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칼럼> 원수가 만들어지듯 평화도

<김호진목사 / 올랜도 연합감리교회 담임>
“원수는 생기는게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한 여성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원수가 없으면 좋으련만 살면 서 원수가 많아집니다. 한국에 꼴 보기 싫은 사람들이 있어서 미국에 이민하는 경우도 있지요. 미국 와서 새롭게 시작했는데 돌아보니 원수들이 생깁니다.
과거와 현재의 원수들이 내게 행한 상처와 아픔으로 괴롭습니다. 용서해 보려고 애를 쓰지만 잘되지 않습니다. 교회에 가보면 다를까 했는데 교회에서도 원수들이 생깁니다. 결국, 원수가 생기는 것은 장소와 시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 원수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누가 만들었나요? 바로 내가 만든 것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말입니다.
분단된 나라에서 살아온 경험 때문인지 우리는 통일된 것을 좋아합니다. 식당가서도 이것저것 시키기보다 메뉴를 하나로 통일하라고 암묵적인 눈짓을 받아왔습니다. 과반수보다도 만장일치를 더 좋아합니다. 튀는 것 보다 잠자코 있는 것을 미덕으로 여깁니다. 옷도 밝은 원색보다는 중간 톤을 선호합니다. ‘대충 알아서 해주세요.’라 는 말은 내 맘에 원하는 것이 있으니 이걸 맞춰보라는 퀴즈입니다. 다른 것(Difference)은 잘못된 것(Wrong) 이라는 생각이 우리 맘에 있습니다. 이때 다름은 문제가 되고 그 문제는 우리의 관계에 벽을 만들고 그 벽은 서 로에 대한 관계를 단절시키고 마침내 공동체의 화합을 무너트리게 됩니다.
분명 통일하려고 했건만 결국 분열 의 아픔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아이러니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다름의 문제가 불씨가 되어 분열로 치닫게 되는 것을 봅니다. 어떤 분이 그러시더군요. 교회 여선교회 안에 3대 파가 있는데 바로 ‘미원파, 다시다파, 오게닉파,’ 라고 말입니다. 미원을 넣어서 국을 끓이는 사람들은 다시다를 넣자는 사람과 다툼이 생깁니다. 이걸 보는 오게닉파에게는 미원이나 다시다나 오십보 백보입니다. 서로 간에 입맛이 다른 것뿐인데 이게 다툼이 되고 분열이 되어 결국 교회 안에 원수를 만들게 됩니다.
미숙한 사랑은 서로의 공통점에 매료되어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고향이 같아서, 나랑 성격이 비슷해서, 코드가 맞아서, 취미가 같아서, 생각이 같고 꿈이 같아서, 등등… 나랑 같은 것이 있어서 사랑합니다. 그런데 이 사랑 이 곧이어 ‘다름’이란 벽을 만나게 됩니다. 고향은 같은데 살았던 환경이 전혀 다릅니다. 성격이 비슷한 줄 알았 는데 양파껍질같이 숨겨진 성격이 계속 튀어나옵니다. 코드가 맞는 줄 알았는데 타이밍이 다르고, 생각과 꿈이 같은 줄 알았는데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과 이뤄가는 방법이 전혀 다릅니다. ‘다름’이란 커다란 암초를 만난 것 입니다. 이때 사랑은 소멸하던지, 정체되던지, 도약하던지 셋 중에 하나의 형태로 전개됩니다. 소멸하고 정체되는 사랑은 배신과 미움의 에너지가 되어 서로를 원수로 만듭니다. 그러나 도약하는 사랑은 다름이란 장벽을 뛰어넘고서 성숙한 사랑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왜 내 주변에는 나를 괴롭히는 원수가 이렇게 많이 생겼을까 생각하기보다 이 많은 원수들을 만든 장본인이 바 로 나로구나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내 기준에 통일시키려 했던 나의 이기심, 다름을 인정하지 않았던 나의 고집스러움, 네가 잘못됐다 정죄한 나의 교만함,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자신을 속이는 자기기만. 어느덧 사방에 나를 우겨 싸고 있는 원수들을 스스로 만들어놓고서 외로움에 떨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 내가 만들어놓은 원수들에게서 해방돼야 하겠습니다. 그들과 화해하는 것입니다. 원수가 생기지 않고 만들어졌듯이 화해도 그냥 생기지 않고 만들어집니다.
원수를 만들어 놓은 것이 나에게서 나왔듯이 그들과 화해하는 것도 나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을 위하여 우리는 다름을 틀림으로 보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동시에 노력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입장에 서보고, 그 사람의 눈높이를 맞추어보고, 그 사람의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한 두 번 해보고 마는 게 아니라 부단히 해야 합니다. 다름이란 벽을 한 번에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부지런히 끈질기게 기어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넘어가게 된 것이 도약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사랑의 성숙을 경험하고 공동체의 화합을 만들어갑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정신이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입니다.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그러므로 이제 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에베소 2:16,19) <1019 / 0413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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