때마다 여러 어르신 노인들에게 제공하고 대접해 드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방송기자가 그들 부부를 붙잡고 인터뷰를 요청하자 한사코 거부하며 총총히 발길을 돌리는 선행의 주인공 부부…….이 광경을 보고 아직도 우리사회는 저렇게 가슴 따듯하고 온정을 베푸는 장한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한편으로는 서글픈 생각도 함께 들었다. 까마귀나 말 못하는 짐승도 제 어미를 공양한다는데 ……..저렇게 먹을 것을 못 먹고 굶고 있는 노인들 중에는 자식이 없는 사람보다는 자식이 있는 분들이 더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의 이러한 생각과 판단이 잘못된 것이라면 좋으련만….. 어쩐지 지금도 가슴위에 맷돌짝을 얹어 놓은 듯 답답하고 무겁기만 하다.
(자녀들아 너희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네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성경말씀 신약전서 예배소서6:1~3에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관심이 부모에 대한 자식의 관심보다 훨씬 더 크다. 아무리 자식이 부모에게 신경을 쓰고 잘 해드린다 하더라도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보다는 못하다. 그래서 부모의 은혜는 하해와 같다고 하는 것이다. 이 부모님의 은혜를 다 깨닫지 못하는 것이 자식이다. 어찌 부모님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대부분이 부모가 된 후에야, 그것도 나이가 들은 후에야 깨닫게 되니 그때는 이미 기회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잘해야 할 것이다. 부모님의 은혜를 다 알지 못하고 그 은혜를 다 헤아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자식 된 도리로 부모님에게 잘해드려야 될 줄로 안다. 어느 자식은 자기의 부모가 자기에게 무관심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식에게 무관심한 부모는 없다. 바로 그 무관심은 관심의 표현인 것이다. 너무 관심을 가지다 지쳐서 무관심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자식이 부모에게 실망을 주었다는 증거이다.
나이 구십이 넘은 어머니가 나이 칠십이 된 자식에게 외출할 때 하시는 말씀이 (길조심 하거라 차조심 하거라)고 하신다. 이렇게 부모님은 한시도 자식에 대해서 관심이 떠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부모님의 마음이고 사랑이다.
부모가 나이가 들면 다시 어린이가 된다. 다시 말하면 보호를 받아야하고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야한다. 늙으면 모든 기능이 약해지기 때문에 돌봐주는 사람이 있어야한다. 어렸을 때는 우리가 부모의 양육을 받았지만 이제 자라서는 다시 나의부모를 양육해야한다. 특히 건강관리를 힘써드리고 의식주문제를 해결해드려야 한다. 항상 사람들이 자주하는 말이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잘해 드리는 게 효도라고 한다. 그러나 막상 곁에 있으면 그게 소중한 건지 잘 깨닫지를 못한다. 그렇지만 나중에 돌아가시고 나면 깨닫게 되고 후회를 하게 된다. 부모님과 함께 살아갈 그날은 우리가 살아갈 그날보다 훨씬 적다. 그것을 잊지 말고 지금 잘해드리자. 그것이 최선이다. 부모님께서 고생하시며 키워주시고 오늘날이 있게 해 주셨으니 힘과 정성을 다하여 잘해드리고 한번이라도 따듯하게 손을 잡아드리며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자. 그동안 소홀히 했던 부모님의 소중함에 대해 다시 한 번 반성하며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지금부터라도 효도에 힘쓰자.
myongyul@gmail.com <1023 / 0511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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